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20:18-28
18 이스라엘 자손이 일어나 벧엘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여쭈어 이르되 우리 중에 누가 먼저 올라가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유다가 먼저 갈지니라 하시니라
19 이스라엘 자손이 아침에 일어나 기브아를 대하여 진을 치니라
20 이스라엘 사람이 나가 베냐민과 싸우려고 전열을 갖추고 기브아에서 그들과 싸우고자 하매
21 베냐민 자손이 기브아에서 나와서 당일에 이스라엘 사람 이만 이천 명을 땅에 엎드러뜨렸으나
22 이스라엘 사람들이 스스로 용기를 내어 첫날 전열을 갖추었던 곳에서 다시 전열을 갖추니라
23 이스라엘 자손이 올라가 여호와 앞에서 저물도록 울며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내가 다시 나아가서 내 형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올라가서 치라 하시니라
24 그 이튿날에 이스라엘 자손이 베냐민 자손을 치러 나아가매
25 베냐민도 그 이튿날에 기브아에서 그들을 치러 나와서 다시 이스라엘 자손 만 팔천 명을 땅에 엎드러뜨렸으니 다 칼을 빼는 자였더라
26 이에 온 이스라엘 자손 모든 백성이 올라가 벧엘에 이르러 울며 거기서 여호와 앞에 앉아서 그 날이 저물도록 금식하고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고
27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물으니라 그 때에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거기 있고
28 아론의 손자인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그 앞에 모시고 섰더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쭈기를 우리가 다시 나아가 내 형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말리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올라가라 내일은 내가 그를 네 손에 넘겨 주리라 하시는지라
사사기 마지막 에피소드를 묵상하고 있는데 어제까지 주인공은 타락한 레위인 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레위인이면서 첩도 들이고 자기 목숨이 위험해지니까 그 첩을 기브아의 불량배들에게 그냥 넘겨 버립니다. 불량배들에게 끔찍한 일을 당하고 첩이 죽자 레위인은 이 첩의 시체를 열 두 조각을 내서 전국에 보내는 엽기적인 일을 저지르고 맙니다. 이 일에 선동되어서 이스라엘 열 한 지파와 베냐민 지파 사이에 어마어마한 규모의 내전이 발발합니다. 그리고서 이 레위인은 역사의 무대에서 슬쩍 사라져버립니다. 오늘 본문부터 이 레위인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사사 시대는 약속의 땅에 이스라엘 백성이 들어가서 그 땅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면서 그 땅을 잘 가꾸면서 살아야 하는 사명을 가진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이 시대가 갈수록 이스라엘 백성은 더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다가 급기야 동족상잔까지 행하고 맙니다. 사사기 최대의 전쟁은 이방인을 향한 전쟁이 아니라 자기들끼리 행한 내전이었습니다. 이런 역설적인 역사는 우리에게 오늘 분명이 보여주는 것이 있습니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 내 앞에 계신데도 내 왕 없다고 불평하면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우리 인간의 삶의 결론이라는 것은 결국엔 점점 더 비참한 타락일 뿐이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사사기를 통해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 현실의 거울이기도 합니다. 사사기 전체의 교훈은 이렇게 끔찍한 아무 소망을 가질 수 없는 죄인인 우리가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 앞에 앉아서 그 인도하심을 받아야 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어떤 상황에서 여호와 앞에 앉아 있을 수 있을까요? 본문을 통해 함께 생각해보겠습니다. 우리는 언제 여호와 앞에 앉을 수 있을까요?
1.답이 있을 때는 아닙니다.
18 이스라엘 자손이 일어나 벧엘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여쭈어 이르되 우리 중에 누가 먼저 올라가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유다가 먼저 갈지니라 하시니라
이스라엘 열 한 지파가 베냐민 지파 치러 가기 전에 하나님께 묻는데 이것은 사사기 첫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1장 1절에 이스라엘 백성이 우리 가운데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울까요?이렇게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2절에 하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유다가 올라가라 하십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잘 물어보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어떻습니까?
