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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교회_김양재목사님/주일설교녹취기록

돌이키실 때에 기뻐하리로다(김현우 목사님)

by relife_es 2025. 11. 24.

시편 52:1-9

1포악한 자여 네가 어찌하여 악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하는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

2네 혀가 심한 악을 꾀하여 날카로운 삭도 같이 간사를 행하는도다

3네가 선보다 악을 사랑하며 의를 말함보다 거짓을 사랑하는도다(셀라)

4간사한 혀여 너는 남을 해치는 모든 말을 좋아하는도다

5그런즉 하나님이 영원히 너를 멸하심이여 너를 붙잡아 네 장막에서 뽑아 내며 살아 있는 땅에서 네 뿌리를 빼시리로다(셀라)

6의인이 보고 두려워하며 또 그를 비웃어 말하기를

7이 사람은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자기의 악으로 스스로 든든하게 하던 자라 하리로다

8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하리로다

9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내가 영원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하시므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사모하리이다

 

시편 52, 53편은 다윗의 지혜의 교훈, 마스길이고 악인으로 고통하는 환경에서 내가 포로된 것이 보이고 내 혀가 간사한 것이 보여서 주님 만이 내 소망이시고 나의 기쁨이라고 고백하는 노래입니다. 그 중에 시편 52편은 다윗이 한 사람 때문에 너무 큰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도엑이라는 한 사람 때문에 52편이 나온 것입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그 한 사람을 묵상하다 보니까 오히려 내가 혀로 죄를 짓는 것이 그 사람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게 되고 이런 내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깨달아져서 아둘람 굴에서도 천국을 누리고 있더라 라는 고백입니다. 저 사람이 어떻게 나한테 그럴수 있냐고, 왜 저사람 때문에 내가 이렇게 힘들어야 하냐고 화가 났는데 나는 더 그런 사람이었네 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굴 속에서도, 작은 집에서도 천국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53편은 돌이키실 때에 기뻐하리로다의 제목처럼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포로가 된 데에서 돌이키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53:6 ...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며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다윗이 이것을 쓰고 나서 수백년 뒤에 이스라엘이 포로가 됩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바벨론의 포로가 된 것을 생각하기도 하지만 미움의 포로, 옳고 그름의 포로, 하나님 앞에서 죄인 된 것을 회개하지 못하는 내 자신의 의의 포로가 되었는데 하나님이 나를 돌이키셨네요. 감사합니다. 이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 포로가 된 것같이 억눌리게 하는 힘든 환경이 오히려 내가 죄와 사망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천국을 여전히 누리게 하는 귀한 환경인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난을 통해 천국을 누리를 삶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하나님을 더욱 기뻐할 수 있는 줄 믿습니다. 함께 묵상합니다.

 

돌이키실 때에 기뻐하리로다

1.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기에 내 죄를 심판해 주십니다.

52편의 표제를 보면 에돔인 도엑이 사울에게 이르러 다윗이 아히멜렉의 집에 왔다고 그에게 말하던 때에... 좋게 말해서 말하던 때에 이고 고자질 하던 때에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당시에 다윗은 장인인 사울에게 쫓겨다녔습니다. 사울이 왕이잖아요. 왜 이렇게 쫓겨다녔냐면 이런 노래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나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 있다고 하니까 내 왕우이를 노리는구나 질투해서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가족이 나를 질투하고 죽이려고 하는 것도 너무 힘든데 이제는 나와 상관도 없고 민족도 다른 도엑이 심지어 계급으로는 나보다 한참 낮은 도엑이 나를 고발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얼마나 다윗이 억울하고 화가났을까요? 이 상황에서 노래를 하는 겁니다.

