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4:1-6
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5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6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전화는 받는 사람 마음대로 control 할 수 없습니다. 전화하는 caller가 전화 걸면 걸리는 것입니다. 받는 사람은 그저 받는 것입니다. 부르심을 영어로 calling 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성령의 부르심을 받는데 성령의 calling은 caller 이신 성령께서 결정하시고 불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부르심을 받을 뿐입니다. 전화 벨 들으실 때마다 성령의 부르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부르심은~
1.겸손한 자리로 부르십니다.
1절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우리는 본래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결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도 없었습니다. 휴대폰이 있다면 하나님이 우리 전화번호 저장도 안 해 놓으셨을 것입니다. 너무 하나님과 어울리지 않아서... 하지만 놀랍게도 하나님은 진노의 자녀였던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불러주셨어요.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된 것입니다. 학교나 회사처럼 지원해서 합격하고 선발된 것이 아닙니다. 만세 전에 성부 하나님께서 뜻하시고 때가 차매 성자 예수님께서 완성하시고 각 사람마다 가장 적합한 카이로스의 하나님의 때에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적용해 주시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로 우리를 불러주신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우리 귀에 들리게 귀를 열어주신 것입니다. 성령께서 귀를 열어 들리게 해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부름심을 우리가 특별히 성령의 부르심이라고 얘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부르심은 진노의 자녀를 하나님의 자녀로 바꾸어 놓는 부르심입니다. 단지 전화 한 통 넣는 것이 아니고 단지 초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존재를 바꿔놓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피해다니던 우리, 하나님께 가까이 가지 않으려고 했던 우리가 이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변화되어서 하나님 이 자리에 저 왔습니다. 하며 하나님 앞에 내가 왔다고 저를 봐 달라고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아갈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로 다 변화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존귀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 다음은 무엇일까요? 이제 구원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내 남은 인생 그저 편하게 살리라 하면 되겠습니까? 아닙니다. 1절 첫 구절처럼 '그러므로'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그러므로 거기에 응답해야 될 책임과 의무와 권리가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앞으로 더더더 나아가야 되는 목적지가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성령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일까?
2절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모든 겸손과 온유, 오래 참음 그리고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는 것 이렇게 크게 세 덩어리 입니다.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는 것은 상대방의 연약함을 내가 받아주는 것입니다. 잘 받아내는 것입니다. 말이든 행동이든 내가 맘에 안드는 것, 속상하고 짜증나고 화나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들어줄 수 없고 받아줄 수 없는 말들이 너무 많지만 서로 용납한다는 것은 그것을 잘 받아주는 것입니다. 내가 되갚지 않는 것입니다. 욕 하나 들었다고 그대로 돌려주는 것 하지 않는 것이 서로 용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용납하는 것은 내 힘과 내 교양과 인품으로 억지로 참으면서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조건이 있습니다. 사랑 가운데서 즉 사랑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사랑은 내가 원하는 대로 받는 것, 사랑은 상대가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이라는 굳은 고정관념이 있는데 사실 그것을 가짜 사랑입니다. 잠깐 있다 사라지는 사랑입니다. 진짜 사랑은 영원히 남는 단 하나, 구원, 그 사람의 구원을 생각하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따라서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라는 것은 상대방이 구원을 받을 때까지, 그 사람에게 정하신 구원의 때가 임할 때까지 공격하지 말고 받아주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용납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오래 참는 것입니다. 나는 당장 승부를 보면 좋겠는데, 나는 당장 이 번 주일에 내 남편, 내 아내에게 말씀이 들리고 변화되면 좋겠는데 그것은 내가 정한 때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구원의 때가 찰 때까지 참고 기다리는 것이 오래 참는 것입니다. 