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4:19-28
19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20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그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21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23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 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
24 비시디아 가운데로 지나서 밤빌리아에 이르러
25 말씀을 버가에서 전하고 앗달리아로 내려가서
26 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 곳은 두 사도가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27 그들이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하고
28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
본문은 사도 바울의 1차 전도 여행이 끝나는 내용입니다. 본문을 통해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 그리고 이미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의 나라에 어떻게 들어가는지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1. 둘러선 제자들이 있습니다.
19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20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그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 사도 바울의 전도 여행이 어땠는지 앞의 내용을 이해해야 합니다. 13장에 처음 등장한 교회가 안디옥 교회입니다. 안디옥 교회에서 말씀을 전하는 목사님이 바나바였습니다. 바나바의 사역이 엄청나게 일어나고 부흥을 경험하면서 바나바가 새로운 사람 사울이라 하는 바울을 데려와서 함께 사역을 합니다. 이 때 큰 말씀의 사역이 일어났습니다. 그 때에 안디옥 교회에 성령께서 친히 말씀하십니다. (13:2 내가 불러 시킬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그리고 3절에 안디옥 교회가 이 두 사람을 따로 세우고 금식하고 기도하고 안수해서 보내는데 이것이 사도 바울의 1차 전도 여행의 출발입니다. 성령의 보내심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1차 전도 여행을 마무리 짓는 게 본문입니다.
지도를 보며 살펴보면 수리아 안디옥 교회에서 안수해서 보냅니다. 안디옥에서 처음 도착한 곳이 구브로 섬 살라미입니다. 그리고 살라미에서 구브로 섬을 관통해서 도착한 곳이 바보입니다. 바보에는 로마가 임명해서 그 지역을 다스리게 한 로마 시민권자 서기오 바울이라는 총독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서기오 바울 옆에 마술사 엘루미가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마술사의 눈을 멀게 했고 서기오 바울이 복음을 받아들입니다. 이 곳 바보에 복음이 증거 되고 바울은 지중해로 올라가서 버가에 도착합니다. 버가에서는 마가라는 요한이 돌아가버립니다. 버가에서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가려면 굉장히 높고 험준한 토로스 산맥을 지나가야 하는데 마가 요한이 이 산맥을 보고 돌아가 버렸다는 설도 있고 바울이 바나바를 넘어서서 리더십을 가지니 그 바나바의 조카였던 마가가 실망하고 돌아갔다는 설도 있습니다. 아무튼 여기서 마가 요한이 배신해서 떠나가 버립니다. 이에 굴하지 않고 바나바와 사울은 토로스 산맥을 넘어 비시디아 안디옥에 도착합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바울은 명설교를 합니다. 시편 21편 말씀과 하박국 말씀을 인용하여 설교하니 수많은 사람들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수많은 믿는 사람들과 동시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함께 일어납니다. 이 반대하는 사람들을 피하여 간 곳이 이고니온 입니다. 이고니온에서는 오래 머물러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또 말씀을 증거하니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고 제자들이 일어나는 동시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일어나 돌을 쳐서 죽이려고 하니까 피해서 간 곳이 루스드라입니다. 이 루스드라에서는 복음을 전하고 기도하고 명령하니 앉은뱅이가 일어나 고침을 받습니다. 그러니 루스드라 사람들이 놀라며 바나바와 바울을 제우스와 헤르메스라고 하니 사도 바울이 깜짝 놀라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넘어온 유대인들이 사람들을 선동해서 그렇게 찬양했던 사도 바울을 향해 죽이려고 돌을 던지는데 바로 본문 19절입니다.
19절은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확장되는지를 보여주는 본문입니다. 추석 때 복음을 많이 전했는데 반응이 믿는 사람도 나타나지만 거부하고 거절하고 무시 받는 상황도 심지어는 돌을 던지는 상황도 나타납니다. 이 때 돌을 던지는 상황이 나타난다면 복음이 증거되고 있구나 하며 기뻐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돌만 맞는 게 아니라 믿는 사람도 나타나야 됩니다. 모든 사람이 다 돌을 던지면 잘못된 것입니다. 믿는 사람도 일어나면서 한 켠에서는 돌을 던지는 것입니다.