1포악한 자여 네가 어찌하여 악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하는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

포악한 자여 라고 했으니까 표제에 나오는 도엑임을 알수 있습니다. 다윗은 도엑에게 어찌하여 악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하냐고 합니다. 무슨 계획일까요? 다윗의 위치를 알려주어서 다윗을 죽게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고발해서 다윗을 죽게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윗은 죽고 자기는 사울 왕에게 잘보여서 성공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기적인 계획이 정말 남을 힘들게 해서라도 성공하려는 오직 나 자신만을 위한 계획이 악한 계획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포악한 자가 악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할 때 다윗에게는 그것을 대적할 또다른 계획이 있었을까요? 가드 왕 앞에서는 침만 흘리던 다윗입니다. 계획을 세울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다윗에게는 그 계획을 뛰어넘는 든든한 뒷배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 입니다. 여기서 인자하심은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헤세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무한하신지를 생각하려면 우리의 유한한 사랑의 한계와 비교해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자녀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우리의 사랑이 유한하다보니까 분명한 한계를 자녀들 앞에서 보여줍니다. 제가 딸을 양육할 때 아침, 점심 까지는 제가 봐도 제가 너무나 자상한 아빠입니다. 딸의 요구에 바로바로 응해주었습니다. 너무나 심한 장난을 칠 때도 다 받아주고 해달라는 것 다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저녁이 되면 체력도 인내심도 방전이 됩니다. 낮에는 잘 받아주던 똑같은 장난을 저녁에는 갑자기 분조장 아빠가 되어서 받아주지를 못하고 지킬앤하이드 처럼 갑자기 소리를 빽 질렀습니다. 그래서 딸이 유치원 등원 거부와 초등학교 등교 거부를 했습니다. 모범생인데 선생님께 혼날 까봐 무서워서 못 가겠다고 두세 시간을 울다가 갔습니다. 지금은 공동체의 사랑 덕분에 잘 가고 있습니다. 내가 넉넉하게 있을 때는 잘해주다가 체력이 떨어지고 인내심이 떨어지니까 인자가 아니라 화를 내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자와 사랑에는 한계가 너무나 확실합니다. 제 딸이 불안한 게 제 삶의 결론인 것입니다. 회개하며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의 사랑과 인자하심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 이것이 다윗이 비빌 언덕이었던 것입니다. 밤이고 낮이고 꼭두새벽에도 하나님은 언제나 동일하게 우리를 사랑하신 줄로 믿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악한 사람이 나를 고발하고 힘들게 해도 내가 버텨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비빌 언덕이 되시는 하나님을 저와 여러분이 다시 한 번 생각하고 붙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요즘 자신에 대한 악플을 견디지 못해 잘못된 선택을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그런 상황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도엑이 손가락 파이터가 되어 다윗에 대한 악플을 쓰는 겁니다. 그런데 그 다윗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변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분명한 자존감이 있기 때문에 나를 향한  악한 계획, 그 악플을 담대하게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그 말을 직면하고 진짜 그러한가 오늘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이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가 붙들어야 할 자존감인 줄 믿습니다. 나를 존재 자체만으로도 사랑해주시는 하나님의 인자가 항상 있기 때문에 존재 만으로도 자존감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 말을 하는 저도 자존감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저는 진짜 이 앞에 서는 것도 힘든 사람입니다. 그래서 방송 출연 제의를 받았는데 제 얘기를 했을 때 다른 사람들이 악플을 쓰면 지난 주에 등록한 우리 어머니 어떻게 될까? 내가 그 악플을 읽을 수 있을까? 생각하니까 아직은 감당이 안 될 것 같아 못 나가겠다고 어머니의 구원을 위해서 있어야 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이렇게 자존감 없는 저를 다윗의 고백으로 같이 나누게 하신 것이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자존감이십니다. 하나님이 저의 아버지이십니다 하고 고백하고 나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도엑의 악한 계획을 직면하며 2절을 노래합니다.

2네 혀가 심한 악을 꾀하여 날카로운 삭도 같이 간사를 행하는도다

도엑의 혀에 인격이 있는 것 같습니다. 네 혀가 심한 악을 꿰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날카로운 삭도, 칼 같이 간사를 행한다고 합니다. 자기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고 에돔 사람인 도엑인데 거기다가 고발하는 사람은 왕의 사위이니 말 한 번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으니 칼 날 위의 물방울 처럼 사울 앞에서 간사를 행해야 하고 동시에 그 말이 다윗에게는 날카로운 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높은 사람에게는 말 조심, 낮은 사람에게는 마구 찔러대는 게 우리의 모습인 것입니다. 다윗은 왜 도엑의 혀가 이렇게 악을 행하는지 직면하고 진단합니다.

