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16:15-31
15 들릴라가 삼손에게 이르되 당신의 마음이 내게 있지 아니하면서 당신이 어찌 나를 사랑한다 하느냐 당신이 이로써 세 번이나 나를 희롱하고 당신의 큰 힘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생기는지를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도다 하며
16 날마다 그 말로 그를 재촉하여 조르매 삼손의 마음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라
17 삼손이 진심을 드러내어 그에게 이르되 내 머리 위에는 삭도를 대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내가 모태에서부터 하나님의 나실인이 되었음이라 만일 내 머리가 밀리면 내 힘이 내게서 떠나고 나는 약해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 하니라
18 들릴라가 삼손이 진심을 다 알려 주므로 사람을 보내어 블레셋 사람들의 방백들을 불러 이르되 삼손이 내게 진심을 알려 주었으니 이제 한 번만 올라오라 하니 블레셋 방백들이 손에 은을 가지고 그 여인에게로 올라오니라
19 들릴라가 삼손에게 자기 무릎을 베고 자게 하고 사람을 불러 그의 머리털 일곱 가닥을 밀고 괴롭게 하여 본즉 그의 힘이 없어졌더라
20 들릴라가 이르되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들이닥쳤느니라 하니 삼손이 잠을 깨며 이르기를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21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붙잡아 그의 눈을 빼고 끌고 가사에 내려가 놋 줄로 매고 그에게 옥에서 맷돌을 돌리게 하였더라
22 그의 머리털이 밀린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
23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이르되 우리의 신이 우리 원수 삼손을 우리 손에 넘겨 주었다 하고 다 모여 그들의 신 다곤에게 큰 제사를 드리고 즐거워하고
24 백성들도 삼손을 보았으므로 이르되 우리의 땅을 망쳐 놓고 우리의 많은 사람을 죽인 원수를 우리의 신이 우리 손에 넘겨 주었다 하고 자기들의 신을 찬양하며
25 그들의 마음이 즐거울 때에 이르되 삼손을 불러다가 우리를 위하여 재주를 부리게 하자 하고 옥에서 삼손을 불러내매 삼손이 그들을 위하여 재주를 부리니라 그들이 삼손을 두 기둥 사이에 세웠더니
26 삼손이 자기 손을 붙든 소년에게 이르되 나에게 이 집을 버틴 기둥을 찾아 그것을 의지하게 하라 하니라
27 그 집에는 남녀가 가득하니 블레셋 모든 방백들도 거기에 있고 지붕에 있는 남녀도 삼천 명 가량이라 다 삼손이 재주 부리는 것을 보더라
28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하고
29 삼손이 집을 버틴 두 기둥 가운데 하나는 왼손으로 하나는 오른손으로 껴 의지하고
30 삼손이 이르되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하고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매 그 집이 곧 무너져 그 안에 있는 모든 방백들과 온 백성에게 덮이니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
31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다 내려가서 그의 시체를 가지고 올라가서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그의 아버지 마노아의 장지에 장사하니라 삼손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이십 년 동안 지냈더라
큐티하는 우리들교회 성도님들을 보니 뷰티해보이시고 부티나 보이십니다.^^ 뷰티라는 영어 단어에 '티'가 있는데 아무리 잘나고 돈 많아도 티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제가 깨달은 것은 하나님이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큐" 하실 때 '티'없이 사는 게 큐티라고 정의를 했습니다. 그리고 사는 동안 예수님이 구원자라고 티내며 사셔야 합니다. 이것이 큐티하는 교회와 성도의 삶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티 없이 사는 것은 우리 힘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 보셔야죠, 기도하셔야죠, 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 힘 받아야 살고 그 힘으로 살아내야 견딜 수 있고 버틸 수 있는 것이 우리 삶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그 힘을 잃어버린 삼손의 모습을 보게 되고 또 그 힘을 다시 얻어 살아내는 삼손의 모습을 통해 반면교사와 진면교사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왜 삼손은 먼저 힘을 잃었습니까? 세상에 밀려 삭발을 당할 수밖에 없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1.세상에 떠밀리면 밀립니다.