저도 대학 때 거지 전도 여행을 갔었는데 시골에 가서 전도를 하는데 감자만 캐다 온 적도 있고 전도한 집에서 밥도 얻어 먹고 잠자리도 얻어 자기도 하며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많이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믿는 게 아닙니다. 어느 집에 가면 부정하다고 물을 뿌리기도 하고 소금을 뿌리기도 하고 어느 고을에서는 큰 불상이 그 마을을 지배하는 것을 보기도 했습니다. 반대가 일어나고 돌을 던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 일어나는 특징인 것입니다. 우리는 죽어서 마지막 순간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들어가나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이 믿음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은 아닙니다. 오직 그 은혜로 인하여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믿음이 조건이 아니라 오직 은혜로 입니다.
우리는 그냥 하나님 나라에 죽어서 들어간다고만 생각하는데 독특한 표현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들어감과 동시에 임하는 것입니다. 유명한 신학자 C.S Lewis의 저서 The Great Divorce에서 지옥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스스로 선택하며 살아온 삶의 결과이며 스스로 만든 현실이다 라고 합니다. 이 말은 가만히 있으면 지옥은 그냥 내게로 임한다는 것입니다. 지옥의 문은 안에서 잠긴다라고 루이스는 표현합니다. 이것은 내가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임한 지옥의 문을 내가 안에서 잠근다는 뜻입니다. 자기 선택과 집착, 스스로 그곳에 머무는 것, 지옥은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소설에서 주인공이 지옥에 갔는데 아무도 못만납니다. 지옥은 단절된 곳이고 혼자 있는 곳이고 끊어진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혼하고 끊어내고 혼자 있으면 안 됩니다. 천국은 도착하는 곳이라기 보다 하나님과의 일치로 인해 인간이 점점 더 실제에 참여하는 과정이라고 루이스는 표현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나중에 가야 할 실존하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지금 이 삶에 하나님의 나라가 내게 임하는 것입니다. 그 임한다는 것은 오늘 주신 말씀에 내가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에 내가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가 내 속에 확장되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에 내가 참여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옵시며'라고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내가 들어가는 것과 동시에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내 삶에 통치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내 삶 가운데, 중심에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 가는 것이 내가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가 내 삶에 들어올 때 강하게 거부하고 반발하는 게 있습니다. 한 나라가 한 나라에 들어갈 때 크게 반발이 일어납니다. 문명이 충돌할 때는 늘 반발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내게 임할 때 내가 세운 나라가 반발하는 것입니다. 내가 세운 나라는 내 자아, 내 욕심입니다. 하나가 무너져야 하나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이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세워놓았던 기득권의 핵심이 욕심입니다. 모든 합리적인 것과 이성적인 것 가운데 중심에는 욕심과 돈이 있습니다. 그러니 이것이 무너지는 것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내가 여기서 기득권을 누리고 편의를 누리니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에 강하게 반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담임목사님으로부터 우리가 늘 들었던 말씀이 바로 육이 무너져야 영이 세워지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육이 무너지는 과정이 고난이고 회개입니다. 육이 무너지면 영만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영이 세워지고 나면 하나님께서 육도 부활시켜주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전파될 때 충돌하고 돌로 치는 현상은 당연히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세운 나라가 무너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고난입니다. 그러니 극심한 반대가 일어나면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고 있구나, 내가 들어가고 있구나, 내 삶 가운데 임하고 있구나 하며 기뻐하십시요. 그런데 이런 충돌이나 반대 없이 화기애애한 집을 보면 보통 복음을 전하지 않고 술 한잔 하고 주식 얘기하고 금 얘기, 학교 얘기합니다. 그러면 복음 얘기를 안 하니까 반대가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박해를 받으신 모든 분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함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돌로 침을 받았다는 것은 이 나라가 확장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복음을 전했는데 돌로 쳐?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19-20절에 사도 바울이 돌에 맞았을 때 어떻게 반응했는지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돌로 침을 받았는데 그냥 일어났다고 합니다. 