19 이스라엘 자손이 아침에 일어나 기브아를 대하여 진을 치니라
20 이스라엘 사람이 나가 베냐민과 싸우려고 전열을 갖추고 기브아에서 그들과 싸우고자 하매
21 베냐민 자손이 기브아에서 나와서 당일에 이스라엘 사람 이만 이천 명을 땅에 엎드러뜨렸으나
전투 결과는 대 참패였습니다. 이스라엘 군대 40만 명 중에 무려 2만 명이 전사했습니다. 40만 대 베냐민 2만 6천 7백 명의 싸움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숫자로 치면 당시에 좋은 무기도 없이 무조건 사람끼리 싸우는 것이니 이스라엘은 질 수도 없었고 지면 안되는 전쟁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전사들이 처음에 전쟁에 나가면서 얼마나 자신만만 했겠습니까. 게다가 하나님께 물어보고 하나님께 답도 얻고 시키는 대로 그대로 했으니까 이 싸움은 당연히 이겨야 되는 싸움이라고 이스라엘은 확신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패배를 당해서 후퇴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패배를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불평하고 억울하고 화가 났을 것입니다. 잘못은 기브아 사람들이 한 것이잖아요. 그리고 그 기브아 사람들을 같은 고향 사람이라고 두둔한 베냐민 족속이 잘못한 것인데 그렇다면 당연히 전쟁도 잘못한 사람이 패배해야 하는데 심판자 역할을 하는 자기들이 패배를 했으니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이 불만과 억울함과 분노가 사인입니다. 무슨 사인인가? 문제는 내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는 표시입니다. 화가 나고 억울하고 불평하고 이런 것들은 다 서로 다른 감정이지만 잘 생각해보면 그 뿌리는 한 가지 입니다. 나의 옳음이 틀림 취급을 받을 때, 내가 옳다고 여기는 것들이 틀렸다고 평가를 받을 때 내가 화가 나고 억울하고 분노하는 것입니다. 내가 확신했던 정답을 오답이라고 하니까 인정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기브아에서 일어난 이 극악무도한 범죄에 대해서 이스라엘 자손은 확실한 해결책을 마련했습니다. 그 끔찍한 악행을 저지른 범인은 처형해야 된다. 그리고 그 불량자들을 두둔한 베냐민 사람들도 벌을 받아야 된다는 것을 확실한 해결책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은 스스로 심판자가 되어서 기브아를 공격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그들에게 정당한 전쟁이고 하나님의 백성을 거룩하게 지키는 거룩한 전쟁, 성전 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물어본 것은 바로 이런 결정 다음입니다. 전쟁하기로 자기들끼리 다 결정해 놓고서 딱 하나, 하나님께 물어봅니다. 누가 먼저 공격할까요? 누가 선봉에 설까요? 중요한 질문 같지만 사실은 누가 먼저 공격해도 큰 차이가 생기지 않는 사소한 일입니다. 가령 이런 것입니다. 자녀가 결혼할 사람, 결혼할 장소, 결혼하고 나서 살 집을 자기들끼리 다 결정해 놓고서 부모님을 찾아 옵니다. 엄마, 아빠 나 결혼해야해요. 이 사람과 할 거고, 어디서 결혼할 거고, 결혼한 다음에 어디서 살 거에요. 그런데 한 가지 물어볼게요. 결혼을 몇 날 몇 일에 하면 좋을까요? 결혼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고 거기에 이르는 과정에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특별히 누구랑 하느냐가 너무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 중요한 것들은 자기들끼리 다 결정해서 답을 정해놓고서는 부모님께 찾아와서 몇 날, 몇 일, 몇 시에 할까요? 이 사소한 것을 물어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는 부모님께 물어봤다. 부모님 허락 다 받았다. 이렇게 외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보다 중요하고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질문해야 했습니다. 가령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 저 기브아 사람들이 정말 입에 담지도 못할 만큼 끔찍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어떻게 해야될까요? 저 베냐민 사람들이 분별하지 못하고 같은 고향 사람이라는 이유로 저들을 두둔하면서 모든 형제의 지파들을 다 대적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될까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스라엘은 이렇게 했어야 합니다. 하나님,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 가운데 이렇게 끔찍한 일이 생겼습니까?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고 우리가 어떻게 주님께 회개해야 되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이 근본적이고 중요한 질문을 하나님께 물어봤어야 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이런 것들 다 자기들이 알아서 결정해 놓고 답을 다 정해 놓고 사소한 문제만 하나님께 여쭙는 겁니다. 이것은 진짜로 하나님께 물어보는 태도가 아닌 것입니다. 그냥 구색만 맞추는 것이고 시늉만 하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 앞에 앉아서 하나님께 질문하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하나님을 자기들 앞에 앉혀 놓는 거만한 선택인 것입니다. 