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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교회_김양재목사님/주일설교녹취기록

증인(김성우 목사님)

by relife_es 2025. 9. 16.

사도행전 5:27-32
27   그들을 끌어다가 공회 앞에 세우니 대제사장이 물어 
28   이르되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가르침을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 
29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30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31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32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지난 주에 일어설 수 없었던 한 사람을 묵상했습니다. 그 사람이 여전히 앉아있었던 것이 아니라 일어섰습니다. 어떻게 일어섰나요? 베드로와 요한이 함께 더불어 주목하고 바라보며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말만 한 것이 아니라 오른손을 뻗어 잡아 일으켰습니다. 이 일어난 사람이 들로 산으로 떠나지 않고 베드로와 요한 사도들 곁에 서서 증인이 됩니다. 어떤 집사님께서 지난 주 설교를 듣고 '목사님, 저는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요. 목장에서도 어느 누구도... 우리들교회에서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요? 저는 교회를 떠나고 싶어요. 목사님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하고 제게 물었습니다. 한 번 생각해보았습니다. 내가 교회를 떠났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물론 우리가 교회에서 양육을 잘 받고 또 가야 할 곳에 있다면 가야 합니다. 우리가 사명이 있으면 가야 합니다. 그런데 제가 만약 치리 받고 억울해서 뛰쳐나갔다면 아마 평생 아버지와 원수로 살았을 것 같습니다. 저는 아버지를 결코 용서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물론 어머니도 안 찾아 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곳에서 양육을 받으면서 내 죄가 보이고 이것이 해석이 되니까 아버지와 어머니를 교회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함께 예수 그리스도로 일어서서 살아나게 되니까 살아난 사람이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여기서 설교자로 서 있지만 또 한 사람의 증인으로, 예수 공동체의 증인으로 서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올 초에 어떤 목장에 탐방을 갔었는데 한 집사님이 장애인 아들을 홀로 키우고 사업이 쫄딱 망해서 장애인 아들과 쫓겨났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생각해서 일을 하다가 주식 투자를 했는데 망한 것이 아니라 잘되었습니다. 4-5배 정도 잘되어 이 집사님이 주식의 증인이 되셨습니다. 아침마다 보석 상자 말씀, 극동 큐티 방송, 새벽 설교 말씀 올리면서 그 밑에다가 종목을 하나씩 넣었습니다. 그런데 목장 지체들은 다 나이가 들어 주식을 할 줄 몰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꾸준히 종목을 하나씩 올렸는데 그 올린 종목 마다 대박이 난 것입니다. 목장 분들이 아무도 안하니까 이 분이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고 열변을 토하셨는데 탐방 간 그날 목장 지체들과 그날 큐티 말씀으로 예배하면서 대선이 끝나면 절대 주식을 하지않겠다고 적용했습니다. 그래서 주식을 끊었습니다. 우리는 무엇에 증인인가요? 한 번 생각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다이어트, 탈모 같은 곳에 증인이 되기도 합니다. 결국은 내 경험을 얘기하면서 내가 살아난 그곳의 증인이 됩니다. 하지만 정말 무서운 사람은 내가 살아난 경험의 증인된 사람이 제일 무섭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게 진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경험이 다른 사람을 망치는 지름길이 될 수 있습니다. 지난 주 설교에 앉은 뱅이가 일어난 경험으로 '손 잡았더니 일어났어' 이렇게 하나요? 아니죠. 베드로가 정확하게 해석해 줍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고 왜 나를 주목하느냐. 내가 일으킨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으키셨다고 정확하게 해석해 줍니다. 나의 경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이 앉은뱅이가 떠나가지도 않고 성전으로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것이 아무것도 없고 자기 공로는 아무 것도 없고 자기가 한 것은 그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것밖에 없는데 이런 나를 예수님이 먼저 손 내미셔서 살리셨기 때문에 사도 베드로도 성전에서 여전한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됩니다.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모든 일에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1.끌어다가 세운 곳에서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27   그들을 끌어다가 공회 앞에 세우니 대제사장이 물어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사도들과 앉은뱅이가 성전에 들어간 이후에 이 일이 퍼지자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이 시기합니다. 시기심으로 베드로와 요한을 감옥에 가둡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셔서 베드로와 요한을 꺼내시고 성전에 서서 이 일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새벽부터 성전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감옥에서 나온 사도들이 첫번째 한 일은 새벽에 성전에 서서 말씀을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날이 밝았고 대제사장들과 산헤드린 의원들이 찾았는데 감옥에 가보니 없는 것입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그런데 어디서부터 인가 이들이 도망가지 않고 성전에서 말씀을 전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립니다. 그러니 끌어오라고 합니다. 27절은 이 사도들이 한 번 더 끌려와서 다시 그 공회원들 앞, 법정에 선 내용입니다. '그들을 끌어다가'라고 합니다. 그들이 자발적으로 온 것이 아닙니다.