이것이 있어야 서로 사랑으로 용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용납해 주셨고 오래 참아주셨기 때문에 이자리에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은 내가 참을 수 없어 하는 것이 주제가이고 내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납해 주시고 구원해주신 그 은혜를 생각하면 더는 참을 수 없어라는 말 해서는 안됩니다. 아무리 미운 사람, 아무리 힘든 사람이라도 그 사람도 나와 똑같이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받아서 구원 받아야 되는 죄인 이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구원의 때가 찰 때까지 참아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오래 참기 위해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온유입니다. 온유는 부드럽게 착하게 남이 시키는 대로 다 하는 것이 아니고 온유의 본질은 내 분수를 아는 것입니다. 내 분수를 알면 자동적으로 온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선을 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특기 중 하나가 상대방, 특히 가족을 향해 선을 넘는 것입니다. 내 남편을 향해, 아내를 향해, 아이들을 향해서 우리는 선 넘기를 밥 먹듯이 합니다. 내 말이 맞잖아,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데 왜 이렇게 안해. 하는 것이 다 선 넘는 것이고 주제 파악이 안 되는 것입니다. 내가 한계가 있는데 그것을 알지 못하니까 자꾸만 온유하지 못한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온유는 내 자리를 잘 지키고, 내 한계를 잘 지키고, 내 분수를 알고, 내 주제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어떤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더라도, 내가 멍에를 매게 되더라도 내 분수를 아니까 화내지 않고 가는 게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온유, 즉 주제 파악을 할 수 있는 가장 핵심이 무엇일까요? 내가 100% 죄인 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돈이 없고 건강이 약하고 아내에게 도움을 받아야 되고 이런 저런 한계들이 있는데 그정도 차원에서 내 한계를 생각하고 그것으로 온유하려고 하면 언젠가는 그것도 한계가 오는 것입니다. 더 이상 못참아 할 때가 옵니다. 그런데 완전한 온유가 되기 위해서는 아, 내가 100% 죄인이라서 내 삶에 대해서는 절망 밖에 할 게 없구나 하는 절대적 절망하는 위치까지 내려가야만 온유할 수 있는 것인데 이 절대적 절망, 내가 100%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겸손인 것입니다. 겸손은 내가 아무것도 아닌 척 하는 게 아닙니다. 상대방 비위 맞춰주는 것이 아닙니다. 연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겸손은 내가 하나님 앞에서 100% 죄인이고 따라서 절망 밖에 할 것이 없는 인생이라는 것을 깨닫고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 바로 겸손인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겸손하면 온유할 수 있고 온유하면 오래 참을 수 있고 오래 참으면 사랑으로 서로 용납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겸손이 제일 앞에 있는 것입니다. 겸손이 먼저이고 겸손이 제일 중요한 것이고 겸손이 근본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겸손 앞에 모든 이라는 말을 붙여주셨습니다. 강조하신 것입니다. 겸손이 제일 먼저이고 제일 중요하니까 이 겸손 가지고 내가 100% 죄인이라는 이 확실한 의식을 가지고 사는 것이 성령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겸손의 반대말이 교만이니 교만은 나쁘고 겸손은 좋은 것이라고 당연히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활동하던 당시 신약시대 로마 사람들에게 겸손이라는 단어를 보여주면 겸손의 반대말은 교만이 아니라 잘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비아냥 거리는 의미가 아닙니다. 집안도 좋고 성품도 좋고 누구나 다 모범으로 삼을 수 있을 만큼 잘난 사람이고 그래서 로마 사람들이 이해할 때는 잘남의 반대말이 겸손이었습니다. 그래서 로마 사람들이 기독교인을 볼 때 어땠을까요? 교회에서는 겸손해야 합니다 라고 가르치니까 야, 저 사람들 진짜 이상한 사람들이네. 잘나게 좋게 살아도 모자라는 인생을 못나게 살라고? 이렇게 너무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손가락질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조롱도 조롱이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우리가 어떻게 스스로 겸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스스로 내가 100% 죄인입니다 하고 깨달아서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정말 그게 안됩니다. 그래서 우리를 도우시는 성령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성령님께 전화 건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먼저 나를 불러주셨다는 것입니다. 어디로 불러주십니까? 겸손한 자리, 겸손한 환경으로 불러주시는 것입니다. 왜요? 우리는 겸손할 수 없기 때문에. 그러나 겸손해야 하니까. 겸손해야만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 수 있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고 그것이 구원에 걸맞는 삶을 사는 것이기 때문에 성령께서 그게 안되는 우리를 도와주시기 위해서 겸손의 자리에 우리를 불러다 놓으시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겸손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환경에 매이고 감옥에 갇힌 겸손한 환경에 매여서 어쩔 수 없이 겸손한 흉내라도 내면서 그렇게 부르심에 응답하면서 살라는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감옥 같은 상황에 계신가요? 쇠사슬에 묶여 있는 듯한 고난에 매여 계십니까? 이것이 우연히 된 것이 아니라 주 안에서 된 일 인줄 믿습니다.