이 거만한 시도가 성공한다면 그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왜요? 하나님이 버린 사람이라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하나님이 선택하신 택자라면 이런 거만한 싸움에서는 지는 것이 맞습니다. 패배해야만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패배를 통해서 자기 스스로 정한 답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답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께 물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내가 이미 답을 다 가지고 있으니 내 가족이건 친구이건 주변의 사람이건 심지어 하나님 조차도 내 답에 대해서 지지해주고 응원해주면 된다 라는 생각이 저절로 우리 마음에 드는 것입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목사가 꿈이었고 교회 바깥에 나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러한 삶이 하나님 앞에 겸손히 앉아 있었던 것인가 물어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중요한 일을 전부 저 혼자 스스로 결정해놓고 답을 다 정해 놓고 하나님, 제가 이렇게 하기로 했으니까 도와주세요. 라고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저는 시험 때마다 하나님, 목사가 되기로 했는데 당연히 공부 잘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저 좀 도와주세요. 공부 잘하게 해주세요. 당연히 공부 잘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렇게 기도하면서 공부하고 학교 가는 것을 다 혼자서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제가 하나님을 무시해서 그런 거라면 회개하기가 조금 더 쉬웠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정말로 하나님을 무시해서 그런게 아니었습니다. 저라도 하나님 속을 썩이지 말고 열심히 잘해드려야 하나님을 도와드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나님이 이 많은 사람들의 기도를 듣느라고 너무 바쁘신데 어떻게 나까지 하나님의 어깨를 무겁게 해드릴 수 있는가. 나라도 잘해서 하나님을 도와드려야 하진 않나. 너무 거만하죠? 그래서 저는 학교와 전공와 심지어 사역지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인 결혼조차 저 혼자 알아서 다 결정하고 답을 가지고 밀어부쳤습니다. 여호와 앞에 앉아서 간절히 묻지 않았습니다. 제가 학교에서는 그래도 답을 잘 맞췄습니다. 수학 주관식 분수가 답인 문제를 8/3을 찍었는데 맞췄습니다. 그것도 숫자로 계산하는 산술 문제가 아니라 도형을 계산해서 푸는 기하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답을 좀 맞추다 보니까 점점 제가 답을 안다는 착각에 빠졌습니다. 내가 제일 잘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중요한 결혼도 처음 아내를 소개팅으로 만난 그 날 저 혼자 답을 냈습니다. 이 사람과 결혼해야 되겠다고. 이미 결혼하는 것이 답이 되었으면 그 후의 모든 과정과 시간과 에너지는 제게 다 낭비인 것이었습니다. 정답이니까 오늘 결정했으면 내일 해도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막 서둘렀습니다. 그런데 길지 않은 석 달 동안의 교제 기간 동안 주변의 가까운 분들과 처가 본가의 가족들이 다 많이 반대하셨습니다. 저를 알고 아내를 아는 분들은 이 두사람이 결혼하면 너무 힘들겠구나, 너무 많은 값을 치루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연애하는 동안에도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징조를 계속해서 주셨습니다. 아니다, 힘들다, 하지마라, 징조를 계속 주셨는데 저는 답이 하나님께 있지 않고 제 안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답을 가지고 있으니 주변 사람들의 말을 다 무시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그 징조도 다 무시했습니다. 그래서 치뤄야될 값은 너무도 무거운 것이었습니다. 제가 맘대로 결정한 이 결혼이 제 뜻대로 술술 풀렸다면 아내가 제 예상대로 잘 움직여주었다면 제가 원하는 대로 가정생활이 다 이루어졌다면 저는 지금쯤 가장 잘되어봐야 여러분 인생은 참 행복한 겁니다. 이렇게 떠들고 다녔을 것입니다. 구원과는 전혀 상관 없는 삶을 살고 있었을 겁니다. 그래도 주님께서 거만하고 교만하고 자격 없는 저를 불쌍히 여기셔서 은혜로 택해주시고 불러주셨기 때문에 결혼을 통해서 큰 패배를 당하게 하시고 그밖에 가족들과의 관계에서 또 사역의 현장에서 크고 작은 실패와 좌절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제가 맞다고 여기던 그 답들이 오답이고 이제는 제가 생각한 답이 아니라 100% 옳으신 하나님의 뜻대로 저의 가정과 사역도 조금씩 흘러가게 하신다고 고백합니다. 지금 절대로 틀림 없다고 확신하는 답을 가지고 계신 분이 혹시 계십니까? 그래서 하나님 앞에 앉기보다는 하나님을 앞에 앉혀 놓고서 하나님 이게 맞잖아요 하면서 하나님을 판단하고 계시는 분 혹시 있지 않습니까? 오늘 그 답을 잠시 괄호 안에 넣어두시고 하나님께 물어보십시다. 큐티하시면서 말씀으로 물어보시고 또 목장에 물어보세요. 그것이 하나님을 내 앞에 앉히려는 이 거만함과 교만을 버리고 겸손히 하나님 앞에 앉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인 줄 믿습니다.
