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8장 1b-8절
1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2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3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4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5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6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7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
8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그 날은 스데반이 순교한 날입니다. 죽음의 날이며 슬픔의 날이며 비통의 날입니다. 그런데 조금 스데반의 죽음에 대해 성경은 조금 독특한 표현을 쓰고 있는데 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합니다. 잔다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자니라'의 뜻은 말 그대로 깊은 수면에 빠지다는 뜻입니다. 헬라어에는 죽음이라는 단어가 여러개 이있고 성경 곳곳에 죽음을 표현할 때 그 단어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의 죽음은 죽음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잔다 라고 왜 표현했을까요? 창세기 47:30에 야곱의 죽음을 누워 잠들었다고 표현합니다. 신명기31:16에 모세의 죽음도 잠들었다고 표현합니다. 누가복음 8:52에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 아이가 잔다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도 나사로의 죽음을 예수님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다고 하십니다. 사도행전 13장에는 다윗의 죽음도 잠들었다고 말합니다. 성경 곳곳에서는 성도의 죽음을 잠으로 표현합니다. 왜그렇습니까? 자는 사람은 깨어나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부활이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부활입니다. 잠든 사람은 일어납니다. 마지막 날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뜨게하실 것입니다. 일어나 눈을 뜨며 활짝 웃으면 우리는 다시 만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도의 죽음을 잔다고 표현합니다.
최근에 탐방을 다녀온 목장에서 한 부목자님이 자신의 장남이 죽는 사건으로 너무 실의에 빠져서 어차피 기도해도 하나님 뜻대로 하실텐데 기도할 필요가 있나? 하며 8년 동안 우울의 자리에 앉아있었다고 합니다. 부목자님이 나누는데 그 아이가 마지막에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엄마, 아빠 천국에서 만나요." 다시 만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있는 이유는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명이 끝나고 보고픈 얼굴들을 반드시 다시 만날 것입니다. 그래서 1절의 그 날은 스데반이 죽은 날, 비통한 날, 슬픔의 날이 아니라 부활이 임한 날입니다. 다시 만날 날을 꿈꾸는 날이고 생명이 임한 날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는 믿는 자마다 생명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삶에 그 날, 부활의 날이 임하려면
1. 큰 박해가 있습니다.
1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사도들에게 예루살렘은 앞으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갈 인생여정의 출발점일 뿐 종착역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가야할 아득히 먼 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지금 그냥 예루살렘에 있고 떠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설교 한 번 하면 한 번에 삼천 명, 오천 명이 돌아오니 떠날 생각을 안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제사장 무리까지 복음에 굴복하는 예루살렘의 성공에 안주하고 말았습니다. 생각해 봅시다. 주님의 마지막 유언은 사도행전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예루살렘에 머물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루살렘과 유대, 사마리아, 땅 끝까지 가야된다고 하시는데 지금 이들은 예루살렘에 머물러 앉아있습니다. 이것이 스데반의 순교를 기점으로 예루살렘에 대 박해가 시작된 이유입니다. 예루살렘을 떠날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는 사도들로 하여금 예루살렘을 넘어서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박해'는 사도행전에서 이곳에 처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박해 앞에 '큰' 이라는 단어가 함께 쓰입니다. '크다'는 메가스에서 유래된 영어 단어가 백만 배를 뜻하는 '메가'입니다. 