사도바울도 주 안에서 갇힌 자 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바울의 옥중 서신을 읽다 보면 바울이 잊을 만하면 한 번 씩 내가 갇힌 자고 내가 매인 자고 내가 죄인이라고 자기 소개를 한 번 씩 해줍니다. 저랑은 정반대입니다. 저는 잊을 만하면 한 번 씩 학벌 좋고 집안 좋고 하는 헛소리를 하지만 바울은 잊을 만하면 내가 갇힌 자요 내가 매인 자요 내가 매 맞은 자요 내가 죄인이라는 고백을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 안에서 된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매여 있는 감옥 같은 환경, 나를 묶고 있는 쇠사슬같은 사건과 사람 모든 것들은 성령께서 나를 세우신 겸손의 자리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힘들지만 잘 갇히고 잘 매여있으면 그것이 성령의 부르심에 대한 최고의 응답인 줄 믿습니다. 부르신 성령께서 반드시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적용 질문
-지금 어디에 갇혀 있습니까? 그것이 주 안에서 겸손한 자리임이 믿어집니까?
-겸손한 자리에 잘 갇혀 있기 위해 이번 주 적용할 일은 무엇입니까?
2.하나 되도록 부르십니다.
3절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절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우리가 성령의 부르심을 받기 전 진노의 자녀 였을 때 모습을 성경에서는 옛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옛사람의 특징이 여러개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분열, 나뉘는 것입니다. 서로 비교하고 경쟁하고 다투다가 결국 원수같이 됩니다. 심지어는 가족 간에도 원수 같은 가족들이 참 많습니다. 원수같이 되어서 다 분열되고 나뉩니다. 그렇게 쪼개져 가는 것이 하나님을 떠나 사는 옛사람의 모습입니다. 저마다 하나님을 떠나 있기 때문에 나만 옳으니 다 쪼개지고 싸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쪼개지고 싸워서 상처 받는 우리들을 불러주셨습니다. 무엇으로요? 화평입니다. 우리를 화평케 하셨습니다. 그 결과가 에베소서 2:15에 한 세 사람입니다. 한 사람인데 세 사람, 한 명인데 세 명이라는 겁니다. 본문에도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 이시라고 했는데 이 뜻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한 몸과 한 영이 합쳐져 한 사람인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도 한 사람과 같은 완전한 하나다 라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 말씀드렸던 토투스 크리스토스 (The Whole Christ), 전체적인 그리스도입니다. 원수같은 가족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교회로 부르심을 받아서 화평의 끈으로 하나가 되어서 교회 공동체를 이루면 그 자체로 마치 한 사람과 같은 한 세 사람이 되는데 그게 곧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다 전체 그리스도 (The Whole Christ)를 이루는 한 분 한 분의 작은 그리스도다 라는 귀한 메세지를 우리에게 주고계신 것입니다. 우리 몸의 지체가 몸에서 떨어지면 바로 죽고 맙니다 피부도 피부 조직 하나도 떨어지면 말라서 없어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교회에서 분리되면 영적으로 죽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상처 받고 교회가 마음에 안들어서 혼자 신앙 생활 할거야, 집에서 온라인 예배 드리면서 나 혼자 신앙을 지켜갈거야 하는 것은 안됩니다. 하나님은 한 분 한 분을 다 불러주셨지만 절대로 혼자서 불러주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주실 때는 언제나 공동체적으로 교회를 통해서 불러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를 떠나서는 구원의 은혜를 온전히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우리를 불러주신 부르심의 소망도, 부르심의 목적지도 두 개가 아니라 하나라는 것입니다. 왜요? 우리의 구원이 하나이고 목적지인 천국이 두 개가 아니고 하나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하나되게 하시는 하나됨은 우리가 만들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성령이 하나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물리적인 합체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정신적인 공감이나 동화에 불과한 것도 아닙니다. 성령께서 하나되게 하시는 연합은 영적인 하나됨입니다. 다름아니라 평안의 매는 줄로 함께 묶여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금 줄이라도 같이 묶여 있는 것 좋아하는 사람 없습니다. 내가 아무리 사랑하고 좋아하는 내 자식이라 하더라도 같이 묶여산다고 생각해보세요. 그게 좋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주님은 교회의 영적인 하나 됨을 줄에 매는 것에 비유하십니다.