적용 질문
-내 인생의 답이 될 것 같아 얻고 싶은 것을 무엇입니까?
-예상과 달리 당한 실패나 패배가 있습니까? 그 일이 이해가 안 됩니까, 잘 됩니까?
2.힘이 있을 때도 아닙니다.
22 이스라엘 사람들이 스스로 용기를 내어 첫날 전열을 갖추었던 곳에서 다시 전열을 갖추니라
23 이스라엘 자손이 올라가 여호와 앞에서 저물도록 울며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내가 다시 나아가서 내 형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올라가서 치라 하시니라
이스라엘 백성은 큰 패배를 당했지만 곧 스스로 용기를 내어 회복합니다. 원어를 그대로 번역하면 스스로 강하게 했다, 스스로 힘을 냈다는 뜻입니다. 2만2천 명이나 죽었지만 아직 3십 7칠만 8천 명이나 남았습니다. 2만6천7백 명에 불과한 베냐민 군대보다 아직도 무려 14배나 많은 군대가 나의 손에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크게 졌어도 여전히 압도적인 힘이 있기 때문에 그 패배 쯤은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자기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엄청난 패배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같은 장소에 가서 다시 그곳에다가 전열을 갖추고 싸울 준비를 합니다. 한 번 졌지 두 번은 지지 않는다는 자신감과 용기가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 앞에 올라가는 것은 이번에도 그 다음입니다. 이렇게 싸울 준비 다 해놓고 전열을 다 갖춰논 다음에 비로소 올라갑니다. 거기서 날이 저물도록 울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회개의 눈물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스스로 회복하고 극복할 힘이 있는 사람이 어떻게 여호와 앞에 하루 종일 앉아서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흘리는 눈물은 인정할 수 없는, 이해할 수 없는 이 패배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의 분노와 서러움의 눈물입니다. 애통한 눈물이 아니라 비장한 눈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이스라엘 백성이 비장하게 굽니다. 내가 다시 나아가서 내 형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싸우겠다는 뜻입니다. 첫번째 질문에서 묻지 않았던 싸울까요 하고 물어본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저희가 싸우는 게 맞습니까 하고 물어보려 했다면 패배하자마자 같은 곳에 가서 전열을 갖추었겠습니까? 싸울 준비를 했었겠어요? 패배한 채로 그대로 나와서 물어봤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싸울 준비 다 해놓고 그 후에야 하나님 앞에 와서 다시 싸울까요? 묻는 것은 정말 몰라서 묻는 게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 우리는 다시 싸울거에요. 우리는 아직 3십7만8천 명이 있습니다. 힘이 있습니다. 우리 다시 도전할거에요. 우리 하던 대로 계속할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여기다 사인만 하세요. 결정 우리가 다했고 우리가 생각한 것이 맞으니까 하나님은 동의만 하시면 됩니다 라고 하나님께 요청하는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은 이번에도 올라가서 치라 이렇게 간단하게 답하십니다. 앞서 첫번째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경우에 딱 맞는 답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자식이 묻는 만큼 답을 해주는 것과 같이 우리 하나님도 우리가 간절한 만큼 우리가 큐티로 주님의 뜻을 묻는 만큼 하나님도 거기에 맞는 답으로 우리에게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의 질문이 딱 이 수준이니까, 하나님은 올라가서 치라, 번역하면 너네 마음대로 해봐 그냥 허락하시는 겁니다. 질문 아닌 질문에 답 아닌 답을 주실 뿐입니다. 그래서 결국 어떤 결과가 나옵니까?