19 들릴라가 삼손에게 자기 무릎을 베고 자게 하고 사람을 불러 그의 머리털 일곱 가닥을 밀고 괴롭게 하여 본즉 그의 힘이 없어졌더라
삼손은 오랫 동안 아이가 없던 마노아의 가정에 천사가 하나님의 은혜로 자녀를 가지게 된다는 축복의 메세지를 전함으로 태어난 수퍼 히어로입니다. 태어난 순간 성경에서 읽은 대로 그는 나실인으로 선택 받습니다. 민수기 6장에 보면 나실인이 지켜야 할 3가지 규약이 있습니다. 첫째는 포도주나 독주나 포도의 소산물을 전혀 입에 대지 않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죽은 시체를 가까이 할 수 없습니다. 세째는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는 것입니다. 머리카락을 평생 자르지 않고 인생을 살아가야 되는 부르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보면 세속에 물들지 않고 세상과 구별되어 살라는 부르심이 바로 나실인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런데 나실인의 부르심은 일반적으로 서원을 통해 결정됩니다. 하나님의 선택이 아니고 '내가 한 달, 혹은 일주일 동안 나실인으로 살겠습니다.' 하면 고난 주간에 세상의 문화나 유투브를 안하겠습니다 하는 것처럼 한시적이기 때문에 버틸 수 있는데 평생이라면 쉬운 얘기가 아닌 것입니다.
한국에 와보니 먹고 싶은 유혹을 받는 게 너무 많습니다. 그리고 한국에 오니까 밖에 나갈 때 얼굴과 옷부터 신경써야 합니다. 그냥 나가면 안됩니다. 또 너무 새로운 것이 많습니다. 다 만져보고 싶습니다. 그런 세상의 문화와 구별되어 산다는 것이 쉽습니까, 어렵습니까?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삼손도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뭔가 좀 잘못하면 '너 나실인이야'하고 좀 잘못 살면 '너 크리스찬이지? 아버지가 목사라며? 장로님이라며? 권사님이라며? 너 이러면 돼? 모태신앙이라며?' 하는 말듣고 힘들어 하는 사람 많지 않습니까? 어렸을 때부터 다른 아이와 다른 이런 부르심 때문에 애 어른, 성인 아이가 되는 것입니다. 행하는 게 아니고 행세하게 됩니다. 사람의 시선에 체면으로 행세하게 되니까 나실인의 규약 3가지에 대해서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적응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도 큐티의 적용보다는 적응하고 있지 않습니까? 큐티를 안하면 우리들교회에서 살아 남지 못하니까 적응하고 있는 거죠.
나실인으로 사는 것에 대한 말씀 대로 적용이 안되니까 삼손은 눈이 보는 대로, 가는 대로 적응합니다. 자신의 삶의 해방군을 딤나 여인 가사 여인 들릴라 같은 여인의 탐닉과 중독에 빠져서 자기 안에 있는 삶의 어려움들, 스트레스를 날려 버리려고 했습니다. 현실도피 현상이 이렇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스트레스 받으면 내가 찾는 것이, 내가 자주 가는 곳이, 내가 자주 생각하는 그것이 바로 내 영혼의 현주소입니다. 하나님이면 너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면 그것이 나의 우상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바라보는 것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됩니다. 특히 남자분들은 보는 것에 약합니다. 보는 것에 따라 살기 쉽습니다. 그래서 젊었을 때는 예쁜 자매를 만나 결혼하길 원합니다. 저도 제 아내를 보는 순간 가슴이 심쿵해서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나이가 들면 아내를 봐도 가슴이 뛰지 않는다고 하는데 저는 아직도 아내를 볼 때마다 가슴이 뜁니다. 믿지 않으시는 표정들이신데... 요사이 가슴이 더 뜁니다. 아내가 저보고 "여보, 저 좀 봐요" 하면 가슴이 더 뜁니다. 이 번주에도 큐티를 하는데 "여보, 삼손이 나귀 턱뼈로 사람을 천 명 죽인 것을 어떻게 생각해요?"하고 질문하니까 약간 당황하며 제가 "당신 말에 뼈가 있네"했습니다. 그렇게 큐티를 하며 아내의 뼈골 때리는 말을 받아넘기며 큐티를 나누었습니다.^^ 지금도 불꽃 같은 눈동자로 저 자리에 임재해 계시긴 합니다. ^^ 그래서 심장이 뛰다 못해 갑자기 멈추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남성만 가슴이 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한국에 와서 알았습니다. 여성분들도 가슴 뛰는 일들이 많더라구요. 호주에서 백화점은 필요한 것을 사러 가는 곳인데 한국에서 백화점은 많은 여성들에게는 그냥 가는 곳입니다. 가다가보면 우상 보다도 강력한 신상의 임재 앞에 지름신이 임해서 카드를 확 질러버리더군요. 훨씬 더 강력한 세력이 있더라구요. 이것도 저것도 가슴 뛸 일이 없는데 가슴이 뛰는 분들은 빨리 병원에 가셔야 합니다.