옛날 성경에는 큰 박해를 큰 핍박 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감당하지 못하는 상상하기 힘든 박해, 핍박이 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박해로 머물러 있던 그들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지상 명령이 다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에만 머물렀던 그 날, 그날에 부활, 생명이 예루살렘을 넘어서서 유대와 사마리아 땅으로 흩어지기 시작합니다. 흩어지다로 번역된 헬라어는 디아스페이로 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로부터 흩어진 사람을 뜻하는 디아스포라가 파생되었습니다. 본래 디아스페이로는 농부가 씨앗을 사방으로 흩어 뿌리는 행동을 표현한 동사입니다. 예루살렘은 씨를 한 곳에 두는 것이 아니라 농부가 흩어 뿌렸습니다. 흩어 뿌리는 동작의 주체가 농부로 표현되었을 때는 능동적이지만 씨앗의 입장에서는 수동적인 것입니다. 흩어 뿌려짐을 당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씨가 어디로 뿌려질지는 씨가 아니라 농부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다 흩어지니라'는 이 사람들이 능동적으로 흩어진 것이 아니라 헬라어 원문에는 수동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그들이 흩어졌음을 밝히기 위한 것입니다. 큰 박해로 인해 나에게만 머물러 있던 지경이 이제 다른 사람에게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내 삶, 내 가족, 내 식구, 나에게만 관심있었던 사람이 이제는 예루살렘 밖으로, 심지어는 구원도 내 구원, 회개도 내 회개, 다른 사람이 어떤 상처를 받았는지 상관도 없이 나만 회개 받으면 돼 하고 살았던 삶에서 박해로 인해서 다른 사람의 구원, 다른 사람의 회개, 스데반의 그 날에 흩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박해로 자신 밖에 몰랐던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생기니 날마다 해 줄 말이 샘솟듯이 솟아납니다. 해 줄 말이 많다는 것은 박해를 잘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박해로 내 자아가 무너지니 무너진 만큼 하나님께서 내 영을 세우십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죄성이 있습니다. 뼈속까지 죄인인 우리 죄성의 본체가 바로 자기중심성입니다. 나로인해서 세계가 형성된다고 생각합니다. 담임목사님 저서 '하나님 속이 시원하시겠습니다'를 읽어보면 자기중심성은 내가 정말 중요한 존재인가? 하는 불안에서 비롯된 병적인 자기 집착을 말한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은 늘 자기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자신이 중심 인물이 되어야 합니다. 일종의 심한 자의식으로 내가 소중한 존재야 라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내가 정말로 중요한 존재가 되어야 되는데 이것이 좌절된 데서 오는 절박한 반응이 자기중심성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뼈속까지 자기중심적이 이런 나를, 이런 사도들을 깨뜨려 버리십니다. 예루살렘을 깨뜨려 버리십니다. 이것이 깨어져야 생명이 퍼져나가기 때문입니다. 말씀 앞에 내가 죽는 것이 부활입니다. 내가 죽어져야 부활이 임합니다. 큰 박해로 죽을 수 없고 죽기 싫다고 하는 내 자아가 깨뜨려져야 우리는 타자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사명입니다. 그런데 깨뜨림에는 항상 아픔이 옵니다. 깨뜨림은 아픔입니다. 그러나 새는 알을 깨고 나와야 진정한 세계를 볼 수 있습니다. 깨뜨림은 아픔이요 슬픔입니다. 알은 곧 세계입니다. 나만의 세계가 깨어져야 부활의 생명이 퍼져나갈 수 있습니다. 알을 깨뜨리면 또 다른 세계를 맞이하듯 개인과 교회의 큰 박해 뒤에는 하나님께서 새로운 국면을 허락하십니다. 깨어지지 않기 위해서 내 힘으로 꽉 붙들고 있으니까 박해가 길어집니다. 잘 당하고 목장으로 잘 흩어져야 합니다. 집에서 직장에서 잘 당한 사람이 목장으로 흩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디아스포라입니다. 당한 것이 없는 사람은 늘 집에만, 예루살렘에만, 나만의 알 속에 있는 세계를 완성하려고만 합니다. 그러나 깨어져야 합니다. 사도행전 11장에 보면 스데반의 박해로 이 사람들이 아프리카와 유럽, 안디옥까지 흩어졌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안디옥이 어떤 곳입니까? 예루살렘 교회와 더불어 사도바울과 사도들의 선교 중심지가 된 곳입니다. 최고의 선교 중심지였습니다. 내가 받는 박해로 내가 흩어지니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세우십니다. 흩어진 나로 인해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집니다. 서론에 말씀 드렸던 그 집사님은 감당할 수 없는 박해로 인해 사명이 생긴 것입니다. 이 집사님이 자신의 너무 슬픈 아픔으로 자녀가 먼저 떠난 아픈 가정을 찾아가서 내 첫째 아들도 그러했습니다 라고 얘기해 줍니다. 이 말 한마디만 하면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저도 알콜중독 아버지, 폭력, 폭언 속에 자란 아이들을 보면 남 일 같지 않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마음이 갑니다. 어머니가 바람 나 집 나간 아이들을 보면 제 속에 말할 수 없는 아픔과 슬픔이 올라옵니다. 나도 그랬다. 이것이 바로 나에게서 너에게로 지경이 넓혀지는 순간입니다. 예수의 복음이 내 안에서 알을 깨고 너에게로 전달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흩어지다'입니다. 마지막 그 날에 예수님께서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명을 가지고 흩어져야 합니다. 고난이 축복입니다.