눅22:54 예수를 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 새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예수를 잡아 끌고의 끌고와 27절의 끌고는 같은 단어입니다. 사도행전도 누가복음도 누가가 썼습니다. 그런데 눅22:54의 단어와 본문의 27절에도 베드로가 등장합니다. 누가 복음에서는 예수님이 끌려가고 베드로는 멀찍이 따라갑니다. 멀찍이 따라가며 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앉아 있는데 끌려가는 예수님을 따라가던 베드로에게 불이 비치고 얼굴이 드러나자 종이 베드로를 가리키며 예수님과 같이 있었던 사람아니야?하니 베드로는 부인합니다. 한 번더 물으니 베드로는 절대 아니라고 부인하고 다시 한 번 더 물으니 이제 베드로는 예수님을 저주하며 절대 아니라고 하니 닭이 세 번 웁니다. 멀찍이 따라가던 베드로는 밖으로 나가 심히 통곡합니다. 바로 그 사람들, 예수님을 끌고 갔던 그 동족, 안나스, 가야바, 대제사장 그리고 산헤드린 공회원 그 사람들이 베드로를 다시 끌고 갔습니다. 불과 두 달 전입니다. 예수님이 끌려 갔던 일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일이 불과 두 달 전입니다. 두 달 전에 예수님이 끌려간 똑같은 상황을 베드로가 지금 겪고 있는 것입니다. 두 달 이후에 도망간 베드로가 '끌려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제 부인하지도 도망가지도 않습니다. 그곳에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서게 됩니다. 그런데 이 번이 처음 끌려온 것이 아닙니다. 4장에서도 끌려왔고 놓임을 받았는데 도망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또 끌려왔습니다. 계속 반복해서... 내가 실패해도 하나님께서 똑같은 상황을 반복해서 주시는 것은 이 곳이 나의 사명의 자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는 증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무 십자가가 너무 무거워서 던저버리고 튼튼해 보이는 쇠 십자가를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쇠 십자가를 지면 나무하고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너무 무거워서 또 던저버립니다. 그러면서 이왕 십자가 질 거 예쁜 장미 십자가를 달라고 합니다. 그 십자가를 지면 어떻습니까? 그 가시로 더 큰 고통을 당합니다. 이렇듯 십자가의 고통을 피해서는 안됩니다. 당하더라도 이혼해서는 안됩니다. 그곳이 나의 거룩을 위한 최고의 사명지요 증인으로 서야할 자리인 것입니다. 나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반복되는 환경을 주십니다. 내가 원해서 간 자리가 아니라 원치 않은 그곳이 내가 증인으로 서야 할 자리인 것입니다. 내가 원치 않아 간 자리가 어디인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원치 않아 간 자리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가정입니다. 내가 부모님을 선택해서 태어난 사람이 없습니다. 정말 그런 선택권이 있었다면 저는 부모님을 절대 선택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결론적으로는 지금 저의 부모님이 최고의 부모님이시지만 그 때 당시 선택하라고 했다면 안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끌려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원해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성령에 이끌려 예수님께서 광야로 가셨듯이 성령에 이끌려서, 하나님의 영원한 택함과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안에서 주님의 손에 이끌려 나를 이 가정에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제가 왜 저의 부모님을 선택하지 않고 싶었을까? 아버지는 제가 고등학교 때 감옥에 다녀오신 이후로 평생 무직으로 알콜중독자로 노숙자로 사셨습니다. 그런 아버지의 폭행과 술주정과 그걸 견디다 못한 어머니가 제가 고3 때 집을 나가셨습니다. 지옥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끌려온 자리에서 증인이 됩니다. 실패한 자리, 반복해서 세워진 자리에서 증인이 됩니다. 우리는 다 끌려왔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저주가 아니라 하나님이 고르고 골라서 나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저의 아버지는 아무도 감당 못합니다. 