이렇듯 누구나 아담의 자손으로 보암직 하다고 하는 안목의 정욕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연약성입니다. 처음부터 삼손이 안목의 정욕에 휩쓸려 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내가 크리스찬이고 모태 신앙인데 처음부터 죄 짓고 살겠습니까? 하나님 없이 살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서서히 침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위험한 것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넘어지는 것입니다. 포도밭에 갔구요, 포도주를 마시기 시작했구요, 사자를 죽인 시체를 만졌구요, 그것에서 꿀을 채취해서 부모님에게까지 갖다드렸습니다. 부모님은 잘했다고 칭찬했겠죠. 그는 이미 여인들을 만나기 전부터 나실인의 서약을 한 가지, 두 가지 점점 깨고 있었습니다. 헌신이라고 하는 것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하나님 말씀 대로 살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보다 믿는 구석이 하나 있으니까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가 가진 power, 힘입니다. 그 에너지, 본인의 주먹을 믿은 것입니다. 돈이든 힘이든 뭔가 백있는 사람들, 믿는 구석이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삼손이 그랬습니다. 자신의 힘, 한 방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나실인 삼손에게 한 방이 있으니까 우월감을 갖습니다. 그 때 자기 마음대로 못사는데 마음대로 결혼하는 이방인을 보면서 이것이 열등감으로 작용한 것입니다. 이런 열등감이 크리스찬 안에도 적잖이 있습니다. 예수 믿어 좋지만 돈, 명예, 권세가 없어 열등감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닌 것처럼 앉아 계시지만 3분 중 한 분은 다 이 열등감 속에 힘들어 하는 것을 목회 여정 속에 알게 되었습니다. 적잖은 크리스찬들이 열등감에서 벗어나고자 하나님이 인생 한 방을 터뜨려 주시길 기대하는 마음으로 날마다 현실에서 성경을 봅니다. 지겹고 힘들 때도 큐티하시고 주일 예배도 드리시고 봉사도 하시고 목장도 하시고 큐페도 가시고 띵크 트립도 가시고 뭔가 한 방이 터져야 하는데 밋밋한 크리스찬의 삶을 답답해하진 않으십니까? 중고등부 시절에는 부모님의 등살에 떠밀려 교회에 가지만 청년이 되고나면 성인이 되어 대학 문화에 휩쓸리고 술 문화에 빠져버리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세상 속에 자기를 노출하게 됨으로써 많은 청년들이 대학을 가고 나서 교회를 떠나는 것이 이민교회 가운데 많이 있습니다. 이것을 일명 조용한 탈출이라고 합니다. 직장에 가면 어떻습니까? 각종 회식, 음주가무, 돈과 성공의 한 방을 노리다가 우상의 덧에 걸린지도 모르고 서서히 무너져가는 크리스찬들, 나중에는 교회를 안 나오고 하나님을 떠난 모습들을 종종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 삶에도 이런 일이 찾아 올 수 있습니다. 삼손은 바로 그 날이 자기에게 다가와 덫에 걸립니다. 자신이 사랑헸던 들릴라가 삼손을 돈 받고 넘깁니다. 힘의 비밀을 캐내려고 3번이난 시도한 것을 이 여인은 압니다. 강력한 여인의 방법은 재촉하고 조르고 눈물로 호소했을 것입니다. 마음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까지 코너로 삼손을 몰아갑니다. 이런 여인과 산다는 것 자체가 고통입니다. 이것을 보면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사탄은 들릴라와 같습니다. 굉장히 집요합니다. 포기할 줄 모릅니다. 끈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넘어뜨릴 때 다양한 방법이 아니라 똑같은 방법으로 넘어뜨립니다. 우리도 똑같은 방식으로 넘어집니다. 이게 여러분 안에 있는 영적 문이 열서 그런 것입니다. 삼손이 영적으로 견디고 버틸 힘이 있었다면 내면의 영적인 힘이 세워졌어야 했는데 겉만 화려하고 내면은 허했습니다. 영적인 힘이 밀리니 자는 동안 머리털이 밀리고 하나님 나라의 선발로 선출되었지만 그의 머리는 삭발되는 비참한 모습이 되었습니다. 그 순간에 어떻게 된다고 합니까?