툭툭 털고... 그보다 더 놀라운 표현은 일어나서 다시 그 성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쫓겨나신 분들, 이혼하신 분들 다시 들어가셔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돌로 친 그 현장으로 다시 들어갔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말과 눈빛과 나를 찌르는 말들과 지적으로 심지어는 폭행과 이해할 수 없는 상황으로 내가 뭘 잘못했어? 하는데 돌이 날라오는데 그 곳으로 다시 들어갑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불과 몇 년 전에 이 돌로 스데반을 치던 사람이 자기였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을 돌로 치던 사람들 옆에서 옷을 지키며 합당하다, 죽어마땅하다 여기며 동참한 것입니다. 스데반을 돌로 친 것 뿐만 아니라 대제사장의 공문을 받아서 살기 등등해서 믿는 사람들을 잡아서 끌고 갔습니다. 여기에 사람들이 죽을 줄 알고 바울을 끌고 갔다고 하는데 사도 바울도 예전에 그리스도인들을 잡아서 질질 끌고 감옥에 보낸 것입니다. 심지어는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내가 살해자요 박해자요 반대자임을 알기 때문에, 내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 알기 때문에 지금 내가 당하는 이 고난 보다 내 죄가 더 큼을 알기에 툭툭 털고 일어나 복음을 위해 다시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평화를 위해 남편을 위해 가정을 위해서가 아니라 복음을 위해서 하나님이 내게 주신 자리임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을 알기 때문에 툭툭 털고 일어나며 그 돌을 던지는 사람에게 나도 너희처럼 그렇게 돌을 던지는 사람이었다 나도 죽이는 사람이었다고 하며 다시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집사님이 남편의 사업이 완전히 망하고 그 많던 돈도 싹 다 날리고 좋았던 집을 팔고 허름한 곳으로 이사갈 때 너무 힘들었다고 합니다. 이 집사님의 남편이 돈이 많을 때 바람을 너무 많이 피웠답니다. 그래서 이 집사님의 기도제목이 사업이 망해서라도 남편의 바람이 끊어지게 해달라는 것이었는데 응답해주셨습니다. 그런데 망했어도 계속 바람을 피우는 것입니다. 춤을 추면 돈이 없어도 바람을 피울 수 있다고 합니다. 남편 고난으로 처음으로 아내집사님이 우리들 교회에 오게 되었고 말씀을 듣다보니까 자기가 오히려 남편을 향해 돌을 던진 사람인 것이 깨달아졌습니다. 그리고 많은 간증을 듣다보니까 수많은 남자 집사님들이 그렇게 사업이 망하고 돈이 사라질 때 죽고 싶었고 자살 시도를 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남편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해가 되니까 정말 죽지 않고 자리를 지켜준 남편이 고맙게 느껴지고 남편이 화를 내도 귀엽게 느껴진다고 합니다.
내 죄가 보이는 만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겁니다. 내 죄가 깨달아지는 만큼 하나님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툭툭 털며 일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스데반을 죽이려고 둘러선 한 사람, 그 한 사람 그중에 내가 한 명이었다며... 그런데 스데반을 죽이려고 둘러선 그 한 사람이 스데반이 당한 그 환난을 통하여 사도 바울이 된 것입니다. 내가 지금 돌을 맞는 그 현장에서 그 돌을 맞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복음이 증거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 나를 둘러싼 한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돌에 맞아 끌려나가는데 제자들이 둘러섰다고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둘러선 사람 중 한 명이 디모데 입니다. 디모데는 사도 바울이 믿음으로 낳은 아들이고 사도 바울이 2차 전도 여행 때 다시 루스드라를 지나가는데 디모데를 불러 같이 들어갑니다. 그리고 평생 바울의 사역과 함께하고 이후에 사도 바울의 사역을 이어갑니다. 내가 돌로 맞는 그 현장,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은 그 현장에 그 한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나를 둘러싼 사람들 중에 한 명이 있다는 겁니다. 내가 돌을 맞는다는 것은 누군가 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들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그냥 태어나지 않습니다. 그냥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시 중 하나를 소개합니다.
대추 한 알 (장석주)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린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이 들어서서 둥글게 만드는 것일 게다
대추 나무야
너는 세상과 통하였구나
우리 안에 태풍 몇 개, 천둥 몇 개 그리고 벼락 몇 개가 있으니까 한 사람이 빚어지고 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도 태풍 몇 개, 천둥 몇 개, 벼락 몇 개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입니다.
어떤 집사님이 바람 피우고 집을 나간지 오래 되었는데 시댁에 복음 전하러 간다며 너무 두려워하는데 그 옆에 딸이 있습니다. 이 복음을 전했는데 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가 나를 둘러싼 한 사람에게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에게 둘러선 제자들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내가 들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누가 있습니까? 내 주변에는 아무도 없어 하지만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고 우리 주님께서 그 옆에 벌떡 일어서서 보고 계신 것입니다.