적용 질문
- 내가 당한 '큰 박해'는 무엇입니까? 그 박해로 흩어져 내 지경이 넓어졌나요?
- 큰 박해로 그저 예루살렘에 숨어 지내고 있지는 않나요?
- 깨어져야 할 자기중심성은 무엇입니까?
저도 자기중심성이 굉장히 강한 사람인데 담임목사님으로부터 늘 '너는 나르시시즘이 강하다'는 말을 들었는데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생각해 보니 늘 내가 중심이 되어야 하고 주인공이 되어야 하고 그게 좌절되니까 회피해서 도망갔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조금씩 깨어진 것은 큰 박해인 치리를 4번이나 받았기 때문입니다.
2. 큰 울음이 있습니다.
2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죽음이 아닌 부활, 생명이 임한 그 날, 똑같이 큰 울음이 있다고 합니다. 큰 박해 뒤에 큰 울음이 따릅니다. 동일하게 '크게'로 번역된 헬라어 역시 1절에 사용된 '메가스'입니다. 우리 말에 '울다'로 번역된 헬라어 코페토스는 가슴을 치는 동작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스데반의 죽음을 보고 가슴을 치면서 통곡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 당시 산헤드린 공회에서 죄인이라고 판결한 사람을 위해서는 울지 못하게 했습니다. 로마 법이 아니라 유대 법으로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판결을 받고 죽은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울면 안되었습니다. 그런데 옆에 있던 사람들은 가슴을 치며 통곡했습니다. 어떤 불이익을 당하더라고 개의치 않겠다 라는 마음으로 스데반의 죽음 앞에 크게 울었습니다. 가슴을 치고 소리내어 운다는 앞에 나온 구절은 스데반을 장사하고 입니다. '장사하고'는 함께 가져가다, 함께 짐을 지다로 내가 스데반과 함께 가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이들의 울음은 저 사람과 내가 상관이 없어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데반과 함께 가겠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공회와 많은 지도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이라고 인정할지라도 이 사람들은 어떻게 표현합니까? 저도 죄인입니다. 나도 그러합니다. 하며 함께 가겠습니다 하는 고백이 바로 이 큰 울음입니다. 크게 울었으니 사람들이 다 알아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함께 운 사람들은 경건한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경건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뜻입니다. 인간적인 슬픔을 넘어서는 울음인 것입니다. 상대방의 아픔을 함께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경외하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함께 운 이들이 결국 흩어져서 사마리아로 땅 끝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세웁니다.
헨리 나우엔은 care 라는 단어를 비탄,고통이라는 카라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진정한 돌봄은 고통에 연대될 때 가능하다 라는 뜻입니다. 우리 자신이 고통 가운데 타인과 연대되지 않고서는 고통 당하는 자들의 고통을, 그들의 기쁨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러한 고통과 비탄을 제거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나에게 이런 고통이 있어야 이것이 care로 간다는 것입니다. 연대되고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약자들과 고통당하는 자들과 연대되게 하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하늘에서만 있지 않으시고 이 땅으로 오신 것입니다.