24 그 이튿날에 이스라엘 자손이 베냐민 자손을 치러 나아가매
25 베냐민도 그 이튿날에 기브아에서 그들을 치러 나와서 다시 이스라엘 자손 만 팔천 명을 땅에 엎드러뜨렸으니 다 칼을 빼는 자였더라
이스라엘은 전사 만 팔천 명을 또다시 잃어버립니다. 이번에는 조금 힘이 빠졌을 것 같습니다. 왜냐면 두 차례 모두 예상하지 않았던 패배를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40만 명 중에 4만 명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10%를 날려버린 겁니다. 피해를 감수할 힘이 남았다고 자신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진심으로 구하지 않은 그 악에 대한 결론인 것입니다. 우리는 잘못된 길에서 결코 스스로 돌이킬 수 없습니다. 생각해 보시면 힘이 있을 수록 더 자기가 가던 길에서 돌이키기가 어렵습니다. 힘이 좀 빠져야 그나마 두려운 게 생기고 그나마 눈치 볼게 생겨서 내가 열심히 가던 길에서 어쩔 수없이 멈추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멈췄을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에게는 힘이 빠지는 엄청난 힘든 고난도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힘 빠지는 사건이 올 때 어떻게 해야 될까요? 더 빠지지 않으려고 용을 쓰면서 조금이라도 더 남기려고 몸부림쳐야 될까요? 물론 그래야 될 때도 있겠지만 정말 이것이 나의 악을 보게 하시고 나의 육을 무너뜨리셔서 영을 세우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손길임을 말씀으로 인도함을 받는다면 힘 빠지는 사건이 올 때 힘을 더 빼야하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자리를 딱 잡고 주님 앞에서만 앉아 계시기를 바랍니다.
적용 질문
-내가 의지하는 세상적인 힘은 무엇입니까?
-실패했는데도 스스로 용기를 내어 도전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까?
-힘이 빠져서 어쩔 수 없이 머무르다가 오히려 누리게 된 은혜의 선물은 무엇입니까?
3.울며 회개할 때입니다.
26 이에 온 이스라엘 자손 모든 백성이 올라가 벧엘에 이르러 울며 거기서 여호와 앞에 앉아서 그 날이 저물도록 금식하고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고
이스라엘 자손이 세 번째로 하나님 앞에 올라가는데 이번에는 특이한 점이 온 이스라엘 모든 백성이 올라갔다고 기록합니다. 앞의 두 경우는 온, 모든 이란 말이 없습니다. 지금까지는 그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 올라간 게 아닙니다. 올라가고 싶은 사람 올라가고 올라가고 싶지 않은 사람 올라가지 않아도 됩니다. 아마 이렇게 광고했던 것 같습니다. 일부만 올라갔습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가 어떤지 딱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그들은 그렇게 간절하지 않았습니다. 왜요? 답이 있으니까... 힘이 있으니까... 남아 있는 힘이 있으니까 하나님 앞에 내가 반드시 올라가겠다는 간절함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정답이라고 믿었던 자기들이 세운 답이 무효처리 되고 또 자기들이 의지하던 40만 명이나 되는 힘이 제거되는 것을 보니까 이제 비로소 하나님을 찾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서야 멋대로 결정하던 것, 맘대로 준비하던 것을 멈춥니다. 그리고는 온 백성 모두가 그저 하나님 앞으로 올라옵니다. 패배하고 실패한 모습 그대로 모든 수치를 안은 그대로 하나님 앞에 올라오는 것입니다. 그러자 드디어 회개의 눈물을 터뜨립니다. 앞에서도 울긴 했지만 그것은 자기 연민의 눈물이었습니다. 이 자기 연민의 서러움의 눈물을 흘릴 때는 울면서 하나님한테 동시에 물었습니다. 다시 싸울까요? 엉엉 울면서 하나님 이거 다시 싸워야 되는 일 아니에요? 하나님 그러니까 이기게 해주셔야 되는 것 아니에요? 하나님 나에게 힘을 주셔야 되는 것 아니에요? 하며 하나님께 요구하고 떼를 씁니다. 하지만 삶이 다 무너져서 이제 부끄러운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니까 그제서야 내 죄가, 내 잘못이 보이게 되고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너무 죄송하고 그러니까 나 같은 죄인을 그래도 하나님께서 오게 해주시고 벧엘에 내가 앉을 자리를 남겨두신, 내가 앉을 의자를 빼지 않고 기다려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하고 감격해서 울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회개의 눈물을 흘리니 어떻게 합니까? 더이상 조르지 않습니다. 날이 새도록 다 울고 하나님 앞에 그냥 앉아 있습니다. 울면서 날이 새도록 앉아 있는 것입니다. 말 없이 앉아있는 것입니다. 앉는 다는 것은 가던 일을 멈춰야 할 수 있습니다. 하던 일을 멈추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데나 앉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그 자리에 정해진 그 의자에 머무는 것입니다. 내 답 주장하던 일을 멈추고 내 힘 행사하던 것을 멈추고 주님 말씀해 주세요 듣겠습니다. 이렇게 주님 말씀 들으려고 주님 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먹는 것조차 끊고 금식합니다. 이것은 우리 생명을 위해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먹는 것조차 내가 하나님 앞에서 멈추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겠다는 마음의 표현인 것입니다.