형제들도 버렸습니다. 친척들이 저의 아버지 이름만 얘기하도 욕을 합니다. 전부다 버리는 사람을 고르고 골라서 제게 맡기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나를 신뢰하기 때문에 맡기신 것입니다. 이 힘든 아버지, 이 힘든 어머니, 이 힘든 자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죄인 인 나를 먼저 살려주셨기 때문에 내가 선택하지 않은 그 곳, 떠나고 싶은 그 곳, 두려워서 도망쳤던 그 곳에서 우리는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맡기셨다면 먼저 나를 살려달라고 부르짖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집사님이 지난 주 저의 설교를 듣고 피투성이라도 너무 살 수가 없어서 늘 때리고 술에 취해 지옥을 만드는 남편 때문에 너무 힘든데 이 남편을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아테네조)으로 바라볼 수 있는지, 또 어떤 분은 집에 가면 누워만 있는 남편의 존재 자체가 싫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테네죠, 하나님의 영광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늘 도끼 눈으로 쳐다봤다고 합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김성우 목사님은 아버지를 아테네죠 할 수 있었는가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도대체 김성우 목사님은 무슨 죄가 있어서 그렇게 아버지를 감당하셨냐?" 고... 죄가 많습니다. 그런데  내가 죄인입니다 에서 끝나면 안됩니다. 내가 죄인 인것도 알고 주님이 나를 살려주신 것도 알지만 저 역시 마지막 순간까지도 아버지를 보면 속에서 분노가 올라왔습니다. 얼마전 어머니를 뵐 기회가 있었는데 새아버지가 어디 갈 일이 있으셔서 치매에 걸리신 어머니를 어디까지 태워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갔는데 어머니가 아들이 온다는 말을 듣고 짐을 싸서 아침부터 현관에 쭈그리고 앉아서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런 어머니를 기다리는데 제대로 바라볼 수가 없었습니다. 옆에 모시고 가는데 어머니 어떻게 지내셨어요 하고 말을 거는데 눈에서 눈물이 계속 나왔습니다. 이것이 증오인지, 원망인지, 그리움인지 모르겠지만 어머니의 눈을 제대로 쳐다 볼 수 없었습니다. 연약합니다. 우리는 할 수가 없습니다. 그 날도 저는 너무 가기 싫어 안 간다고 하는데 옆의 아내가 같이 가자고 했습니다. 아버지 뵙는 것도 너무 힘들었고 지금 어머니 뵙는 것도 너무 힘이 듭니다. 그래서 늘 안 간다고 하는데 베드로 옆에 요한이 있었듯이 아내가 같이 가자, 같이 가자고 합니다. 아버지 뵈면 화가 올라와 예배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떠나려 하는데 또 아내가 제 손을 붙잡고 같이 예배 드리자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홀로 두지 않으십니다. 공동체를 주십니다. 그리고 내 손을 붙들어 주십니다. 공동체가 없지 않아요. 내 옆에 한 사람을 주시고 아무도 없는 그 순간에 성령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우리는 혼자 할 수 없습니다. 내가 죄인 인 것도 알고 살아난 것도 알지만 혼자 할 수 없습니다. 안되는 것도 알지만 또 나누고 또 나누고 이 고백을 들어주는 공동체 그리고 내 옆에 한 사람, 한 지체. 그러니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옆의 사람이 나를 도우니까 신결혼해야 합니다. 우리는 옆의 공동체와 함께 내가 원치 않는 그 곳, 내가 끌려서 가게 된 그 곳에서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증인이 되려고 무언가 하지 않아도 됩니다. 도저히 일어설 수 없을 때는 그냥 앉아 계셔도 됩니다. 우리 삶 자체가 증인입니다. 그저 고난의 흔적을 가지고 성전 미문에 앉은 거지가 아무 말도 안하고 그냥 서 있는 것처럼 고난의 흔적을 가진 우리가 그저 살아내기만 해도 존재 자체가 증인입니다. 저의 아버지가 왜 죽지 않고 살아있는지가 오랜 의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죽고 난 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살아계신  것만으로도 증인이셨구나. 우리는 그저 고난의 흔적을 지니기만 해도 존재 자체로 증인입니다. 지금까지 너무 잘 살아오셨습니다.