(사도행전7:55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적용 질문
- 추석 때 돌을 맞고 돌아오셨나요? 화기애애했나요? 다시는 안간다 하나요? 툭툭 털고 바울처럼 다시 들어가나요?
- 내 옆에 가족들은 나를 보며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나요? 돈과 학벌과 세상 성공을 사모하나요?
2. 돌아가야 합니다.
21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더베까지 이른 바울과 바나바가 여기서 온 길을 되돌아 갑니다. 루스드라에서 돌을 맞고 1차 선교 종착지인 더베까지 갔다가 옆의 다소를 지나 수리아 안디옥으로 돌아갈 수 있었는데 돌로 쳐서 바울을 죽이려고 했던 루스드라로 돌아갑니다. 또 루스드라에서 이고니온으로, 이고니온에서 안디옥으로... 이고니온과 안디옥에도 바울을 적대시하여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가득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 곳으로 돌아갑니다.
그 힘든 곳으로 우리는 돌아가기 싫어합니다. 저도 명절이면 고향에 갔는데 고향에 가면 공기부터 다릅니다. 아버지가 난동 부리고 행패를 부리던 기억이 있는 고향의 냄새와 그 공기부터가 싫었습니다. 그래서 늘 돌아가지 않고 밖으로 해외로 떠돌았습니다. 어머니가 떠나고 아버지 혼자 집에 계시다가 아내가 떠나고 가족도 찾지 않고 실직에 노숙자처럼 되어버린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너무 싫어서 칼로 자신의 코를 잘라버렸습니다. 급히 응급실에 가서 꿰맸지만 상처가 깊이 남아있습니다. 그것을 보며 얼마나 속이 상했는지 증오하면서도 복잡한 감정으로 너무 싫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돌로 쳤다 한 줄로 나오지만 돌로 쳤다는 것은 진짜 죽이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진짜 돌로 쳐서 그 사람을 완전히 죽여버리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돌아가고 싶었겠습니까? 안 돌아가죠, 뭐하러 돌아갑니까. 그런데 왜 돌아갑니까?
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오직 복음에 이끌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고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그렇게 믿음을 굳게 하려고 돌아갔는데 여기에 중요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이것을 이야기하기 위해 돌아간 것입니다. 무엇이냐면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이것을 말하기 위해 돌아간 것입니다. 왜냐면 사도 바울이 겪었잖아요. 그 안에 태풍 몇 개 폭풍 몇 개 벼락 몇 개가 있기 때문에 이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많은 환난을 겪어야 너희가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돌아간 것입니다. 많은 환난을 겪는 것이 마음을 굳게하고 믿음에 머물수 있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다 라는 것으로 착각할 수 있습니다. 많은 환나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처럼 들릴 수 있는데 '들어가다'를 원어로 살펴보면 들어가려면이 아니라 이 시제가 아오리스트 시제(무정시제)로 어떤 현재, 과거, 미래 한 시점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과거부터 미래까지 쭉 나열된 기간을 하나의 상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과거든 미래든 발생했다는 특징을 가지면 이 시제를 씁니다. 즉 들어간다는 것은 이미 들어갔다, 들어간다, 들어갈 것이다, 반드시 들어갈 것이다 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미 하나님 나라가 임한 사람들에게는 환난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발생했습니다. 정해졌습니다. 하나님이 택했다는 것입니다. 내 안에 천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벼락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이미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환난, 고난이 온다는 것입니다. 이 고난은 내가 누구인지를 가르쳐줍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 정체성이 어디에 있고 내가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 환난이 오고 내 모든 것이 사라질 때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내 정체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이 환난을 말하기 위해 돌아갔다고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사람, 시작된 사람, 택한 사람, 이미 우리는 많은 환난을 겪어 왔는데 어떻게 다시 돌아갑니까? 환난은 한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무너뜨리기도 하고 단절시키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 삶을 쭉 돌아보다보면 단절된 시간들이 있습니다. 내가 그냥 덮어두고 생각하지 않은 순간들이 있습니다. 거기로 돌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덮어둔 그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그 내 상처와 덮어두었던 것을 직면해야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억을 통해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직면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우리에게 발동하는 것이 방어기제입니다. 저도 아버지와 어머니가 전쟁을 치룰 때 이것을 직면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그냥 덮어버리고 쳐다보지 않았습니다. 방어기제가 바로 회피인 것입니다. 그리고 또 유머가 방어기제였습니다. 저는 직면하기 힘든 순간이 오면 웃깁니다. 웃기고 싶어서가 아니라 공황이 오니까 이성이 작동하지 못하고 실없는 소리를 막 하는 겁니다. 조커라는 영화에서 주인공 조커가 'Why so serious?' 라고 하며 웃기잖아요. 정말 우리는 내가 덮어둔 그것을 직면해서 그 가운데 있는 나를 지금의 내가 껴안아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의 말씀으로... 이것이 아오리스트 시제입니다. 거기에 있던 나를 지금의 말씀으로 해석 받은 내가 가서 껴안아줄 때 비어있던 그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해버리는 것입니다. 그 안에 있던 그(나)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해석이고 약재료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미워하면 자녀는 부모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미워하게 됩니다. 우리의 비어 있던 그 시간들로 바울처럼 돌아가야 됩니다.