이렇게 하니까 예배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렸다고 합니다. 사사기 처음부터 끝까지 대략 3백 50년 정도 됩니다. 이 기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이 수많은 압박과 압제와 폭력을 당했지만 하나님 앞에 이렇게 전적으로 울면서 회개하면서 예배를 드렸다는 기록은 여기가 유일합니다. 그렇게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예배 드리는 것, 영과 진리로 하나님 앞에 예배 드리는 것은 저절로, 형식적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와 예배가 없으면 멀쩡해 보이는 삶도 사사시대처럼 영적인 암흑기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겨우겨우 진정한 예배를 드리자 어떤 변화가 생깁니까? 질문이 바뀝니다.
27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물으니라 그 때에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거기 있고
28 아론의 손자인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그 앞에 모시고 섰더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쭈기를 우리가 다시 나아가 내 형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말리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올라가라 내일은 내가 그를 네 손에 넘겨 주리라 하시는지라
싸울지 말지에 대해서 첫 번째 자기들이 답이 있을 때는 하나님께 묻지도 않았습니다. 두 번째 자기들의 힘이 있을 때는 어떻게 물었습니까? 싸울까요 하고 하나님께 결제만 요청했습니다. 통보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울면서 회개하니까 어떻게 물어봅니까? 싸우리이까, 말리이까. 말리이까가 너무 중요합니다. 말리이까는 멈출까요 묻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싸울까요 아니면 멈출까요 입니다. 두 번째는 멈출까요 묻지 않았습니다. 멈출 생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육이 다 무너지는 참패를 두 번이나 겪으면서 하나님 앞에 눈물로 회개하고 예배를 회복하니까 하나님께 질문이 바뀌는데 싸울까요 하고 하나님께 통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싸우는 게 맞을까요, 아니면 여기서 멈추는 게 맞을까요? 합니다. 말리이까가 너무 중요합니다. 우리는 할까요 라는 질문은 그래도 말씀 묵상하는 큐티 인들이시니까 적용을 늘 생각하시잖아요? 하나님, 제가 남편에게 어떻게 할까요? 자식에게 이렇게 할까요? 부모에게 이렇게 할까요? 교회의 사역에서 이렇게 할까요? 이런 질문을 사실 우리가 던지는 게 익숙합니다. 그러나 하나 더 생각해야 하는 질문은 하나님, 제가 열심히 하고 있는 일이 있는데 이것을 계속하는 게 맞을까요? 멈춰야 하지 않을까요? 어떻게 인도하시는 게 하나님의 뜻입니까? 이것을 물어보는 것은 잘 되지 않습니다. 저희 같은 사역자가 하는 일은 다 사역으로 포장할 수 있기에 제가 하고 있는 것에 대해 멈출까요 라는 생각을 잘 하게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설교 준비하며 이 구절을 보니 말리이까 생각하는 것이 정말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전적인 죄인이기 때문에 사명을 감당하다가도 거기에 내 야망이 들어가고 거기에 내 욕심이 들어가고 거기에 내 정욕이 깔립니다. 죄의 공장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새로 서서 하나님 하리이까 말리이까 하는 질문을 계속 던져야 할 것 같습니다. 이번 주 만이라도 말리이까 질문하시며 큐티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이 질문을 제대로 하며 하나님의 뜻에 맡기자 하나님께서 승리를 약속하십니다. 답을 하나님께 맡기니까 하나님도 진짜 답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엽기적인 사건이 사사기 맨 마지막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사시대 마지막에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암흑기에 죄악이 계속해서 쌓이니까 엽기적인 사건도 일어나고 내전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반전이 있습니다. 이 때 이 언약궤 앞에서 언약궤를 지키고 있던 제사장이 누구입니까? 아론의 증손자 비느하스 입니다. 모세와 여호수아의 얼굴을 본 사람입니다. 즉 이 사건은 사사시대 말기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사사시대 초기에 첫 사사인 옷니엘이 세워진 그 무렵에 일어난 일 이라는 것입니다. 사사기 전체에서 가장 끔찍한 범죄와 동족상잔의 내전이 사사시대 한참 뒤가 아니라 초반에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바로 앞의 17-18장의 타락한 레위인은 바로 모세의 증손자입니다. 엄청난 사사기의 대미를 장식하는 말도 안되는 사건의 중심에 누가 있느냐, 그냥 레위인도 아니고 레위인 중의 레위인, 레위인 중의 가장 성골인 모세의 증손자와 아론의 증손자가 이 엄청난 사건의 한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이 뜻이 무엇일까요? 예외가 없다는 겁니다. 장담할 수 있는 인생이 없습니다. 목사님이 늘 말씀하시는 것처럼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닌 겁니다. 혈통이나 배경이나 조건이 우리를 지켜줄 수 없습니다. 열 한 지파에서 40만 명이나 참전하는 어마어마한 내전을 일으킨, 선동한 사람이 누구냐면 바로 첩의 시체를 열 두 조각 내서 전국으로 뿌린 엽기적인 일을 벌인 레위인 이었는데 위대한 장군 바락도 동원한 군사가 만 명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이 레위인이 전국을 다 흔들어 놓는 겁니다. 한 사람의 죄를 가리기 위해서... 아모리나 미디안이나 블레셋 같이 어마어마한 강력한 가나안 인과 싸울 때도 이스라엘이 40만 명을 동원한 적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 정말로 무서운 싸움이 가족끼리의 싸움입니다. 영적인 가족인 교회에서 일어나는 싸움입니다. 그리고 동족인 나라에서 일어나는 싸움입니다. 그리고 그 싸움의 주범은 레위인 같은 지도자라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 인생은 절망할 것 밖에 없습니다.