20 들릴라가 이르되 삼손이여 블레셋 사람이 당신에게 들이닥쳤느니라 하니 삼손이 잠을 깨며 이르기를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그는 삭발 당하자 전혀 힘을 쓰지 못했다고 성경에 표현하고 있는 것 같지만 성경은 삼손의 힘의 출처가 머리털이 아닌 하나님이 떠나셨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죠? 머리털이 밀린 것으로 힘이 빠졌다면 포도주 먹었을 때는 왜 힘이 안 떠납니까? 죽은 시체에 손 댔는데 왜 하나님이 안 떠나십니까? 그러니까 머리털이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의 임재 여부였다는 것입니다. 삼손의 힘의 출처는 하나님의 동행이었습니다. 그래서 삼손이 착각하는 게 있었습니다. 자신의 힘이 머리에서 나온다는 것과 동시에 말씀 대로 살지 않아도 하나님은 나를 떠나지 않는다는 거짓된 안정감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많은 크리스찬들이 착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교회에 나오니까 구원을 받았다. 맞습니까? 아니죠. 내가 주일에 교회 출석하고 하나님이 나를 크리스찬이니까 축복하실거야. 그것이 거짓된 안정감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가장 위험한 곳입니다. 은혜 받지 못하고 다니면, 구원 받지 못하고 다니면 교회 와서 행세하고 다닐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적응 중인 것이고 변화가 없는 것입니다. 삼손이 믿었던 것은 성령의 동행함이 아니라 그 자신의 머리털입니다. 머리털의 화려함을 자랑했던 그가 그것으로 수치를 당하지 않습니까? 머리털 뿐만 아니라 두 눈이 뽑히고 쇠사슬에 묶이고 맷돌을 돌리는 치욕을 받는 비참한 모습도 더이상 자기가 보는 대로 살 수 없도록 묶어 두시는 하나님의 징계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저의 머리털이 밀림으로 저의 죄를 보고 회개한 적이 있습니다. 22년 전에 전 세계를 다니며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하나님이 아내와 함께 영국으로 가게하셨습니다. 영국 땅에 도착한 몇 일 만에 하나님께서 제 마음에 기도의 소원이 있었기 때문에 바울이 소원했을 때 머리를 민 것처럼 때마침 가져온 바리깡으로 스스로 거울을 보면서 머리를 밀었습니다. 바울처럼 저를 써주시라고 머리를 밀었는데 제가 밀다보니 머리가 삐뚤빼뚤해서 아내에게 부탁했는데 아내는 머리카락을 밀지 않고 살을 밀어서 너무 아파서 미장원에 가서 하루 만에 세 번째 머리를 밀게 되어서 태어나서 가장 짧은 머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바울처럼 쓰임 받게 해달라고 기도했더니 하나님은 제게 삼손처럼 머리를 밀게하셨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영국 생활은 새벽 기도 대신에 날마다 새벽 청소로 시작하게 되었고 낮에 말씀 보고 기도하고 심방하는 삶이 오후 학교 청소로 대체되며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게 되었습니다. 어느 후원도 어떤 협력도 누군가의 서포트도 전혀 없었고 스스로 생계를 이어가며 살아남아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저의 자존감과 소명감은 완전 바닥을 쳤습니다. 저는 청소 시간마다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 저를 삼손처럼 머리를 미시더니 이제 삼손이 맷돌을 돌리듯이 날마다 빗자루와 쓰레받이와 밀대로 이 땅을 밀게하시네요.' 그러면서 제가 청소하는 공간은 어느덧 하나님과 독대하는 골방으로 바뀌게 되었고 날마다 저의 교만을 밀대로 밀고 저의 완악함과 인정 중독에 빠졌던 걸레 같은 마음을 하나님께서 닦게 하시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어느 날 문득 1년 쯤 지났을 때 깨달음이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베드로야, 나를 따라오너라. 네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라고 하신 말씀이 제게 쑥 들어왔습니다. 어떻게 해석되었냐면 '김목사야 나를 따라오너라 네가 사람을 깨끗하게 하는 청소부가 되게 하리라' 그 때 깨달았습니다. 