저는 오랜 기간 눈물이 없었습니다. 울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어머니가 집을 떠난 그 날도 분노와 아픔만 있었지 울음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아버지께서 술을 드시고 비통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저는 울지 않았습니다. 분노와 증오는 제 감정을 고장나게 만들었습니다. 오랜 세월을 아버지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한 채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이게 악이었습니다. 눈물은 우리의 고장난 감정을 다시 회복시켜줍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 내 심장을 뛰게하는 것입니다.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것이 큰 악, 큰 죄임을 저는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무엇이 악입니까? 악의 평범성이란 책을 쓴 저자 한 알헨트는 아우슈비츠 150만을 죽였던 홀로코스트의 전범 아돌프 아히만 중령이 얼마나 악한 사람인지 악마같이 생겼을거라 생각하고 교수형 집행 당하는 날 보러 갔습니다. 그런데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너무 모범적이고 선량한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돌프 아히만은 한 명의 공무원으로서 내려온 공문에 충실하게 일을 한 것입니다. 여기에 공감과 울음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아우슈비츠의 그 광기, 큰 악, 큰 죄는 공감의 결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한 알헨트가 쓴 또 다른 책 생각하는 힘이란 책에서는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악이 저질러졌다고 합니다. 우리가 think 함으로 말씀과 내가 연결되고 공감되는 것이고 십자가가 나의 십자가가 되는 것입니다. 도구적 조작적 지식을 가지고 그저 성실하게 일을 수행했던 것이 결국은 엄청난 악을 범하며 세기의 범죄를 행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악의 평범성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누가 악인이 됩니까? 내가 하고 있는 일의 결과를 생각할 줄 모르는 사람, 공감 능력이 전혀 없는 사람, 상식적인 동정심이 없는 사람, 다른 사람이 죽겠다고 아우성을 쳐도 그 아우성치는 사람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는 관료적 성실성, 이 관료적 성실성이 가장 악한 것입니다. 이 관료적 성실성의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빌라도 입니다. 예수님이 죄가 없음을 알았지만 총독의 자리, 가이사의 충신의 자리를 지키고 자신의 자리에 성실하기 위해 빌라도는 공감이 결여된 채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수많은 간증을 듣는 우리는 함께 울어야 됩니다. 저 사람이 죄인이라고 함께 손가락질 하는 것이 아니라 나도 저 상황이라면 그랬을 것이라고 공감하는 것입니다. 함께 울어야 됩니다. 크게 울어야 됩니다. 가슴을 치고 소리를 쳐야 됩니다. 그 울음을 통해서 그 사람의 아픔을 생각해야 되며 죄의 비참함을 우리는 생각해야 됩니다. 이것이 얼마나 한 사람, 한 가정을 무너뜨리는 일 인지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아돌프 아히만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울음은 그 사람을 이해하며 생각할 때 나오는 반응입니다. 그리고 이런 공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신 십자가에 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결국 내 속에 예수님이 오시기 위해서는 큰 울음이 있어야 됩니다.
제가 섬기는 고등부의 한 학생은 아버지가 집 나가 들어오지 않아서 어머니가 아이의 손을 잡고 아버지를 찾으러 가서 문을 열었는데 아버지가 목맨 현장을 그대로 보고 말았습니다. 너무 심각한 것은 그 현장에서도 아버지의 장례식에서도 아이는 절대 울지 않았다고 합니다. 울음이 상실되어 버린 것입니다. 감정이 고장나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고등부에 올라와서 사무엘서를 큐티하다가 성전에 올라와서 사무엘이 홀로 자라는데 하나님이 말을 걸어주시는 본문을 보고 울음이 터졌다고 합니다. 자신도 홀로 크고 있는데 이런 자신을 하나님이 돌보시겠구나 하고 공감이 되니까 그 때 아버지의 사건이 묵상이 되고 성전에 있는 자신의 현실이 해석이 되니 그 때 엄마와 함께 큐티하며 펑펑 울었다고 합니다.
3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나를 잔멸한 이 사람으로 경건한 사람들은 울기 시작합니다. 잔멸은 멧돼지가 포도밭을 마구 짓밟는 행위를 뜻하는 단어라고 합니다. 포도가 짓밟히니까 터지는데 이 터지는 것이 마치 피가 흥건해져 하나도 남김 없이 짓밟히는 상황이 바로 잔멸이라고 합니다. 잔멸하다가 미완료로 기록되어 단회적으로 된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지속적으로 된 것임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생각해보면 누가와 사울은 친했습니다. 사도행전을 누가가 기록했는데 나중에 바울과 함께 따라갑니다. 내가 친한 사람, 내가 존경하는 사람의 과거를 가려주어야 하는데 누가는 사울의 잘못을 잔멸했다는 표현을 쓰며 다 기록해 놓았습니다. 이것이 구속사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잔멸하는 사울이 누구입니까? 스데반이 죽을 때 옷을 맡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내 옆의 나를 잔멸하는 사람을 통해서 우리는 큰 박해가 임하고 내 옆의 나를 잔멸하는 사람을 통해, 내 옷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통해서 내 울음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결국 나의 구원, 나의 부활, 나의 그 날에는 돕는 사람은 바로 내 옷을 맡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내 옆에 나를 잔멸하는 사람이 바로 나를 구원을 돕는 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잔멸하니까 끊어버리려고 합니다.