3네가 선보다 악을 사랑하며 의를 말함보다 거짓을 사랑하는도다(셀라)

선, 의보다 악과 거짓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마땅히 사랑해야 할 것보다 사랑하지 말아야 할 것을 사랑하기 때문에 아부하거나 상처를 준다는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말을 못하고 지나치게 아부하거나 지나치게 상처를 주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죄인인 자신을 너무 사랑하니까 어떤 말을 해도 자랑과 아부가 되고 다른 사람에겐 상처가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도엑 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의 어머니는 놀랍게도 친어머니 이십니다. 자기가 낳은 자식에게 상처 주고 싶은 사람이 어디있겠습니까? 그런데 저는 어머니의 말에 상처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께 말 좀 조심하시라고 대학생 때 말의 힘 이라는 책을 사드렸습니다. 그런데 돌아보니까 어머니가 상처되는 말이 무엇인지 제가 너무 잘알고 있어서 그 말만 쏙쏙 골라서 했던 게 바로 저 였습니다. 어머니는 감정적이시니까 그런 말을 하시는 건데 저는 계산적이어서 어머니께 이 말을 하면 상처 받겠지 하며 아주 정확하게 타격을 했던 제 혀가 간사한 혀가 맞더라구요. 정직하게 돌아보면 사랑해야 할 것은 사랑하지 않고 악을 더 사랑한 제 모습을 보게됩니다. 제가 도엑 맞습니다. 이렇게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우리의 혀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오히려 상처를 주게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우리는 도엑이 됩니다. 자녀를 사랑하지만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사랑을 주니까 상처만 주고 상처만 받습니다. 이렇게 나 중심적인 사랑에서 나오는 말은 나도 죽이고 남도 죽이는 것입니다. 결혼도 마찬가지입니다. 나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행복이라는 목적에 우리의 중심이 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상처를 주고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나 때문에 말을 하고 나 때문에 아침을 차리고 나 때문에 적용을 하니까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더라구요. 그런데 이 번 주에 놀라운 가정을 보지 않았습니까? 아프리카 선교보다 힘든 재혼 가정이 이타적인 적용으로 심방하고 상담하다 보니까 싸움이 그쳤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공동체를 사랑할 때에야 상처뿐인 가정에서 상처가 약재료가 되어 사람 살리는 가정이  될 줄 믿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윗은 셀라 라고 합니다. 잠깐 쉬면서 깊이 묵상하는 시간을 갖고 나서 혀에 대해 묵상하다 보니까 이렇게 외치면서 시작합니다.

4간사한 혀여 너는 남을 해치는 모든 말을 좋아하는도다

앞서 포악한 자여 하면서 도엑을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셀라의 깊은 묵상을 마치니까 포악한 자가 아니라 간사한 혀여 라고 하고 노래를 부릅니다. 간사한 도엑의 혀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혀를 묵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도엑이 아니라 이제는 혀에 대해 집중하며 모든 혀가 간사하구나 하고 고백합니다. 이렇게 간사한 혀는 남을 해치는 모든 말을 좋아한다고 합니다. 남의 수치를 나누는 말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목장 세 시간은 힘들어도 남의 뒷 담화 세 시간은 쉽잖아요. 우리가 다 간사한 혀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치 그 사람을 위한다고 하면서 그럴듯한 이유를 대며 그 사람의 수치와 죄를 드러내는 혀가 우리의 혀입니다. 내 혀이지만 내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는 게 또 우리 혀입니다. 하지만  남에 대해서 험담하고 고발할 때에는 따발총이 되는 게 우리의 혀입니다. 그러나 우리 혀가 창조하신 주님의 의도에 맞게 기능할 때가 딱 한 곳 있습니다. 바로 공동체 안에서 말씀으로 깨닫는 내 죄와 수치를 나눌 때 비로서 내 혀가 제 기능을 합니다. 제가 어머니의 죄와 수치는 정말 많이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수치를 나눌 때는 여전히 자존감이 낮고 여전히 아침, 점심, 저녁으로 자살 충동이 올라오고 매순간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저의 죄와 저의 수치를 나누기 시작하니까 자존감이 높아지고 자살 충동은 낮아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니까 진짜 나를 사랑하는 방법은 내 죄와 수치를 말씀 안에서 나누는 것입니다. 혹시 공동체 안에서 내 죄와 수치를 나누다가 힘든 일을 겪을까봐 걱정되는 분 계십니까? 저도 처음에 그랬습니다. 놀랍게도 우리가 말씀 공동체 안에서 오픈하면 하나님이 지켜주십니다. 내가 당해야 할 수치를 겪고 가기를 각오하면 하나님이 지켜주십니다. 여호와의 인자는 항상 있도다. 광풍 가운데서도 이제는 안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말씀 안에 깨달은 내 죄를 고백할 수 있고 그것이 나를 보호하고 지키는 방법인 것입니다. 이렇게 형에 대해서 묵상하기를 마친 다윗은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기 시작합니다.