그러면 평안에 매는 줄이 무엇입니까? 평안, 샬롬은 아무 문제 없이, 아무 걱정 없이 평안하게 사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통치가 완전히 이루어진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 중심으로 자리를 딱 잡아서 질서를 이루고 있는 것이 샬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평안에 매는 것은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다스림입니다. 이것이 평안의 매는 줄입니다. 그렇다면 이 줄에 매여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 줄에 묶여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통치를 내가 잘 받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주님의 말씀대로 내가 순종해서 적용하는 것입니다. 내 생각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대로 하는 것, 이것이 평안의 매는 줄에 잘 매여있는 것입니다. 감옥에서 바울이 매여 있는 사슬은 단순한 구속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울이 주님의 말씀에 묶여 있다는 영적인 연합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강력한 사인, 증표인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알아봤습니다. 자기가 감옥에 갇혀 있는 것, 쇠사슬에 묶여 있는 것 자체만 놓고 본다면 바울처럼 억울한 사람이 어디있겠습니까? 바울이 한 일이라고는 주님의 명령에 따라 복음 들고 나가서 전도한 것 뿐인데 그 결과가 이렇게 감옥에 갇히고 쇠사슬에 묶이는 것이었다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하나님을 향해서 원망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이 잊을 만하면 한 번 씩 자랑해줄 만큼 감사하고 감격하는 것은 지금 갇혀있는 감옥이, 나를 묶고 있는 사슬이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바울이 안 것입니다. 이게 주 안에서 된 일이고 내가 정말 아무런 닻도 없이 바다에 흘러 떠내려 갈 수밖에 없는 인생인데 하나님께서 나를 천국에 인도하시기 위해서 말씀에 묶어두셨구나, 하나님의 부름심 안에 가둬두셨구나, 겸손한 자리에 가두어 두셨구나, 하나되는 이 부르심의 자리에 나를 세워두셨구나 하는 증표로서 잊어버리지 말라고 물리적으로 감옥에 가두어 두시고 쇠사슬에 묶어 두셨구나 그렇기 때문에 이 감옥에 갇힌 것이 주 안에서 된 것이구가 하는 고백을 사도 바울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를 묶어두고 있는 사슬 같은 상황과 사람들, 감옥 같은 사건들 모두가 내 영을 평안의 줄에 묶어두신 하나님의 역사를 내가 자꾸만 생각하지 않고 잊어버리니까 잊지 말라고 이것 보고 그것을 기억하라고 네 삶이 어디로 가야하는지 제대로 쳐다보라고 나를 가둬두신 것이구나, 나를 묶어두신 것이구나.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평안의 매는 줄에 잘 매여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내 생각대로, 내 뜻대로, 내 계산대로 하고 싶지만 오늘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묻고 내가 너무 하기 싫지만 말씀이 하라고 하시면 그대로 하고 내가 너무 하고싶지만 말씀이 하지 말라고 하시면 하지 않는 순종을 하면서 가는 것이 평안의 줄에 잘 매여있는 것인 줄 믿고 그것이 곧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지키는 유일한 비결인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의 하나됨은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만들어주신 것이고 그러나 우리가 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가만히 두면 매인 줄을 자꾸 풀려고 하고 옛 것이 자꾸 나와 옛날의 내 생각이 자꾸 생각나고 그 사연에 갇혀 살면 평안의 매는 줄을 의도치 않게 자꾸 풀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그것을 힘써 지키라고 하십니다. 그냥 지키는 것이 아니라 힘써, 최선을 다해서 지키라고 하십니다. 