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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교회_김양재목사님/주일설교녹취기록

아비, 멜렉(이성훈 목사님)

by relife_es 2025. 7. 21.

사사기(9:1-6)

1여룹바알의 아들 아비멜렉이 세겜에 가서 그의 어머니의 형제에게 이르러 그들과 그의 외조부의 집의 온 가족에게 말하여 이르되 
2청하노니 너희는 세겜의 모든 사람들의 귀에 말하라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명이 다 너희를 다스림과 한 사람이 너희를 다스림이 어느 것이 너희에게 나으냐 또 나는 너희와 골육임을 기억하라 하니 
3그의 어머니의 형제들이 그를 위하여 이 모든 말을 세겜의 모든 사람들의 귀에 말하매 그들의 마음이 아비멜렉에게로 기울어서 이르기를 그는 우리 형제라 하고 
4바알브릿 신전에서 은 칠십 개를 내어 그에게 주매 아비멜렉이 그것으로 방탕하고 경박한 사람들을 사서 자기를 따르게 하고 
5오브라에 있는 그의 아버지의 집으로 가서 여룹바알의 아들 곧 자기 형제 칠십 명을 한 바위 위에서 죽였으되 다만 여룹바알의 막내 아들 요담은 스스로 숨었으므로 남으니라 
6세겜의 모든 사람과 밀로 모든 족속이 모여서 세겜에 있는 상수리나무 기둥 곁에서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으니라

 

자신의 이름을 태어나서 부터 무려 9년 동안이나 쓰지 못한 뉴질랜드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이 소녀의 이름이 '탈룰라 더스 더 훌라 프롬 하와이'라고 합니다. 탈룰라가 하와이의 훌라 춤을 춘다는 뜻이랍니다. 도대체 이 부모는 이런 이름을 지어주었을까 했더니 평생 이름처럼 유쾌하고 즐거운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좋은 마음으로 지어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소녀는 자기 이름이 너무 부끄러워서 이름을 쓰지 못하고 그냥 T로 불러달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참다 참다 못해서 아홉 살 되던 해에 법원에 이름 변경 신청을 했답니다. 당연히 판사가 받아들여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판결문에 쓴 내용은 '이것은 유쾌함이 아니라 정서적 학대다'라고 했답니다. 아이 이름에는 부모의 마음이 담깁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마음이 다 왜곡되었기 때문에 이름을 아무리 잘 지어도 잘 지은 것이 아니고 또 이름을 아무리 못 지어도 못 지은 것이 아닙니다. 그저 말씀에 근거해서 구속사적으로 이름을 짓는 것이 최고의 이름이 되는 줄 믿습니다. 기드온 큐티를 쭉 해왔는데 오늘 부터는 기드온의 아들인 아비멜렉을 묵상합니다. '아비'는 나의 아버지라는 뜻의 히브리어 입니다. '멜렉'은 왕입니다. 즉 나의 아버지는 왕이시다 라는 뜻입니다. 왕 되기를 거절한 기드온이 왕에 대한 미련이 남아서일까요? 그 아들의 이름을 아비멜렉이라는 이상한 이름으로 지었다는 것입니다. 이 이름대로 진짜로 아비멜렉이 왕이 됩니다. 그런데 3녀 천하로 그 왕국이 망하고 맙니다. 이것은 왕처럼 강한 아버지만 바라보다가 결국에는 자기 자신이 왕이 되었지만 진정한 왕을 섬기지 못한 그 인생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떠한 왕을 섬겨야 하는지 아비멜렉의 기가 막힌 인생을 통해 함께 생각해보겠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왕을 섬겨야 할까요?

 

1.'아비, 멜렉'의 방패는 무겁습니다.

 

1여룹바알의 아들 아비멜렉이 ...