5그런즉 하나님이 영원히 너를 멸하심이여 너를 붙잡아 네 장막에서 뽑아 내며 살아 있는 땅에서 네 뿌리를 빼시리로다(셀라)

하나님이 영원히 멸하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영원히 멸하는 지옥에 대한 말씀이 성경에 가장 많이 나옵니다. 천국보다 더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심판은 장막에서 뽑아내고 땅에서 뿌리를 빼시는 것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여기서 끝나지 않고 영원히 된다고 합니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고 회복될 수 없는 심판이 있다고 합니다. 왜 이렇게 무시무시한 심판을 선포할까요? 그러니 이 땅에서 심판 당하고 고난 받고 회개하고 멸망 당하지 않는 게 최고다 이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 간사한 혀가 지금이라도 회개하는 게 최고다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잠시 장막에서 뽑아내시는 심판을 당하고 살아 있는 땅에서 뿌리를 빼시는 고난을 당하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 얘기를 하는 겁니다. 죄를 짓든 말든 가만히 두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정말 사랑하는 자녀가 수많은 차들이 가는 곳에 막 뛰어간다면 가만히 지켜보겠습니까, 뛰어가서 말리겠습니까? 우리는 방치하지 않고 말립니다. 사랑은 방치가 아닙니다. 제 딸이 미운 4살 일때 집 앞에 산책을 나갔는데 8차선 도로에서 갑자기 손을 뿌리치고 차로 뛰어가기 시작하는 겁니다. 불러도 대답이 없고 뒤 돌아보지도 않고 뛰어가는 겁니다. 저러다 죽으면 내 탓 아니다 나는 열심히 소리질렀어 하며 가만히 있는 게 사랑일까요? 나는 인격적으로 자녀를 길러야 되니까 가만히 내두고 그의 행동에 동의해줘야지 하는 부모가 어디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 말실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공동체 안에서 낱낱이 드러나는 것이 수치를 당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챙겨주시는 사건인 것입니다. 내 죄가 공동체 안에서 드러나는 것은 하나님이 안돼 하시며 말리시는 사건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돼. 거기로 가면 죽어. 큰 일 나. 하나님이 항상 있도다 하시는 인자로 우리를 막아주시는 겁니다. 이것이 공동체 안에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사랑인 줄 믿습니다. 붙어만 가도 수지 맞는 공동체가 맞습니다. 다윗이 쓴 23편에 이 모습이 나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하면서 노래를 부르다가 내 평생에 주의 인자와 자비가 평생 나를 따르리니 의 따르리니는 졸졸 쫓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냥개가 멧돼지나 사슴을 따라가는 것처럼 전속력으로 따라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차도로 뛰어가는 것을 하나님이 전 속력으로 따라서 막아주시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이 포로가 되더라도, 고발을 당하더라도, 우리가 돌이키게 하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가장 사랑하시는 줄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 사랑을 받고 살고 있습니다.

 

내 힘으로 안되는 사건을 맞으면서 하나님께 돌아오게 되었다는 간증입니다.