내 힘을 다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이 내게 주신 가정, 목장, 지체들, 교회에 내가 잘 갇혀서 나의 힘든 남편, 아내를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고 당장이라도 풀어버리고 싶지만 하나님이 만드신 공동체인 교회와 가정, 부부를 지키는 것이야 말로 성령이 하나되게 하심을 힘써 지키는 적용인 줄 믿습니다. 서로 불평하고 갈등할 때마다 힘써 지켜야 하는데 잘 갇혀있고 잘 매여 있는 것이 성령께서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것입니다. 세상의 부름, 즉 나라의 부름을 받고 회사, 상사에게서 부름을 받는 것은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일인데 그 부름의 특징은 부름 받은 그 사람만 돋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 부름을 받고 싶은 것입니다. 모두를 제치고 원 탑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세상에서 나를 불러주는 사람이 없나 바라고 나를 불러주는 사람이 없으면 속상해 하고 실망합니다. 하지만 성령의 부르심은 나를 원탑으로 만들어주는 부르심이 아닙니다. 성령의 부르심은 나를 그리스도의 몸인 이 교회에서 one of them으로 그들 중 하나로, 이 많은 지체들 중 하나로, 평범한 하나로, 특별할 것 없이 그저 붙어가는 존재로 나를 불러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잘 갇히고 매여서 성령의 하나됨을 지키게 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 임을 믿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천국의 모습인 것입니다. 세상의 모습은 내가 원탑이 되는 것인데 천국의 모습은 그들 중 하나가 되어서,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서, 오직 머리이신 주님께 순종하면서 나아가는 그 모습, 삶이 천국의 삶인 줄 믿습니다. 이러한 천국의 하나됨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적용 질문
-평안의 매는 줄이 잘 매여 있습니까?
-다시 말해, 내 생각보다 주님의 말씀을 더 의지하며 따릅니까?
-내 인생에 가장 큰 한 가지 소망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한 성도님은 자녀를 일류대학 보내고 싶어서 최선을 다해 뒷바라지를 하셨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공부도 잘해야된다, 능치못할 일이 없다고 부르짖으면서 자녀들 교육에 힘썼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아이들이 모범생으로 말을 잘 들었지만 큰 딸이 사춘기가 되자 반항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분의 기대에 조금 못 미치는데서 끝나지 않고 완전히 정반대로 나갔습니다. 학원에서는 계속 잠만 자고 밤 늦게까지 게임하고 지각을 밥 먹듯이 했습니다. 게다가 잘 나가던 남편도 갑자기 실직하게되고 투자에 실패하는 사건까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예기치 않은 이런 겸손한 자리에 놓이게 되니 그제서야 겨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로 인도 되었습니다. 그 전에는 저마다 가족들이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하느라고 서로 갈등하고 미워하고 싸우고 판단하고 정죄했었는데 이제 공동체로 인도되어 각자 목장에 들어가 양육 받고 자기 죄를 보고 가족이 무엇인지 알게되니까 서로의 상처와 아픔이 보였습니다. 이 분도 아이들에게 향한 열심이 좋은 엄마로서의 훌륭한 교육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부모님께 받은 상처와 자신이 입시에 실패했던 열등감 때문에 아이들을 들들 볶는다는 것이 깨달아졌답니다. 아이들을 몰렉에게 우상제물로 바치는 자기의 모습을 깨닫고 회개했습니다. 그래서 자녀가 가는 길이 탄탄대로가 아니라 오솔길이어도 감사하다고 고백하십니다. 이렇게 회개하면서 공동체 안에서 가족들이 하나가 되어가니까 걱정하던 딸도 하나님 안에서 공동체의 권면을 받아서 은사를 발견했고 진학해서 훈련되고 있다고 합니다. 무엇이든지 자기 감정과 생각대로 하면 아무리 좋은 환경에 살아도 감옥입니다. 세상적으로 아무리 좋은 집, 아무 문제 없는 환경, 행복한 가정에서 살아도 내 감정과 내 사연에 매여있으면 그것이야말로 감옥입니다. 하지만 지금 육적으로는 다 무너진 환경, 진짜로 감옥에 갇혀있는 것 같고 진짜로 쇠사슬에 묶여 있는 것 같아도 이곳이 성령께서 나를 부르신 자리라는 고백이 있으면 그곳이 곧 천국인 줄 믿습니다.