영적 각성을 부르짖고 사람들을 깨워야 하는 목회자로 부름 받았지만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바꾸기 전에 저를 깨끗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과 비밀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하나님, 저를 깨끗게 하소서 하는 청소 시간이 부흥회의 시간으로 바뀌었습니다. 청소하는 시간이 바닥을 훔치는 시간이 아니라 내 눈물을 훔치고 마음을 깨끗게 하는 시간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제게 그렇게 말씀하시고 학교의 문과 사역의 문까지 활짝 열어주시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호주에 가서 목회를 하게 되었는데 놀란 것은 호주의 많은 성도님들이 생계를 위해 청소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성도님들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청소해봐서 아는데 성도님, 힘드시겠어요'하고... 그리고 또 다른 발견을 하게 되는데 저에게는 청소의 은사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를 보고 청소를 너무 잘하니 영주권을 주겠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고된 이민자의 삶을 공감하도록 저를 낮추시고 다듬던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오늘도 그 분이 살아계시고 역사하시는 줄 믿습니다.
적용 질문
-나는 말씀으로 사는 것에 '적용' 중입니까, '적응' 중입니까?
-내 소견대로 살면서도 나의 머리털은 밀리지 않는다는 거짓된 안정감으로 살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머리털처럼 자랑하던 돈, 명예, 자녀, 학벌, 건강의 우상들이 밀림으로 내 죄를 보고 회개한 적이 있으십니까?
2.사명에 이끌리면 다시 시작합니다.
22 그의 머리털이 밀린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
머리털이 자라는게 이제와서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가 평생 머리털을 자르지 않았습니다. 성경의 문맥을 보면 몇 달 밖에 안되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머리털이 다시 자란다고 힘이 돌아온다는 보장이 있습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물론 자라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의 사인입니다. 하나님의 자비가 임해서 기도도 안하던 삼손이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28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하고
이 본문을 히브리 원문으로 직역하면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다 나의 주 여호와여 제발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제발 구하옵나니 그 하나님이여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여 주옵소서. 제발 이라는 단어가 두 번 나옵니다. 강조하는 것입니다. 영어에서 please 라고 하면 설득력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 '제발' 도와달라는 부르짖음입니다. 삼손이 '이번 한 번만 도와주신다면' 하며 비밀의 히든 카드를 내밀고 있는 것입니다. 염치불구하고 그렇게 참는 삼손의 모습인데 이것도 과거에 하나님을 만났으니까 하는 고백인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그 하나님'이라고 정관사가 붙습니다. 히브리어에서 정관사가 붙었다는 것은 과거에 이미 있었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삼손의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순간이 마지막입니까, 아니면 그 전에도 있었습니까? 20년 전 사사기 15장에 보면 그가 나귀 턱뼈로 1000명을 죽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가 1000명을 죽였다고 노래를 부르고 너스레를 떠는 순간 그가 갑작스럽게 목마름과 심한 갈증으로 죽게되었다고 난리 법석을 피우는데 그 때 목말라 죽겠다고 부르짖는 그의 모습을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작은 샘을 터지게 하심으로 그에게 자비를 베푸십니다. (부르짖는 자의 샘-에나꼴레) 그런데 그 후 이렇게 끝납니다.