저의 아들이 고등학생 때 상상도 못한 일을 할 줄 몰랐습니다. 휴학을 한다고 하질 않나 그냥 일탈인 줄 알았지만 결국 나중에는 자퇴를 한다고 하질 않나 그런 일이 있은 후 벌써 몇 십년이 지났습니다. 나중에 아내가 교회를 다니게 되었지만 고난이 축복이라는 말은 이해도 안되고 받아들여지지도 않았습니다. 자연히 목장은 참석할 마음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이 방황하는 해달별이 떨어지는 사건을 겪으면서 정말 기대했던 아들에게 실망하게 되었습니다. 둘째 아들에 대한 상황을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저의 삶을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이 저를 놓치 않으셨기 때문에 결국 저도 목장도 참석하고 수요예배까지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상하게 찬송하면 눈물이 나왔습니다. 어느 날에는 한 숨을 쉬며 터덜터덜 휘문으로 걸어가면서 눈물이 나는데 아들이 속 썩이지 않았다면 절대로 제가 교회를 다니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강제로 견인하셨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의 인생의 논리는 아주 단순합니다. 열심히 하면 성공할 수 있다 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계시다면 정말 열심히 하는 사람은 당연히 성공 한다고 생각했고 그에 맞게 정말 열심히 살았습니다. 제가 가진 세상의 이치와 논리에 맞지 않았던 사람들을 다 비난했는데 특히 아버지와 형이 그랬습니다. 그러니 용서가 안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열심히 살았는데도 아들이 저렇게 되니 제 세상 이치에 맞지 않아 답답하기만 했던 것이 저의 심각한 자기 중심성 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박해와 울음의 사태였습니다. 결국 그 사건으로 교회로 인도되었습니다.

둘째 아들이 보석 맞습니다. 둘째 아들이 아니었으면 목자님이 목자님 되셨겠어요? 심판인 것 같고 정말 나를 고발하는 사건이 있어서는 안 될 사건인 것 같지만 하나님이 부르시는 사랑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도엑같이 비난하던 내 죄를 보는 것이 항상 있는 하나님의 인자를 경험한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적용 질문

- 힘든 사건과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사랑이 항상 있다는 것이 믿어지십니까?

- 걱정하는 것처럼 말하면서 다른 사람의 수치와 죄를 드러내어 해롭게 한 적이 있습니까?

- 이런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심판의 사건을 허락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2.의인은 심판 앞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6의인이 보고 두려워하며 또 그를 비웃어 말하기를

의인의 특지은 악인의 심판을 보고 비웃기도 하지만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고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것이 의인 인줄 믿습니다. 앞서 도엑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이 사람이 이르고 나서 사울이 아히멜렉 제사장 가문을 다 죽이라고 했을 때 사울의 군사들은 아무도 그 일을 못했는데 도엑이 나서서 하겠다고 하고 제사장  죽이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용기가 아니라 심판 받을 죄악이더라구요. 하나님도 없다 내 힘으로 산다며 사는데 잘 되는 것은 축복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너무 두려워서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고백하는 것이 축복이더라구요. 심판할 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의인들이 그를 비웃어 말한다고 합니다. 역전이 되는 것입니다. 심판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심판이고 믿는 우리에게는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구원 받은 우리에게 붙회떨감은 붙어도 회개하고 떨어져도 감사하는 것은 이상한 게 아닙니다. 붙어서 감사하는 것은 세상도 할 수 있습니다. 떨어져서 자책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붙어서 오히려 하나님 앞에 내 죄를 보며서 회개하고 떨어지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인자가 항상 있도다를 깨닫게 하신 사건인 것을 알고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떨어진 아이들이 큐티를 더 잘합니다. 

의인들이 뭐라고 하면서 비웃을까요?