3.삼위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5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참 사람이십니다. 99% 하나님 1% 사람, 99% 사람 1% 하나님이 아니라 100% 하나님이시고 100% 사람이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분이 아니라 한 분이십니다. 이것은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되지 않는 신비입니다. 천국 가면 우리에게 알려주실 줄 믿습니다. 참 사람이시며 동시에 참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한 분 이시라는 것을 믿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가장 바탕이 되는 신앙 고백인 것입니다. 다른 것 다 믿어도 이것을 믿지 않으면 우리 신앙은 참 신앙이 아닌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한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도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신앙 고백이 하나인 것입니다. 또 세례도 하나입니다. 주님이 한 분 이시니까. 세례는 내가 주 예수 그리스도와 죽고 주 예수 그리스도와 사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우리가 죽었던 데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서 살아가니까 이 생명이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과 똑같은 생명을 우리에게 주셔서 The Whole Christ로서 살아가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약속이 여기에 담겨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주 중요한 고백을 바울의 입을 통해 성겨에 담아놓으셨습니다.
6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성령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의 결론이 무엇인가? 우리가 신앙 생활 잘하고 힘쓰고 애써서 교회 생활 잘하면 그 결론이 무엇인가? 우리는 본성적으로 늘 우리의 행복을 꿈 꿉니다. 이 땅에서 잘 되면 좋겠다. 내가 이렇게 수고했으니까 좀 잘되면 좋겠다며 행복으로 결론짓기를 꿈꿉니다. 그러나 6절을 통해 우리에게 해주시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성령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의 결론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 생활의 결론이 한 분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인생의 목적이 우리의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께 구별되어 드려지는 거룩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 밖에 안계십니다. 완전하신 분이고 절대적인 분이십니다. 그런데 인간의 머리로는 완전하면 아무도 필요없어, 그냥 하나님 혼자 저 멀리에 계신 분이야, 우리를 상관하지 않으셔 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이지만 동시에 결코 홀로 계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만유의 아버지이신 것입니다.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돌보시며 구속해가시는 분이 바로 우리가 믿는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만유와 함께 계십니다. 만유와 함께 계시고 특별히 하나님을 닮은 존재인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함께하십니까? 첫째, 만유 위에 계십니다. 초월성입니다. 우리 위에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감춰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눈에 안 보인다고 없는 게 아닙니다. 우리에게 감춰져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누구보다도 강력한 의지를 가지시고 우리를 돌보시고 우리를 구원해 가십니다. 그래서 만유 위에 계시다는 것은 성부 하나님의 역사를 뜻하는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감춰진 하나님의 뜻으로 우리에게 임하셔서 우리를 돌보시고 우리를 계획하신 그 삶대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두번 째는 만유를 통일하신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죄 때문에 산산조각 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하나님께서 마치 구슬로 목걸이를 꿰듯이 조각난 것을 다 꿰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깨어진 우리 삶 가운데 오셔서 십자가와 부활로 우리 삶을 하나로 연합해 가시고 살려가시고 구속해 가시는 나타난 하나님의 뜻인 성자 예수님의 사역인 것입니다. 성자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구원을 완성해 주셨습니다. 통일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순간에도 우리를 위해 중보하십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인 것입니다.
세번 째는 만유 가운데 계시다고 합니다. 이것은 만유 안에서 구원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적용하시고 그 한 사람 한 사람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천국까지 끝까지 인도해 가시는 성령님의 효과적인 능력입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가르치시고 우리를 위해 어떻게 기도해야 될지 모르는 순간에도 성령께서 탄식하시면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고 우리를 날마다 도우시는 성령 하나님의 내주하심과 교통하심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성령 하나님의 내주하심과 교통하심 이것이 바로 우리 삶에 절대로 겸손한 자리에 갈 수 없고 절대로 하나가 될 수 없는 우리 인생을 부르신 하나님께서 내가 할 것 알려줬으니까 이제 네가 알아서 해 하고 내버려두시지 않으신 다는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연약한 인생과 함께 하시는 줄 믿습니다. 바로 이것이 삼위 하나님의 함께 하심 임마누엘인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가 겸손한 자리에 내려가기 어렵고 하나되는 것을 지키기 힘들지만 우리가 성령의 부르심에 최선을 다해 응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요? 삼위 하나님께서 오늘도 이시간에도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부름은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반드시 끝날 때가 있습니다. 합격의 부름, 승진의 부름, 좋은 일의 부름을 우리가 그렇게 기다리다 받아도 끝날 때가 있습니가. 그리고 많은 경우 그 부름으로 원탑의 자리에 갔지만 한 순간에 그 부름이 버림이 되는 것을 경험하고 봅니다. 이것이 우리가 좋아하는 세상의 부름의 결말입니다. 아무리 좋은 자리도 예외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의 부름은 안타깝지만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부르심은 결론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함께 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절대로 실망할 게 없습니다. 절대로 후회할 게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우리의 삶을 책임져주시고 이끌어주시고 밀어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위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도와가시는 줄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감옥 같이 힘들고 쇠사슬에 매인 삶이지만 성령의 부르심으로 믿고 응답하시면서 여전한 방식으로 살아낼 수 있는 줄 믿습니다.