적용 질문
- 내가 크게 통곡하며 울었던 적은 언제입니까?
- 수많은 간증을 함께 들으며 공감하나요? 아니면 이성적으로 판단하며 평가하나요?
- 내 옆에 옷 맡은 자는 나에게 어떤 존재인가요?
3. 큰 기쁨이 있습니다.
4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5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6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7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
8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큰 박해, 큰 울음 뒤에 큰 기쁨이 있다고 합니다. 박해로 인해서 흩어진 사람들은 다 흩어졌습니다. 지경이 넓어졌습니다. 그런데 큰 기쁨이 그 성에 있다고 합니다. 그 성은 바로 사마리아성입니다. 사마리아성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본래 이스라엘은 하나였는데 르호보암 때 남북이 분단 되고 사마리아는 북왕국의 수도였습니다. 북왕국은 분단된지 약 200년 후에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합니다. 앗수르 당시 사르곤 대왕은 북이스라엘이 멸망한 후에 새로운 정책을 하나 마련하였습니다. 다른 나라에서 살던 사람을 이스라엘에 데려와서 살게 한 것입니다. 이민 정책을 썼습니다. 순수 혈통에 너무 집착하는 유대인들의 결집력을 흩어버리겠다는 정책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민족을 끌고오니까 혼합되기 시작했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다라며 개보다 못한 존재로 그 때 당시 여자의 신분보다 더 낮은 신분 가장 밑바닥, 개보다 못한 존재로 사마리아인들을 취급했습니다. 원래 사마리아를 통과하면 북에서 남이 굉장히 가까운데 사마리아 땅을 밟는 것조차 싫어서 빙 돌아갔습니다. 그러니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마리아인들 역시 유대인을 증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의 골은 서로 상종도 않을 만큼 깊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너희가 경멸하는 그 사마리아에도 증인이 되라고 하십니다. 사도들은 시도조차 안했습니다. 그런데 큰 박해와 큰 울음으로 흩어지게 되니 흩어진 사람 중 한 사람인 빌립을 통해 복음이 전해집니다. 사마리아에까지 전해지는 이 복음으로 이 성에 큰 기쁨이 가득했다고 합니다.
한 번 생각해 봅시다. 흩어진, 큰 울음을 울었던 그들 중 한 명인 빌립은 어떤 사람일까? 우리는 정말 대단한 사람아냐?라고 생각하는데 대단한 사도들은 흩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핍박이 덜했던 히브리파 유대인과 사도들은 흩어지지 않았습니다. 정말 족보도 이름도 없는 헬라파 유대인들이 흩어졌습니다. 빌립은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 도망자였습니다. 스데반의 마지막 설교로 인해서 유대인들이 가졌던 선민의식과 율법에 대한 자부심이 깨뜨려졌습니다. 어떻게? 너희가 그렇게 대단하게 생각했던 아브라함이 어떤 사람인 줄 아냐? 지금도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라 하며 아직도 그 땅에서는 전쟁이 끊이지 않고있습니다. 스데반은 너희가 그렇게 대단하게 여겼던 그 아브라함의 과거를 들통내 버립니다. 그 아브라함이 원해 메소보타미아 출신이고 우상 섬기며 살았다. 아브라함이 얼마나 지질한지 아내를 두 번이나 팔아먹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지질이들도 하나님이 붙드니 쓰이더라는게 스데반 설교의 촛점입니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또 모세는 살인자요 도주자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브라함을 본받아야 돼. 모세를 본받아야 돼. 다윗을 본받아야 돼 하고 합니다. 아니죠. 우리는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본받아야 될 촛점을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교회를 하시고 하나님께서 복음을 하심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빌립도 대단한 사람이라서 흩어서 사마리아 땅에 보냈다는 것이 아닙니다. 빌립도 했다고 합니다.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라고 합니다. 원래 안들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빌립은 사도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더라, 빌립도 하더라 그러니 너희도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면 할 수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을 통해서 사마리아 땅에 복음이 전해지며 기쁨이 그 성에 가득하게 됩니다. 무리 속의 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성령께서 함께 하시니 박해 받은 빌립도 하더라. 구속사는 하나님께로 촛점을 맞춥니다. 그리고 이 빌립이 사도들도 시도하지 못한 사마리아 땅으로 향합니다. 어떤 사람입니까? 자기가 도망자임을 아는 사람, 자기가 하나님 앞에 죄인 임을 아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수천년 동안 내려왔던 그 경계를 넘어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이 원해서 혼합된게 아니야 하는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이해가 경계를 넘어서게 되는 것이고 사마리아 온 성에 복음을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 성에 기쁨이 가득했다고 합니다. 사마리아는 구원의 대상으로 여기지도 않았던 무시 받던 곳이었는데 이런 곳에 평신도 빌립이 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4절에서 이 빌립이, 흩어진 사람들이 전한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초대교회의 전파하는 복음의 핵심은 그리스도입니다. 잘살고 잘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핍박 받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께서 그날에 부활하셨다는 이 사실이 증거되니 이제는 사마리아 땅에 기쁨이 가득한 것입니다.