제가 제일 돌아가기 싫었던 시절이 고등학교 시절입니다. 직면할 수 없어서 비어 기억하지 못한 순간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가는 비결은 20년 사역 기간 동안 한 번도 하지 않았던 고등부 사역을 한 것이었습니다.
23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 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
바울이 돌아가서 한 일은 장로들을 세운 것입니다. 장로는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 말씀을 전하는 사람, 말씀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돌아가서 환난이 있을 거라하면서 세웠는데 이것이 교사를 세운 것입니다. 제가 고등부 사역을 하면서 직면하기 싫었던 고등부 시절을 직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온 것입니다. 심방을 가서 아이들과 대화하다보니 저와 비슷한 시절을 겪는 아이들이 너무 많더라고요. 그 아이들을 바라보고 그 아이들이 입으로 자기 아픔을 고백하고 저도 비어있던 그 아픔을 드러내고 고백하니까 직면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직면한 것이 말씀으로 해석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돌아갈까 하는 분들은 제일 힘들었던 시절의 교사로 섬기시면 됩니다.
아내가 9년 째 소년부 교사로 섬기고 있는데 아내는 소년부 시절이 제일 힘들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초등학생 시절에 경찰들이 신발을 신고 집에 들어와 아버지 머리채를 잡고 경찰서로 끌고가는 것을 보게되어 너무 충격이고 트라우마가 되었는데 다음 날 학교에 가니까 모든 아이들이 범죄자 딸이라고 아내에게 손가락질 해서 내내 책상에 엎드려 있었고 그 다음날 어머니께서 강제 전학을 시켰다고 합니다. 얼마나 큰 상처였는지 그래서 아내에게 9년 전에 목장에서 소년부 교사하라고 제가 얘기했습니다. 반발했지만 목장 지체들이 다함께 권면해주니 하게되었습니다. 아내가 소년부 아이들의 나눔을 통해 자기의 비어있던 부분들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된 것입니다. 치유가 임하는 것입니다. 흘러간 것이 아니고 덮어둔 것이 아니고 내 속에 잠들어 있기 때문에 돌아가면 그 모든 약재료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믿음이 굳건해지는 것입니다.
적용 질문
- 나의 가장 어두운 시절은 언제인가요? 회피하고 덮어두었던 깊은 상처는 무엇입니까?
- 이 모든 사건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자에게 주신 사건임이 인정되시나요?
- 내가 돌아갈 곳은 어디입니까?
3. 보고할 교회가 있습니다.