 

적용 질문

- 나는 무엇에 증인인가요? 주식, 다이어트, 맛집, 여행지, 금테크에 증인인가요?

- 내가 성공한 경험, 실패한 경험은 무엇인가요?

- 원치 않지만 서게 된 곳은 어디인가요? 거기서 예수의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시나요?

 

2. 내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28   이르되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가르침을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 
29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30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끌려가 서게 되니 대제사장이 묻습니다. 존재 자체가 증인이니까 사람들이 계속 묻습니다. 어떻게 가정을 지키셨어요? 어떻게 부모님을, 그 자녀를 섬기셨어요? 어떻게 살아나셨어요? 또 우리는 묻습니다. 어떻게 살 빼셨어요? 어디 피부과 다니세요? 무슨 화장품 쓰세요? 어떻게 부자되셨어요? 어떻게 자녀를 서울대 보냈어요? 질문을 받는다는 것은 내가 증인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물으며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했는데 너희가 가르침을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했다. 이는 너희가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 돌리고자 함이다 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이 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너희 가르침이라고 표현합니다. 예루살렘에 가득하긴 했는데 유일하게 대제사장과 그 앞에 선 사람들에게는 이 복음이 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이 사람, 복음을 너희 가르침이라고 합니다. 대단한 베드로 요한 사도들이 서있고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가 서서 자기 눈 앞에 있는데도, 그리고 베드로의 설교로 하루에 3천명, 5천명 (그 때 당시 예루살렘의 인구가 10만 명이라고 하는데) 여자와 아이들까지 2만 명 정도가 가득하게 되어도 믿지 않습니다. 그러니 너희 가르침, 이 사람 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가득했다는 표현도 완료형으로 가득 찰 것이 아니라 이미 사람들의 마음에, 이 땅에, 이 성읍에 가득찼다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대제사장은 믿지 않습니다. 왜 믿지 않나요? 이들 스스로가 이 진리를 엄금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세상이 다 외쳐도 귀를 막고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금했다는 것입니다. 엄금하다의 의미는 우리가 너희에게 가르치지 말라고 명령을 명령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정어를 두 번이나 써서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는 것입니다. 굉장히 강하게 명령한 강압적인 태도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강압적인 태도가 베드로와 사도들에게만 간 것이 아니라 이 사람들의 강압적인 태도가 자기에게도 향한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 말해서는 안돼, 절대 드러나서는 안돼 하면서 명령하고 또 명령합니다. 왜 이렇게 강하게 명령합니까? 베드로가 바로 이야기 해줍니다. 그들이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를 못박아 죽였기 때문에 강하게 엄금하고 또 엄금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대제사장 가야바와 안나스 가문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이 공회에서 예수님을 두 달 전에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판결을 내렸습니다. 이 판결에 모든 산헤드린 공회원과 사두개인들이 동의 한 것입니다. 그리고 안나스와 가야바를 비롯한 동일한 사람들이 이 자리에 서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베드로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면 이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못 박았다는 것을, 무고한 그 사람을 죽였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온 힘을 다해서 부정하고 또 부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틀렸다는 것은 인정하지 못하기에 금하고 또 금합니다. 명령하고 또 명령합니다. 이것은 인정하는 순간 내가 죄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내와 남편이 싸우다 아내가 다 맞는데 이것을 인정하면 내가 진 것 같으니 괴성을 지르고 나가버리는 것입니다. 인정해야 됩니다. 내가 예수님을 저주 받은 나무에 달아 죽인 것을 인정하기 때문에 엄금하고 또 엄금하는 것입니다. 내 과오와 내 과실과 내 죄를 숨기기 위해서 금하고 또 금합니다. 