적용 질문
- 아직도 내가 넘지 못하는 편견과 고정관념은 무엇입니까?
- 아직도 용서가 안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 사람과 내가 똑같은 죄인임이 믿어지시나요?
- 나는 어디로 나아가야 하나요?
공동체 고백
목사님 간증
어느날 아침 전화가 왔습니다. 수화기 넘어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119 구조대원이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크게 트럭에 부딪혀서 날아가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병원에 가지 않으려고 행패를 부린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급하게 지방에 내려가보니 다리가 부러진 아버지가 병원에서 기어나가서 시장 입구에 가서 술을 마시고 있던 것입니다. 옷이 다 넝마가 되었습니다. 마음이 무너졌고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께 구하고 기도해서 아버지를 수술이 가능한 서울로 모시고 올라왔습니다. 모시고 오려고 차에 태우는데도 아프다고 소리를 치셨습니다. 그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간신히 입원시켜 드렸는데 다음 날 수술 못하겠다고 모시고 나가라고 쫓겨나기를 4번 반복했습니다. 마지막 시에서 운영하는 병원이라 쫓겨나지는 않았는데 휠체어에 모시고 각종 검사를 위해 다니던 중 아버지가 병원 바닥에 소변을 보셔서 급하게 소변을 닦고 기저귀를 채워드리고 간신히 입원했는데 그 곳에서도 얌전히 계시지 않고 또 간호사, 의사에게 욕을하며 행패를 부리셔서 몇 번이나 호출을 당했습니다. 정말 큰 박해가 임했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나에게 왜 이런 큰 박해가 임했나? 평생을 아버지의 구원을 위해서 적용하고 10년 동안 매일 빠지지 않고 아버지를 위해 기도했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런 시간을 주셨을까 큰 박해로 느껴졌습니다. 그 큰 박해로 인해 저의 지경이 넓어졌습니다. 어느 날 또 아버지가 쫓겨나서 다른 병원으로 이동하는데 아버지가 갑자기 제 옆에서 울음을 터뜨리셨습니다. 울음을 터뜨리신 아버지를 보며 아버지의 삶이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아내가 떠났을 때 당시 아버지가 지금 제 나이 때였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가 울음을 터뜨리신 것을 보며 아버지가 이해되고 용서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아버지께 물었습니다. 어떻게 천국 갈 수 있냐고... 물으니까 아버지가 예수이름으로 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울음으로 아버지가 이해되고 용서되고 정말 증오했던 아버지, 내가 넘지 못했던 그 경계의 아버지였던 그 사마리아까지 복음이 전해졌고 그로 말미암아 정말 제 삶에 큰 기쁨을 하나님께서 허락해주셨습니다. 처음에는 왜 이런 박해를 주셨는지 이해되지 않았는데 하나님께서는 제게 그 날을 허락하시기 위해서 아버지가 소천하실 때 발인 날 큐티 본문이 데살로니가전서 4:13-14입니다.13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4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아버지의 죽음을 하나님께서는 죽음이 아니다 잔다고 표현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자는 자들이 먼저 일어난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날을, 우리에게 부활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큰 박해, 큰 울음, 큰 기쁨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날에 그들이 먼저 일어나 주와 함께 한 이 보고픈 얼굴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남은 우리는 큰 뱍해 가운데 내 자아가 죽어지고 경계를 넘어 잘 흩어져서 이 복음을 잘 전해야 할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로 사명으로 나아가시기를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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