15:20 블레셋 사람의 때에 삼손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이십 년 동안 지냈더라
보통 사사기의 패턴이 사사들의 마지막에 몇 년을 사사로 보냈더라로 끝을 맺습니다. 만약 삼손이 여기서 끝났다면 너무나 멋있게 끝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여 천 명을 죽인 용사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늘 31절에 똑같이 나옵니다. 그가 사사로 20년 동안을 지냈다고 두 번 반복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하나님은 하나님을 위하여 기도하고 부르짖고 그분을 위해 산 것만 카운트 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너 세상에서 뭐하다 왔니?' 물으시면 무슨 말을 하실 겁니까? 내가 주를 위해 어떻게 살았습니다. 주를 위해 이 때 부르짖었습니다. 그 할 말 할 수 있는 인생으로 바꿔놓으신 것입니다. 사명을 위해서 그가 기도하는 것만 인정하셨다는 얘기입니다. 사사기 15장에서 간절히 기도했던 그가 20년이 지난 고난의 변곡점에서 그 하나님을 다시 찾고 있는 모습을 보십시요. 이것은 그 영혼이 다시 돌이키는 것을 한 자로 표현할 수 있는데 바로 부흥(revival)입니다. 이전에 만났던 하나님을 다시 찾는 것입니다. 다른 방법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때 블레셋이 막았던 우물을 이삭이 다시 팝니다. 그 부흥입니다. 다시 은혜를 사모하고 부르짖고 영적 수맥을 파는 것이 바로 영적 회복의 첫 단추라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삼손의 부르짖음 이라면, 삼손은 이제 더이상 개인의 목마름 때문에 부르짖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 부르짖습니까? 바로 사명을 발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명이 있다면 아직 끝나거나 실패한 인생은 아닙니다. 왜냐고요? 머리털이 다시 자라도록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살았을 때보다 죽을 때 더 많은 블레셋 사람을 죽였습니다. 이게 사명입니다. 그의 사명은 블레셋을 없애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내가 살았을 때보다 내가 죽는 그 순간에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 때까지 내가 못살아서 후회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호흡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사용하시는 줄 믿습니다. 다시 주시는 은혜의 힘으로 사명을 끝까지 감당한 삼손이 어떻게 끝납니까?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전당에 이름이 딱 올라갔습니다. 비참하게 끝난 것처럼 보이지만 믿음의 사람으로 이름이 호적에 올라간 것입니다. 그래서 회복의 목적은 평안이나 행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시 힘을 주시고 살려주신다면 사명을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그런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살려주신다면' 주님이 물으십니다. '살려주면 뭐하려고?' 사명입니다. 나의 목마름을 위해서만 기도했다면 이제는 바뀌어야 합니다. 이웃과 가족과 교회와 나라와 민족을 위해 우리가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사명 감당을 위하여 땀 방울이 피방울 같이 떨어지는 간절한 기도로 애쓰셨습니다. 그 예수님이 당당하게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음에도 예수님의 십자가 상에서 내가 목마르다는 부르짖음을 하나님은 외면하셨습니다. 하지만 오늘 삼손의 목마릅니다는 부르짖음에는 답변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는 예수님의 간절한 부르짖음을 외면하신 하나님은 주여 한 번만 도와달라는 삼손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십니다. 삼손과 예수님이 비교됩니까? 삼손은 사사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 아들인데요. 왜 하나님은 아들이신 예수님의 절규와 목마름은 듣지 않으시고 그를 버리신 것입니까? 왜 십자가에 달려 죽게 만드셨습니까? 그 이유는 바로 우리들 때문입니다. 이 땅에 계셨을 때보다 그분이 죽으심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의 사명의 길을 걸어가신 것이 아닙니까? 그 분은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심으로 사망 권세를 깨뜨리시고 지금도 살아계서서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누구든지 그 분 앞에 나와 믿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적용질문
-지금 나의 상황이 삼손이 부르짖었던 '그 하나님'의 이름을 찾을 때가 아닙니까?