저 역시 고등학교 때 아버지가 술해 취해서 온 거리를 다니며 어머니가 바람 피웠다고 어머니에 대해 입에 담기 힘든 상스러운 욕을 하고 고함치는 아버지가 너무 수치스럽고 미웠습니다. 고 3때 기숙사에서 돌아오니 어머니가 안 계시고 아버지가 술 취해 고함치는 소리만 가득한 집에서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을 말하는 순간 그것이 현실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이것을 말하는 순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말하는 순간 마치 내가 죄인이 된 것 같은 기분 때문에... 내가 예수를 매달아 죽인 것 같은 기분 때문에... 제일 친한 친구에게도 교회 선생님에게도 말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말할 한 사람이 없어서 죽고 싶은 것입니다. 금하고 또 금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닌 것처럼, 내 아버지가 술주정뱅이가 아닌 것처럼 저만 인정하지 않는데 아버지가 하고 다니니까 주변에는 다 아는데 말할 수 없었습니다. 말할 수 없으면 가면을 써야합니다. 가면을 쓴 사람들의 특징은 예수의 증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증인으로 살게 됩니다. 이 사람들의 특징은 자기 자랑을 하고 변명을 합니다. 제가 얼마나 변명을 잘하는지 모릅니다. 제 뿌리 깊은 연약함을 인정하지 않으니까 결국은 이 태도가 다른 곳에서 변명하는 것으로 가면을 쓰게 된 것입니다. 우리들교회 처음 왔을 때도 거의 1년 동안 목장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저의 가정과 저의 죄에 대해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목사니까요. 그런데 사실 주차 봉사의 위치에 있으니 말할 필요도 없었고 무시 안 당하려고 더 가면을 쓰게 되었습니다. 무시 안 당하려고 하는 말이 나 공부 잘했다, 나 잘생겼다며 듣기 싫은 말만 하니까 담임 목사님께서 저를 불쌍히 여기셔서 치리해 주셨습니다. 그 입을 다물라고 말 금지 치리를 받았습니다. 저만 금하고 금할 뿐이지 온 예루살렘에 가득하잖아요. 인정해야 합니다. 가면을 벗어야 합니다. 저는 제가 가면을 벗으면 어머니가 저를 떠난 것처럼 사람들이 저를 떠난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뭔가 잘못해서 떠났나? 내가 뭔가 죄를 지어서 떠났나? 관계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뭔가 잘못을 하면 저 사람도 나를 떠날 것 같아서 계속 변명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변명을 하면 더 진절머리가 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나무에 달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대제사장이 살인자가 되기 때문에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해야 할 말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이 한마디인데 이게 안되니까 재판이 반복되고 반복되고 또 싸우고 또 위협하고 전쟁하고 때리고 옥에 가두는 것입니다. 모든 분란은 인정하지 못하는 나 때문입니다. 직면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자기 안의 이기심, 질투, 열등감 같은 어두운 감정을 인정하는 것이 굉장히 고통스럽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이상적인 모습만 보려하고 포장합니다. 그래야 덜 부끄러워 보이고 덜 약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타인의 시선에 따라서 내 가치가 결정된다고 믿습니다. 그렇게 배워왔고 그렇게 교육 받아왔고 집에서도 그렇게 커왔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가치는 타인의 시선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구의 증인인가에 의해 결정되는 것입니다. 남을 만족시키는 태도는 완벽해 보이는 가면을 만들지만 그 속에는 억울함, 피로감, 진짜 내 모습이 보이지 않는 외로움이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관계는 사랑 받기 위해 애쓰는 연기가 아니라 오해 받을 위험이 있더라도 진짜 내가 경험한 것을 드러내고 고백하고 인정하고 증언하는 것입니다.