기드온 즉 여룹바알은 많은 아내를 두고 무려 아들만 70명이나 낳았습니다. 왕이 되라는 요구는 뿌리쳤지만 실제로는 왕처럼 살았습니다. 게다가 기드온은 첩까지 두었습니다. 자기 동네 오브라가 아니라 30km정도 떨어져 있는 세겜에 딴 살림을 차렸습니다. 세겜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단을 쌓은 곳이고 요셉의 묘지가 있는 곳이며 또 여호수아가 마지막 고별 설교를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만 섬기자고 서약을 했던 신앙의 역사와 결단이 담긴 거룩한 성읍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다가 이 여룹바알이 딴 살림을 차리고 아들까지 낳은 것입니다. 그 아들이 바로 아비멜렉입니다. 그런데 이 이름이 진짜 왕을 부르는 호칭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는 누이 동생이라고 속인 임금의 이름이 아비멜렉이었습니다. 즉 아비멜렉은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블레셋 그랄 지역의 왕의 이름을 부르는 호칭인 것입니다. 이 엄청난 이름을 여룹바알이 자기 첩의 아들에게 지어준 것입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기죽지 말라는 것입니다. 낳아 놓기만 하고 돌봐주지 못한 그 서자를 향한 아버지의 마지막 마음이 아니었을까요? 아비 없는 자식이라고 쫄지말라고 사람들이 네 아버지 어디 갔어? 너 아비 없는 자식이야? 이렇게 놀릴 때, 무시할 때 쫄지 말고 기죽지 말고 당당하게 이름을 말하라고. 아니야 내 아버지 없지 않아. 내 아버지 왕이야. 하며 당당하게 살아가라고 마치 방패처럼 그 이름을 지어주었을 것입니다. 이 아비멜렉은 그래서 낮과 밤이 너무 다르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낮에는 아비멜렉이라는 대단한 이름을 방패막이 삼아서 친구들이 아비 없는 자식이라고 무시하고 놀릴 때마다 아니야, 내 아버지는 왕이셔. 그렇게 방패로 그것을 막으면서 애써서 살다가 집에 들어가면 정작 집에는 같이 밥 먹을 사람이 엄마 한 명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밤이 되면 그 아비멜렉이라는 이름의 무게가 더 무겁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이름만 아비멜렉이 있을 뿐 진짜 아비는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밤이 되면 더 외롭고 더 서럽고 더 슬프게 울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비멜렉에게는 아버지 여룹바알 이라는 존재가 낮에는 자기를 지켜주는 방패막 같고 보호자처럼 억지로 그렇게 생각하며 버텨야 했지만 밤이 되면 내 인생을 망쳐놓은 배신자요 짐짝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마음에 한을 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대단한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장례식에 갔을 것이고 거기서 70 명의 이복형제들을 만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70명의 이복형제들이 아비멜렉을 어떻게 대했을까요? 그림자 취급 했을 것입니다. 그 중에는 네가 어디라고 여기 나타나 하며 대놓고 무시하고 모욕하는 형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비멜렉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마음을 꾹 참으면서 세겜 자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1여룹바알의 아들 아비멜렉이 세겜에 가서 그의 어머니의 형제에게 이르러 그들과 그의 외조부의 집의 온 가족에게 말하여 이르되 
2청하노니 너희는 세겜의 모든 사람들의 귀에 말하라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명이 다 너희를 다스림과 한 사람이 너희를 다스림이 어느 것이 너희에게 나으냐 또 나는 너희와 골육임을 기억하라 하니 
3그의 어머니의 형제들이 그를 위하여 이 모든 말을 세겜의 모든 사람들의 귀에 말하매 그들의 마음이 아비멜렉에게로 기울어서 이르기를 그는 우리 형제라 하고 

 