7이 사람은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자기의 악으로 스스로 든든하게 하던 자라 하리로다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고... 하나님 대신 모든 재물의 풍부함, 내 의를 쌓아 나는 옳고 당신은 틀렸다의 풍부함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겠죠. 그러니 착한 게 악한 것 맞습니다. 하나님 대신 God이 아니라 Gold를 의지하는 것이 악인의 특징인 것입니다. 있으면 먹고 없으면 금식하고 죽으면 천국 가는 게 인생인데 하나님보다 더 의지해서 Gold를 쌓아야 된다고 하며 있으면 자존감이 올라가고 없으면 자존감이 내려가는 게 악인의 특징인 것입니다. 자기 악으로 스스로 든든하게 하는 자가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만난 자존감,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의 자존감으로 나아가야 할 줄 믿습니다. 잔고가 많아도 감사하고 회개하고 잔고가 없어도 감사하고 회개하는 것이 되어야 하는데 어렵습니다. 그런데 사건들을 통해서 정말 믿음의 대제사장으로 가정들마다 세워지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이 당시 다윗은 사울을 피하느라 진짜 있으면 먹고 없으면 금식하고 였습니다. 그래서 아히멜렉 제사장에게 떡 좀 달라고 구걸핫듯이 거짓말을 하기도 했고 가드 왕 앞에 갔을 때 수염에 침 바르고 대문을 그적거리며 미친 척했던 다윗이었습니다. 그리고 겨우 갔던 곳이 굴 속이었습니다. 자기 스스로 든든하게 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겸손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굴 속에서도 자기의 힘이 하나님 이라는 것을 경험했으니 나의 풍부함, 나의 든든함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인자가 항상 있도다를 경험한 다윗이 이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내가 이렇게 겸손한 환경이지만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그런 의인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것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내가 하나님 만을 의지한다고 하지만 여전히 내가 의지할 게 생기면 요동치며 흔들리는 인새입니다. 다윗이 편해지니까 옥상에서 여자 보고 데려다가 애기 만들고 그 남편을 죽이고.... 그러니 겸손한 환경이 없으면 우리는 여전히 의인 일수 없는 것입니다. 엎어지고 넘어지게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을 보면서 어쩌면 저럴 수 있어. 나는 당하지 말아야지가 아니라 나도 두려워 주님 붙드는 인생 살아야겠다 하는 것이 의인이 붙들 수 있는, 의인이 보일 수 있는 고백입니다.

 

붙들 수 있는 모든 것이 다 사라져 주님 붙들게 되었다는 청년의 나눔입니다.

저는 모태 신앙으로 태어났지만 아버지를 화장하는 시간 내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진심으로 만나고 천국 가서 아버지를 만날 수 있을지 목사님을 붙들고 물어보았습니다. 목사님은 그에 대한 답으로 큐티를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제 마음 속으로는 결국 목사님들의 처방은 늘 큐티구나 생각하며 더 막연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자주 그랬듯이 몇일간 무기력한 상태에 빠져서 퍼져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빠의 소천 이후 얼마 지나지 않나 하나님 대신 의지하고 있던 남자친구와의 이별까지 겪어 한순간에 제 모든 의지 대상들이 사라지니 오히려 제 머리 속에 목사님이 큐티해 보라고 하신 말씀이 다시 생각났습니다. 지금 상황이 너무 힘들어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지금이 온전히 하나님께만 의지해볼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인 것을 인정하고 밑져야 본전이니 일단 이 번만 온전히 하나님께만 집중해보는 시간을 가져보자 하면서 매일 큐티로 하나님께 집중하는 시간을 가져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제가 가진 불신과 의문점들을 큐티하며 당사자인 하나님께 직접 물으니 그동안 빈껍데기 같은 신앙 생활을 하며 들었던 제 수많은 궁금증에 대해서 하나하나 답변을 해주셨습니다. 심지어 저 스스로 인지하지 못했던 부분까지도 하나님은 그냥 넘어가지 않으시고 강남족집게 선생님처럼 다 집어주시면서 다 대답해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큐티를 하면 할수록 너무 두려움의 연속이었고 하나님이 제가 가늠하지 못할정도로 저를 많이 사랑하시며 제가 그동안 얼마나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저보다 훨씬 답답하고 마음 아파하셨을 거란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전에는 이해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동안 왜 목사님들이 결론으로 늘 큐티를 말씀하실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가 됩니다. 원래라면 제게 영원히 일어나지 못할 정도의 사건이 온 것이지만 공동체와 말씀이 있었기에 다시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아무리 하나님을 붙들고 가도 아직 제게는 아빠라는 빈 자리가 크게 느껴지고 눈물이 나지만 그럴 때마다 하나님 안에서 위로를 받으며 조금씩 주님께 나아가는 중입니다. 이렇게 점차 말씀으로 회복해가는 제 자신을 보며 아버지가 정말 마지막까지도 절 위해 수고해주신 것을 한 번 더 느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내가 스스로 할 게 하나도 없는 비천한 환경에 있다 할지라도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자체가 자존감이다 이것이 나의 복이다 고백할 수 있는 복을 누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적용 질문

- 다른 사람의 고난과 심판의 사건을 들을 때, 내 죄가 보여 두려워한 적이 있습니까?