 

적용 질문

- 어느 누구도 알아선 안 된다며 금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 안전한 공동체에서 내 진짜 모습을 드러내고 있나요? 나무에 달린 십자가가 부끄러워 숨기고 있나요?

- 입에도 꺼내기 싫어서 "이 이름"이라 칭하는 수치는 무엇인가요?

 

3. 회개함과 죄 사함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31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32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베드로와 요한 사도들이 입에도 꺼내기 싫어서 이 이름 이라고 하는 대제사장에게 정확하게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 라고 말합니다. 왜 이렇게 말할까요? 너희가 죄인이라고 시시비비를 가리기 위해서 일까요? 우리는 보통 죄 지은 사람을 정죄합니다. 그 죄를 알려줍니다. 저는 아버지가 술만 마시고 횡포를 부리면 아버지 당신이 한 일이 뭔지 보라고 하면서 가시 박힌 말들을 날렸습니다. 아버지라 부르지도 않고 당신이 이렇게 하니까 아내가 집을 나간 것이 아니냐고 당신 같은 사람과는 나도 살기 싫다면 정말 아버지의 가슴에 못을 박는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저주를 퍼부으면 외친적이 한 두번이 아닙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대제사장에게 지금 할 말 없어? 이런 정도가 아니라 당신이 예수를 나무에 달아 죽였잖아 하고 외칩니다. 그저 정죄감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31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베드로가 이 말을 하는 것은 우리가 정당하고 너희는 틀렸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는 분을 너희가 알아라 나도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고 너도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고 우리 모두 죄인이다. 회개함과 죄 사함은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베드로가 정확하게 압니다.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신다고 합니다. 언제 주십니까? 인정했을 때입니다. 회개는 과거와 완전한 단절입니다. 출애굽 때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는데 다시 돌아가지 않은 것처럼 과거와의 완전한 단절입니다. 내가 세상의 노예로, 애굽의 노예로 살았던 삶과의 완전한 단절. 그런데 이 완전한 단절을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홍해를 갈라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셔야 됩니다.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죄인인 우리의 심령에 하늘의 문을 여시고 성령을 부어주셔야 됩니다. 이게 언제 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내가 죄인 임을 인정할 때 이것을 고백할 때 우리는 과거의 죄에서 완전한 단절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려 죽였다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함까지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이 죄를 끊어냈습니다. 내가 예수님이 살려주신 이 죄로는 다시 안돌아갑니다. 이 회개함까지 우리의 간증이 되어야 하고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예수를 임금과 구주로 삼았다고 합니다. 임금은 심판하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이 돌이키게 해주셨는데 또 그 죄를 반복하면 심판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임금 뿐만이 아니라 구주로 삼으셨습니다. 구주는 이것을 내가 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이 대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예수님이 나에게 구주이십니다. 주님, 나에게 죄 사함과 회개함을 주시옵소서. 예수를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습니다. 내가 할 수 없기에 구해야 됩니다. 이 말을 듣고 제발 살아나라. 대제사장과 그 무리들, 너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지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신다. 제발 살아나라. 세상에 가장 큰 권력을 가진 집단이고 은과 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담대히 외칩니다. 권세와 재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함과 죄 사함을 너희가 받아야 된다. 