아비멜렉은 자기를 지켜줄 새로운 방패를 찾은 것입니다. 바로 외가 식구들입니다. 같은 골육임을 기억하라고 하면서 부탁을 하는데 그것은 여룹바알의 아들 70명의 다스림을 너희가 받는 것과 그래도 같은 동향 사람인 아비멜렉 한 사람의 다스림을 받는 것 중에 무엇이 세겜 사람들에게 더 이익이겠는가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왕이면 같은 고향 사람인 아비멜렉을 지지해 주는 것이 우리에게 훨씬 더 이익이니까 우리 아비멜렉 밀어주자. 이렇게 유세 활동 해달라고 부탁한 것입니다. 그런데 70명의 이복형제 중 누구도 대통령 선거에 나간 적이 없습니다. 왕이 된다고 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우리에게 왕이 필요하다 왕 뽑자고 대선판을 깔아 준 적이 없습니다. 그냥 아비멜렉이 제 멋대로 판을 벌려서 세겜 성읍 백성들을 선동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상한 부탁을 하는데도 외가 식구들이 다 아비멜렉 편을 듭니다. 한 편이 되기로 합니다. 왜? 가족이니까요. 가족이니까 시키는대로 나가서 아비멜렉 선전을 잘 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듣는 사람들 중에는 분명히 이런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비멜렉? 아니 여룹바알 서자가 어떻게 우리를 다스려. 안돼. 안돼. 그랬을때 외삼촌들이 뭐라고 했을까요? 아니야. 네가 몰라서 그래. 우리 아비멜렉이 말이지 어려서부터 아비를 아비라 부르지 못해서 일찍 철이 들었어. 얘가 인생을 알아. 이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야 돼. 하며 엄청난 유세를 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세가 대성공을 해서 세겜 사람들의 마음이 전부 아비멜렉에게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전부다 열혈지지자들이 되었습니다. 이 모습을 보는 아비멜렉은 너무 든든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아비멜렉이라는 이름만이 방패가 되었지 정작 아버지는 보이지 않았는데 이제 수많은 외가집 식구들과 세겜 사람들이 전부다 자기 편을 들어주고 나서서 자기를 변호해주고 자기를 지켜주고 지지해주고 무조건 옳다고 말해주니 얼마나 든든했겠습니까? 든든한 방패를 얻었구나 하며 너무 기분이 좋아서 그 뒤에 잘 숨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능 좋은 방패일수록 무거운 법입니다. 아비멜렉이 이 방패의 무게를 깨닫기 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렸을까요? 딱 3년 걸렸습니다. 3년 만에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이 서로 싸우다가 결국에는 다 죽고 맙니다. 잠깐 든든했던 이 무거운 방패에 아비멜렉이 그만 깔려죽은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상처와 약점과 실수와 잘못과 수치들을 가려주고 막아 줄 방패들을 늘 찾습니다. 처음에는 문자적으로 아버지 어머니 집안이 우리의 방패가 됩니다. 그래서 부모님이 든든하면 너무 자랑하고 또 그렇지 못하면 너무 낙심합니다. 그래서 그 다음으로 우리 힘으로 찾아가는 방패들은 무엇입니까? 학벌, 직장, 결혼, 돈, 자식 이 모든 것들, 나를 지켜줄 수 있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들을 얻으려고 방황하고 또 방황합니다. 무엇이든 나를 방어해줄 수 있는 것이라면 내가 그것을 꽉 쥐려고 수고하며 사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하지만 이런 아비멜렉의 방패는 너무 무겁습니다. 나를 잠깐 지켜주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나를 짓누르는 짐덩어리가 되고 맙니다. 비싼 사용료를 지불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그럴까요? 원래 내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조차도 언젠가는 떠나갑니다. 이 세상의 아무리 튼튼한 방패도 원래부터 내 것인 것은 없고 영원히 내 것인 것은 없습니다. 내가 끝까지 쥐고 있을 방패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한 성도님은 초등학생 때부터 사회공포증과 무대공포증 때문에 너무 힘드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감출 수 있는 보호막과 방어기재를 찾느라 인생이 너무 힘드셨다고 합니다. 우리들교회에 와서도 공포증 있다는 말을 나누는 게 너무 공포스러워서 불안증이 있다고 했답니다. 이 분이 이 공포증을 가리고 당당한 남자다운 사람이 되려고 선택한 방패가 바로 제복 입은 경찰이었습니다. 그래서 경찰대학에 들어 갔습니다. 경찰이 되면 공포증을 극복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경찰대에 가보니 경찰이 되려는 용감무쌍한 젊은이들이 잔뜩 있으니 더 비교되고 더 열등감이 느껴지고 더 위축되어서 더 절망에 빠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 교회에 와서 깨달을 것은 이 때에 이렇게 두려움에 떨고 방패 찾아다니던 자신의 모습이 오픈의 능력을 알지 못했던 자기 삶의 결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답니다. 경찰 제복으로 가리려했던 것이 오히려 자신의 약함이자 악함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고백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이 부족함과 부끄러움을 오히려 더 목장에서 솔직하게 많이 나누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기 원한다고 고백하셨습니다. 