26 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 곳은 두 사도가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27 그들이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하고
28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
다시 온 길을 되돌아 갑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이제는 버가(마가요한이 돌아간 곳)에서 말씀을 전하니 많은 사람들이 믿게 되었다고 하고 버가에서 잇달리아로 그리고 잇달리아에서 배를 타고 수리아 안디옥으로 갑니다. 선교 여행을 출발한 곳은 수리아 안디옥인데 이 수리아 안디옥은
13: 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다른 사람은 죽 열거하는데 사울은 및 사울이라 합니다. 안디옥 교회의 바나바는 굉장한 모범생이고 착한 사람이요 성령이 충만하여 많은 사람들을 주께로 인도했던, 그리고 자신의 재산을 팔아 교회에 헌금했던, 모든 사람에게 칭찬 받던 자였고 니게르라 하는 시몬이 있는데 그는 흑인이었는데 유대식 이름으로 개종했는데 구레네 시몬으로 추정합니다. 구레니 사람 루기오는 라틴식 이름으로 피부색이 다른 다양한 사람이 섞여 있음을 알수 있고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은 왕족, 권력자였습니다. 그리고 및 사울이라 합니다. 왜입니까? 살인자요, 박해자요, 그리스도인들을 핍밥했던 손가락질 받아 마땅한 죄인입니다.
우리 목장이 마치 안디옥 교회의 사람들과 같습니다. 바나바 같은 사람, 시커먼 사람, 이름이 특이한 사람, 그리고 권력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및 사울도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도착해서 사도 바울이 한 일이
27 그들이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하고
힘들어서 마가요한도 떠나버린 1차 선교 여행을 바울과 바나바가 했습니다. 그럼 보고할 때 내가 이렇게 했습니다 라고 할텐데 바울은 하나님이 행하신 모든 일이라고 보고합니다. 자기 이름을 싹 뺍니다. 그 하나님이 행하신 일은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이라고 합니다. 목숨까지 내어놓은 수고, 영광스런 모든 일을 하나님이 하셨다고 보고하는 것입니다. 내 삶에 일어난 수많은 일들, 긴 여정 가운데 내 삶에 일어났던 수많은 일들, 벼락 몇 개, 천둥 몇 개 모든 수많은 일들이 이방인인 내 삶에 문을 여시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복음 밖에 있었던 내 삶에 하나님이 나의 문을 여시고 허락하신 사건이라고 합니다. 내 나라가 망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져야 하기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평생 보고해야 합니다. 이 보고가 간증입니다. 하나님이 내 삶에 이 일을 행하셨습니다. 내가 덮어두고 수치로 여기는 그 일까지 이 이방인인 나의 문을 여시고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어떤 순간도 우연은 없습니다. 때를 따라 하나님이 아름답게 하십니다.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정확한 하나님의 작정 속에 하나님이 나를 만들어가기 위해서 벼락 몇 개를 허락하시고 태풍 몇 개를 허락하시고 천둥 몇 개를 허락하셔서 이 모든 시간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닿아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할 일은 이 시간으로 돌아가 회개해야 합니다. 돌이켜야 되는 것입니다. 비어있던 그 모든 시간들이 하나님께로 향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보고함을 통해 다른 사람의 믿음의 문도 열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보고의 상급이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이 보고했을 때 어떤 상급이 있었나요? 하나님 한 분 이십니당. 우리는 이 상급을 받을 것이고 받았습니다. 이것이 무정시제입니다. 이미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그 은혜에 감격해서, 들어가면이 아니라 이미 들어갔고 들어갈 것이고 반드시 들어갈 것이기에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에게 임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확장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 뿐만 아니라 내 옆의 이방인인 내 가족 또한 이곳으로 들어가야 됩니다. 하나님이 여실 것입니다. 그러기위해 천국이 임한 우리들, 천국으로 들어갈 우리들, 반드시 하나님 나라에 다시 들어갈 우리들을 긴 방학을 끝내시고 안디옥같은 목장에 모여서 추석에 일어난 모든 일들, 내 삶에 일어난 모든 일들을, 선교 여행을 보고해야 되는 것입니다.
적용 질문
- 열리지 않는 이방의 문은 누구인가요? 보고하며 보고받을 목장이 있나요? 그 목장으로 긴 방학을 마치고 나아가고 있나요?
- 아직도 간증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내가 보고할 때 하나님께서 그 문을 여실 것을 믿으시나요?
하나님 나라는 내가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임했고 반드시 들어가기로 하나님께서 결정하셨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돌에 맞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한 사람을 준비시켜갑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둘러싼 제자들이 있습니다. 아픔과 실패의 순간으로 우리는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내가 덮어두었고 외면했던 그 시간으로 다시 돌아가 그 곳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게 해야 합니다. 이 모든 일어난 일들이 주께서 하신 일들입니다. 이방인인 나에게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문을 여신 일입니다. 천국 시민들에게는 이것을 보고할 교회 공동체를 허락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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