적용 질문
-삶의 모든 순간에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믿지못한다면 이유가 무엇인가요?
-삼위 하나님과 함께 응답해야 할 성령의 부르심은 무엇입니까?
중1 친구가 tt에서 나눈 것입니다. 장애가 있는 누나를 어릴 때부터 돌보고 챙기느라 너무 힘들었습니다. 왜 나만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하나 속상할 때가 많았답니다. 그런데 힘든 환경 속에서 부모님 따라서 교회 열심히 다니고 큐티하면서 이 친구가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나의 힘든 상황과 함께 계시다는 것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룻기 큐티에서는 '지금 아무리 힘들고 지칠지라도 하나님께서 룻을 보아스와 함께 하게 만들어 다윗의 증조모까지 되게 하신 것처럼 저역시도 누나를 섬기며 누나의 발 밑에서 자는 수고를 하면 하나님의 약재료로 써주실 줄 믿습니다' 동생과의 다툼에 대한 큐티도 했습니다. '요즘 동생과도 많이 싸웠습니다. 큰 일도 아닌데 싸우게 되고 동생에게 미움과 시기만 많아졌습니다. 하지만 룻의 나오미를 향한 헌신과 보아스의 베푸는 사랑을 통해서 순종과 희생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동생에게 착하게 대해주자라는 적용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적용을 했지만 이내 집으로 돌아가면 동생과 싸우는 자기 모습이 있는 것입니다. 동생과 싸우면서 금새 동생이 잘못했다고 하는 자기 모습이 있었답니다. 그리고 이 친구가 공부를 잘해서 역시 나는 남들과 다르구나. 내가 제일 특별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저절로 드는 것입니다. 교만한 마음이 자기도 모르게 들었는데 오랫 만에 다시 큐티 책을 폈는데 거기에 간증이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내용은 자신이 잘나고 특별하다는 착각에 빠져서 하나님을 멀리했지만 대학에 떨어져 하나님의 말씀을 더 열심히 듣게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그 간증을 읽는데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말씀이고 내 미래가 되겠구나 하는 느낌을 확 받았다고 합니다. 처음으로 거기에 있는 말씀이 내 말씀으로 들리는 경험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결단을 했습니다. 이제부터는 교만하지 않고 저를 낮추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앞으로는 누나와 동생을 잘 돌보고 친절하게 대하면서 하나님만 믿고 따르겠습니다. 성령의 부르심에는 이렇게 차별이 없습니다. 중학교 1학년 부터 장년에 이르기까지 성령은 부르고 싶을 때 부르시고 부르고 싶은 사람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 부르심을 받은 우리이니 얼마나 은혜입니까. 이 중학생도 그 상황 속에서 성령께서 부르셨기 때문에 엄청난 경험을 하고 고백을 하고 나눔을 하고 간증자로 쓰임 받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인생이 성령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귀한 인생되길 축복하고 여러분 모두의 인생도 그렇게 귀한 인생으로 쓰임 받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부르심은 겸손한 자리로 부르십니다. 하나되도록 불러주십니다. 삼위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세상의 부름은 잠깐 우리를 높이는 것 같지만 곧 버림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성령의 부르심은 결코 후회하심이 없습니다. 우리가 자격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중에 누가 그런 자격이 있겠습니까? 오직 은혜로 오직 하나님의 주권으로 우리를 불러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한 것입니다. 주 안에서 상황과 자리에 잘 매여서 성령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내는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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