- 내가 의지하는 것은 God입니까, Gold입니까?

- 하나님 외에 언제든지 의지할 수 있을 것 같은 것은 무엇입니까?

 

3. 어디서든지 천국을 누리게 하십니다.

8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하리로다

다윗은 그러나의 신앙을 보입니다. 앞서 이 땅에서 포악을 행하며 다른 사람을 해치고 고발하는 도엑과 사울이 여전히 있지만 다윗은 그러나의 인생을 누리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집에 있는 이 다윗의 고백은 어디서 했을까요? 사무엘상 21,22장의 동선을 보면 다윗은 아둘람 굴에 있었습니다. 환난 당하고 빚 진 자들이 모여있는, 홀아비 냄새가 났을 것 같은 아둘람 굴. 어디에도 안전한 곳이 없어서 아둘람 굴에 있는 다윗은 내가 하나님의 집에 있는, 그것도 푸른 감람나무 같다고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원한 인자하심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항상 있도다의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있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어요 라고 하는 겁니다. 메마른 광야, 캄캄한 아둘람 굴에 있어도 자신이 푸른 감람나무라고 하는 건데요, 감람 나무는 예민해서 빨리 죽는데 햇빛도 들지 않는 아둘람 굴 속에서 나는 푸른 감람나무 같도다 고백하는 겁니다. 계시록에는 하나님이 태양이 되시기 때문에 천국에는 태양이 필요 없다고 합니다. 바로 이 고백을 다윗이 천국을 누리면서 하는 것입니다. 빛도 들지 않는 이 아둘람 굴 속에 하나님이 친히 태양이 되시기 때문에 나는 푸른 감람나무 같도다 고백을 하는 겁니다.

우리는 차로 비교합니다. 수요일에 제가 너무 주눅들고 눌렸습니다. 제가 2005년식 그랜드 카니발을 끌고 다녔는데 옆 도어에서 놀물이 흘러내렸는데 점점 벌어지고 깨지고 달달달 소리가 나는 겁니다. 어느 날 새벽기도 오는데 동료 사역자들이 다 놀라서 차 뒤에서 하얀 연기가 난다고 했습니다. 그 차를 끌로 1년 동안 판교채플에 오는데 어쩌면 그렇게 독일차, 일본차, 하이브리드차, 전기차가 들어오는지 주눅이 들더라구요. 집도 나보다 넓은 데 사는 사람들, 좋은 아파트 사는 사람들 보면 주눅이 듭니다. 저희 집은 저보다 한 살 어린 아파트입니다.^^ 그런데 그 곳에서 열 명이 꽉꽉 차게 둘러 앉아서 목장을 할 수 있으니 저희 집은 하나님의 집이 맞구요 감람나무가 맞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할 게 없습니다. 하나님을 함께 찬양할 수 있는 공동체가 있고 그 사람들이 모일 수 있고 함께 주님 앞에 예배 할 수 있으니 여러분의 집은 하나님의 집이고 여러분은 푸른 감람나무 인줄로 믿습니다. 그게 우리의 자존감이고 이 고백인 것입니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 나라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 나라

제가 비정상적인 가정에서 형은 아버지가 다른 집에서 정서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항상, 어린이 날만 되면 아빠, 엄마 손 붙잡고 있는 아이들이 너무 부러워서 저 스스로를 갉아내고, 밥을 먹어도 몸에 안좋은 것만 먹고, 투게더 큰 한 통을 다 먹고... 이런 인생이었는데 주님이 만나주셨기에 아둘람 공동체 같고 아무것도 없는 것같은 인생이 여호와의 집에 푸른 감람나무 라고 고백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제가 다른 사람의 상처를 공감할 수 있고, 치료할 약재료가 있고, 아빠 없는 애들에게 해 줄 말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푸른 감람나무 잎사귀로 사용하시는 인생이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자존감이 되어 사명 감당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내가 아팠기 때문에, 내가 힘들어봤기 때문에 우리는 푸른 감람나무가 되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살리게 될 줄 모릅니다. 그 기대가 성령 행전을 쓰는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소망합니다. 이렇게 어떤 상황에서도 천국을 누리는 것은 목자님 간증처럼 내가 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멱살을 잡고 내 등을 잡아서 견인해 주시는 겁니다.