사사시대가 진행되면서 점점 악해지는 것도 물론이겠지만 양적이든 질적이든 그런 비교는 사실 의미가 없습니다. 누구 잘못이 더 큰지 어느 시대가 더 악한지 따지는 것은 전부 행위 중심적인 겁니다. 율법적인 것입니다. 구속사 적으로 보면 모든 시대가 전적으로 타락한 시대이고 모든 인간이 100% 죄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인생의 답을 얻을 수 없는 것이고 아무리 수고하고 애써도 나 하나 구원할 힘을 가질 수 없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방황만 하다가 지쳐서 죽음에 이를 따름입니다. 밑동 잘린 나무 처럼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우리의 인생인데 이 인생을 오직 하나님 앞에 맡길 때, 하나님 앞에 앉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거기에 거할 때 진정한 평강과 안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앉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앉는 것의 반대는 무엇일까요? 사사기를 큰 종이에 1장부터 21장까지 써서 반으로 접으면 여호와 앞에 앉아서 라는 구절인 20장 26절과 만나는 구절은 2장 12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여호와를 버렸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중간에 접히는 부분은 10장 10-16절 단락입니다. 이 단락에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 하나님을 버렸다라는 구절이 두 번이나 반복됩니다. 그것을 본인들이 고백하기도 하고 하나님이 진단하기도 하십니다. 그런데 너무 하나님을 버린 대가를 치루다 보니까 후회가 되어 하나님께 다시는 안 그럴게요 하면서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섬기니까 하나님이 고민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다시 보낸 사사가 입다입니다. 그러니까 사사기 저자가 재미있는 익살을 섞어서까지 우리에게 전하려는 뜻은 우리는 소망이 없는 인생이기 때문에 우리가 답을 가지고 살면 안되고 우리 힘으로 살아도 안되고 여호와 앞에 앉아서 살아가야 되는데 우리 힘으로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의 모습은 언제나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을 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사사기 가장 가운데에까지 두 번이나 그것을 써놓았습니다. 너희들은 하나님을 버릴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그것이 너희의 실체이다. 그래서 우리 인생에는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건져주셔야 하니 사사를 보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사가 우리를 구해 줄 것 같지만 사사들의 면면을 보면 제대로 된 지도자가 없고 다 부족하고 연약하고 망가진 가운데 있는인생일 뿐입니다. 기대할 게 없고 소망이 없습니다. 지도자로 보내주셨는데도 약점 투성이인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절망 밖에 할 게 없는 인생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분명한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그 사사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연약한 이 사사, 부족한 저 사사가 아니라 유일한 그 사사가 우리 가운데 계신데 그 사사가 누구실까요? 바로 하나님 이십니다. 사사기 11:27에 그 사사 라는 단어가 딱 한 번 등장합니다. 우리말에는 심판하시는 여호와라고 번역되었는데 히브리어로 그대로 보면 야훼 하쇼페트 입니다. 그 사사 여호와. 이 사사에 실망하고 저 사사에 실망해서 하나님이 사사를 보내주셔도 나의 삶은 안되는구나 내가 우리들 교회에 왔는데도 가정을 지킬 수가 없구나. 내가 목장 예배를 그렇게 나가는데도 내 아내도 안 변하고 내 남편도 안 변하고 나도 안 변하고 내 인생이 망하는 것을 피할 수가 없구나 하면서 절망하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내가 그 사사다 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유일한 사사가 되시는 줄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스스로 나아가서 앉을 수 없기 때문에 그 사사 되신 하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가 언제든지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신 줄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앉는 것은 무엇입니까? 날마다 큐티하는 것, 날마다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날마다 공예배를 지키며 드리는 것이고 날마다 목장 예배에서 나누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 앞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생활예배에서 맡기신 우리 삶의 자리들을 정말 충성되게 지키는 작은 하나, 남편의 자리를 지키고 아내의 자리를 지키고 부모의 자리를 지키고 자식의 자리를 지키는 그 작지만 어려운 하나가 바로 여호와 앞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도저히 끝낼 수 없는 이 방황을 주님께서 끝내셨기 때문에 우리 또한 오늘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여호와 앞에 앉아서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순종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적용 질문
-내가 하나님을 버릴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100% 인정합니까?