회개는 직면하고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내가 죄인 인것이 인정 된다면 인정하는 것에서 그치지 말고 돌이켜서 내 행위를 바르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내 죄를 끊어내고 바르게 해야 됩니다. 내가 주님을 못 박은 죄인 임이 인정되고 주님이 슬퍼할 만한 행위를 돌이킨다면 오늘 베드로는 이스라엘 최고의 사람들 앞에서 죄 사함이 있을 거라고 선포합니다. 너희들이 바라보는 성전에서 매일 소를 잡고 양을 잡으면서 죄 사함이 이루어지는데 그것이 아니다. 오늘 이 자리에 앉은 우리에게도 베드로는 선포합니다. 인정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구하여 온전히 주님께 돌이킬 때 온전한 죄 사함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고 구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32절) 내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나의 추악한 과거 뿐만 아니라 이런 죄를 용서함 받은 일에도, 그리고 용서함 받아서 그 사랑에 감격해서 죄를 완전히 끊어내고 돌이키는 일에도 증인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에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증인은 '마루투스'라고 합니다. '순교자'라는 뜻입니다. 이 시대의 순교는 혈기를 죽이는 것입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내 생각을 죽이고 내 혈기를 죽이는 것이 바로 증인 입니다. 내가 끌려간 그 곳에서 증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혼자가 아니고 공동체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마무리 합니다.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32절)

내가 이 말씀에 순종해서 내가 이 죄를 끊어내고 이것을 고백할 때 하나님이 나의 수치를 가려주시고 나의 증인이 되어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을 부으셔서 나의 증인이 되어주십니다. 어떻게 증거해 주십니까? 이는 죄인이 아니고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라고 증언해 주십니다. 여러분들이 순종하여 증언할 때 성령께서 여러분들을 증언하여 힘 주시고 높여 주실 것입니다.

 

적용 질문

- 회개함과 죄 사함의 증인이 되고 있나요?

- 내가 결코 돌아가지 말아야 할 죄는 무엇인가요?

- 또 넘어졌다면 다시 고백하여 순종할 때 성령께서 도우시는 것을 믿으시나요?

 

오늘 베드로는 대제사장에게 마지막 판결을 내린 게 아닙니다. 이들도 돌이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외치고 또 외치며 오늘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는 이유도 돌이키라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살아나고 살아난 사람은 증인이 됩니다.

 

공동체 고백

한 장로님이 평생 자기 죄를 숨겼다고 합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았고 완벽한 범죄였는데 자신이 원치 않았던 환경 바로 자신의 자랑이었던 가장 사랑했던 아들이 연상의 여자와 그것도 결혼에 실패한 여자와 결혼을 하려는 사건 앞에서 자신이 원치 않았던 환경, 끌려간 그 환경을 마주치며 바로 들어 올 예비 며느리가 나보다 옳도다 고백을 했다고 합니다. 이 사건 앞에서 이것을 고백하고 공동체 앞에서 과거 유부녀와 두 번 바람 핀 사건을 오픈하고 공개 치리를 받으셨습니다.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주홍 글씨를 달아서 죄 사함과 회개함, 다시는 그 죄를 반복하지 않는 회개함의 자리까지 간증하시며 증인이 되셨습니다. 과거에 너무 수치스럽고 힘든 그것에 용서함, 평생 죄인으로 다시는 반복하지 않도록 이 죄를 끊어내겠다 하며 증인이 되신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바람 핀 분들에게 간증하며 아내가 바람 핀 남자에게 가서 눈물로 사과하고 많은 사람을 살리며 사명 감당하고 있습니다. 이 분 존재 자체가 증인인 것입니다. 오늘 하루 내게 주신 말씀에 순종하셔야 합니다. 그럴 때 성령께서도 나를 증거해 주십니다. 우리가 마지막 날 아버지 앞에 섰을 때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주님! 저 자는 당신의 아들입니다. 딸입니다. 증거해 주실 줄 믿습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의 흔적, 삶, 우리의 눈물, 간증, 우리의 상처, 우리의 고백, 우리의 존재 자체가 증인입니다. 살아내셔야 됩니다. 끌려가 세움 당한 그 곳에서 살아내셔야 됩니다. 내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라는 자리까지 가셔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나를 예수 십자가로 어떻게 용서하시고 회개케 하셨는지 증거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고아로 홀로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베드로를 통해서 앉은 뱅이를 일으켰던 그 성령의 능력이 오늘 나와 함께 나를 증거해 주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고아처럼 홀로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