9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내가 영원히 주께 감사하고 주의 이름이 선하시므로 주의 성도 앞에서 내가 주의 이름을 사모하리이다

내가 천국을 누리는 이유는 놀라운 일을 다 행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집에 푸른 감람나무가 되도록 심판해주시고 고난 가운데 우리를 만나주시고 우리를 그의 자녀로 삼아주셨기 때문에, 어떤 환경에서도 나를 푸른 감람나무로 쓰시기 때문에 나는 할 게 없습니다.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다윗이 주의 이름이 선하시기에 성도 앞에서 주의 이름을 사모한다고 합니다. 성도는 아둘람 공동체, 빚지고 환난 당하고 원통한 400 명의 사람들 아니겠습니까. 공동체가 있어야 됩니다. 위로를 어디서도 받을 수 없지만 하늘 위로로 사는 사람들, 이것이 우리가 함께 찬양하며 함께 노래 불러야 할 공동체 인 줄 믿습니다. 이렇게 상황과 환경에 따라서 기뻐하고 슬퍼하는 이 땅이 아니라 오직 주님 때문에 기뻐하는 공동체가 된 것이 천국 공동체이고 천국의 맛보기 인줄 믿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고 계신 이야기입니다.

결혼할 때 남편은 보암직하고 먹음직한 사람이었습니다. 학벌도 좋고 가방끈도 길었고 저 사람이면 내가 평생 편하게 살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남편이 저와 의논하지 않고 제가 수술 받는 사이에 직장을 그만두고 10년 가까이 집에 있었습니다. 열심히 하나님을 믿었는데 왜 이런 일을 주셨냐며 많이 울었습니다. 신앙적으로 학문적으로 열심히 살았는데 내가 어떻게 해야될 지 몰랐습니다. 공동체에 와서는 내 죄패는 하나님 앞에 한 발 앞서는 것임을 깨달았는데 지금까지 그 씨름을 하고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도 끝까지 믿었던 것은 남편의 머리였습니다. 저렇게 있다가도 한 방이 있을거라 기대했습니다. 그렇게 믿던 남편의 머리를 뇌졸증 사건으로 가져가셨습니다. 운영하고 있는 학원이 어려워지면서 얼마나 내 열심이 많았는지 돌아보며 회개했습니다. 내면 가장 깊숙한 곳에는 내가 많은 짐을 지고 가며 내가 선택한 것에 대해서 즐겁게, 남들이 보기 좋게 인정 받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작년에 번아웃이 오면서 시아버지 시어머니에 대한 감정이 다시 올라옵니다. 인정 받지 못하면 분노하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태생적으로 교만해서 남의 잘못이 먼저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공동체에서 남편을 퇴근해서 매일 두 시간씩 운동 시켜준 목자님, 내가 퍼져있을 때 문고리에 음식을 걸어주었던 집사님, 내 손을 잡아주었던 공동체를 통해 여기까지 견디어 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신앙은 비합리적이라는 것을 공동체에서 많이 배우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비합리적입니다. 원수를 위해서 자기 외아들을 주셨습니다. 이게 어떻게 합리적입니까? 인간의 수준으로는 이해할 수도 인정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공동체가 있기에 우리도 비합리적인 사랑의 수고를 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옳은 멍소리 하지 마시고 가서 손 붙들어 주시고 손이 가는 수고가 있을 때 주의 성도들 앞에서 고백하는 찬양이 우리 공동체 안에 흘러나오게 될 줄 믿습니다.

 

적용 질문

- 나는 '그러나'의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그것 때문에'의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 내가 천국을 누리게 해준 최고의 환경은 무엇입니까?

- 나에게 있는 환난당하고 빚지고 원통한 '예배 공동체'는 누구입니까?

 

돌이키실 때에 기뻐하리로다 첫째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내 죄를 심판해 돌이키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의인은 심판 앞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내가 당하는 심판이 아니어도 그 나눔을 듣고 돌이킬 수 있습니다. 세번째 어디서든지 천국을 누리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둘람 굴에서도 돌이켜 기뻐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