-지금 어디에 앉아 있습니까? 나의 왕좌입니까? 우상 앞입니까? 여호와 앞입니까?
한 성도님은 어려서부터 교회에 나갔는데 믿음이 있어서가 아니라 어머님이 너무 무서우셨기 때문이랍니다. 커서 결혼했는데 외도로 이혼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 사실을 안 어머니가 너무 화가 나서 혼을 내시겠다고 해서 잔뜩 겁을 먹고 있었는데 딱 한 마디 하신 말씀이 우리들 교회로 와라 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들 교회로 왔고 이혼이 막아졌고 가정이 지켜졌습니다. 최근에 이 어머니께서 천국 가셔서 장례 예배를 드렸는데 자녀들이 다 예수를 믿었는데 이상하게 가족 간에 분위기가 좋아 보이지 않았답니다. 그 날 큐티 본문이 어머니의 은 백 개를 훔친 미가에 관한 말씀이었는데 장례 인도하신 목사님이 그 가정에 돈에 대한 갈등이 있다는 말을 들어서 장례 후에는 가족끼리 다시 안 볼수도 있겠구나 걱정되어서 하관 예배를 마치고 가족끼리 나눌 수 있는 시간을 아주 오래 드렸답니다. 처음에는 가족들 표정이 너무 안좋았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괜히 나눔 시켰나 하며 걱정되고 긴장되었는데 나누다 보니까 암투병 중이신 한 가족이 고백했다는 겁니다. 자기가 사업을 위해 대출 받는 과정에서 가족들에게 많은 상처를 준 것을 고백하며 회개하며 용서를 구하자 다른 형제들도 그동안 섭섭했던 마음을 다 털어놓으며 화해를 청하는 나눔을 이어갔다고 합니다. 걱정 가득 시작한 나눔 이었지만 가족들 안에 오랫 동안 쌓였던 깊은 골이 채워지는 시간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거기에 유독 눈물을 많이 흘리던 한 분이 계셔서 가족인 줄 알고 나눔을 부탁드렸는데 가족이 아니고 지인인데 교회도 안 다니고 믿는 분도 아닌데 가족들의 나눔을 들으면서 그 이야기가 모두 자기 얘기 같아서 눈물을 주체할 수 없다고 도대체 이렇게 어마어마한 나눔을 하게하는 이 교회는 정말 대단한 교회 같다고 나도 이제부터 교회 다니겠다고 약속했다고 합니다. 천국 가신 어머니를 비롯해서 모든 유가족들이 힘든 자리였겠지만 각자 자리에 앉아서 주님의 말씀으로 나누고 회개하면서 화해한 것이 여호와 앞에 앉아 있는 모습입니다. 그렇게 하다보니까 전혀 생각지 않았던 한 영혼이 여호와 앞에 나오기로 결단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앞으로도 구원의 사명 더 많이 감당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에게 답이 있을 때는 여호와 앞에 도저히 앉을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에게 힘이 있을 때도 그렇습니다. 오직 우리의 답이 없어지고 우리의 힘이 사라져서 내 삶의 절망에서 울 수밖에 없을 때 그래서 주님 앞에 나아와서 회개하게 될 때 여호와 앞에 앉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울면서 회개하는 것이 여호와 앞에 앉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에서 내가 정답이라고 믿었던 답들이 오답이 되는 사건을 만나고 내가 의지하는 힘이 다 빠지는 고난을 당하면서 우리의 육이 무너지면 그것이 곧 축복인 줄 믿습니다. 내가 스스로 왕이 되어서 내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려는 나의 교만을 회개하면서 오늘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시고 유일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유일한 왕으로 모시는 주님의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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