-나는 나의 목마름 때문에 기도합니까? 아니면 사명을 이루기 위하여 기도합니까?
-다시 힘을 주실 때 내가 진정으로 눈을 떠야 할 나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작년 저는 삼손 처럼 22년 전 영국에서 만났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짖어야만 했습니다. 목사님이 말씀해주신 대로 저희 교회는 크게 부흥했습니다. 양적으로 질적으로 성장했습니다. 교회는 선교적인 교회로 나가고자 저부터 선교 현장을 부지런히 다녔습니다. 때마침 네팔에서 현지인 부부세미나를 하고자 아내와 함께 가서 3월 쯤 선교 집회를 하게 되었는데 모든 사역을 마치고 기도하는데 한 네팔 여성 사역자가 앞으로 나와 목사님, 저를 위해 기도해주십시요 했습니다. 아내와 함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기도 부탁 한 이유는 자기가 유방암에 걸렸다는 것이었습니다. 기도를 마치자마자 아내가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 있다며 한국에 가서 유방암 검사를 받아야겠다고 합니다. 한국에 가서 검진 받은 결과 유방암 판정을 받았습니다. 너무 충격이었고 슬픔과 애통하는 마음을 갖고 눈물로 호주로 돌아갔습니다. 돌아가서 수술과 방사선 치료를 받았고 전이 위험으로 인해 자궁적출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새벽마다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교회가 부흥함으로 교만했던 내 마음을 회개하며 한 명 한 명 영혼들, 그렇게 암환자들을 위해 기도하며서도 그들의 마음을 체휼하지 못했던 저의 마음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녹록치 않고 오히려 악화되었습니다. 교회의 부교역자들과 장로님들이 사명을 버리고 떠나버리고 제 모친께서는 시골에 교회 개척을 하고 목회를 하셨는데 갑작스럽게 작년 8월에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저는 계속 고난과 슬픔 속에 22년 전에 만났던 광야 같은 이민자의 삶 속에 함께 하셨던 그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저는 이민 목회한다고 어머님의 임종도 지키지 못하는 불효자입니다. 아내에게 행복하게 해주겠다며 결혼해놓고 목회자 아내로 생고생을 시켜 저렇게 암에 걸리도록 건강을 돌보지 못하게 했던 나쁜 남편입니다. 하나님, 사명 충성스럽게 감당 할 것 같았지만 이제는 못하겠습니다.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렇게 부르짖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이것이 사명이라면 감당할 힘을 주옵소서. 다시 설 수 있는 힘을 주옵소서. 이 번 한 번만 도와주시면 제가 일어나겠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동안 하나님은 모든 목회 여정을 다 주님께 맡기게 하셨습니다. 저의 아내도 가족도 부모님도 저의 미래도 저의 교회도... 하나님, 제발 나를 강하게 해달라고 그렇게 간구하며 힘이 없다고 했을 때 하나님은 제게 은혜를 주시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네 생각 내려놓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아라. 하나님이 오늘도 은혜를 주실 것이다. 그런 마음과 말씀으로 자꾸 제게 격려하셨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동안 하나님이 새 힘을 주시고자 그 때 우리들교회와 연락이 닿게되었고 think세미나를 통해 하나님은 영육의 회복을 주셨습니다.
삼손은 하나님 나라의 손발로 선출되었지만 그의 머리는 삭발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제발 도와주세요. 인도해주세요. 하나님은 자비롭고 은혜로우셔서 부르짖는 자에게 다시 시작하는 은혜를 주십니다. 아무것도 없어도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다시 살아나는 줄 믿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하나님 오늘도 은혜를 주신다면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일어날 수 있습니다. 버틸 수 있습니다. 견딜 수 있습니다. 내 힘이 아닙니다. 내 머리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한 번만 도와주신다면... 바로 하나님은 삼손처럼 머리털이 밀려버린 우리 가정, 교회, 국가에 다시 시작하는 힘을 부어주실 수 있을까요? 가능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부흥할 줄 믿습니다. 그 소원과 소망을 가지시고 다시 살려주옵소서, 부흥케 하소서. 그렇게 부르짖음으로 은혜의 힘을 받아 충만함으로 살아나시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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