우리는 내 방패가 크네, 작네, 두껍네, 얇으네, 딱딱하네, 말랑하네 하면서 기뻤다 슬펐다를 반복합니다. 하지만 깨달아야 할 것은 이렇게 무거운 아비멜렉의 방패를 들 수밖에 없는, 들어야만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 자신의 악함이라는 것입니다. 감추려는 죄악의 문제입니다. 내놓지 못하는, 오픈하지 못하는, 나의 수치를 꺼내놓지 못하는, 나의 체면과 위선과 교만함이 문제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이런 우리의 죄악들을 회개하고 목장에 들어가서 더 솔직하게 나누실 때 주님 앞에 모든 무거운 방패들을 다 내려놓는 진정한 자유를 누리시게 될 줄 믿습니다.

 

적용질문

-나를 낳아주심 부모에 대한 마음이 어떻습니까?

-너무 무겁지만 더 꼭 붙잡게 되는 나의 '아비, 멜렉' 방패는 무엇인가요?

-무엇을 가리고 보호하려고 그렇게 꼭 쥐고 계신가요?

 

2.'아니, 멜렉'의 칼은 무섭습니다.

 

아니는 히브리어로 나를 뜻합니다. 즉 아니 멜렉은 내가 왕이다 라는 뜻입니다.

4바알브릿 신전에서 은 칠십 개를 내어 그에게 주매 아비멜렉이 그것으로 방탕하고 경박한 사람들을 사서 자기를 따르게 하고 

 

아비멜렉의 든든한 방패가 된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에게 은 70개를 바칩니다. 요즘 가치로는 130만원 정도 됩니다. 이 은을 바알브릿 신전에서 꺼내옵니다. 세겜 모든 사람들이라는 구절이 2,3,6절에 반복되는데 히브리어 성경으로 보면 세겜 모든 사람들은 세겜 모든 바알들로 직역됩니다. 왜 굳이 바알이라는 단어를 쓰셨을까? 게다가 기드온의 별명이 바알과 싸우리라는 뜻의 여룹바알인데 8장까지 계속 기드온이라는 이름으로 나오다가 9장에는 기드온이라는 이름이 안 쓰이고 여룹바알이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은 9장 1-6절을 바알이라는 단어로 도배를 해놓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여기 문제가 있는 거야. 이거 잘 봐. 바알. 하시며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세겜이 이스라엘의 영적 역사에 아주 중요한 곳입니다. 아브라함이 단을 쌓은 곳이고 야곱이 외삼촌 집에서 도망 나올 때 라헬이 가져온 우상을 꺼내다가 거기에 다 묻었습니다. 이런 우상을 섬기면 안된다고... 여호수아가 설교를 한 장소인 믿음의 유서 깊은 이 세겜이 바알로 뒤덮인, 바알을 섬기는 작은 바알들이 바알 신전에 모여서 거기에 있는 은 70개를 꺼내서 아비멜렉에게 갖다 바치는 기가막힌 범죄행위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문학적인 장치를 사용하셔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어쩌다 세겜이 이렇게 되었을까요? 하나님 떠나는 것은 한 순간이라는 것을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며 알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도 믿음 있는 세대가 그래도 한 세대는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기드온은 죽자마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서 바알을 섬기는 우상숭배로 흘러 떠내려 갔다는 것을 사사기 묵상하면서 보고 있습니다. 옆에서 잔소리 해주는 사람, 싫은 소리 해주는 사람, 가면 안된다 하며 외쳐주는 사람이 없으면 우리는 다 하나님 대신해서 떠나갈 수밖에 없는 그런 연약한 인생입니다. 그런 사람이 계시다면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바알들이 바알 신전에서 가져다가 바친 은 70개로 아비멜렉이 무엇을 합니까? 방탕하고 경박한 사람들을 고용합니다. 쉽게 말해 깡패들, 양아치들, 폭력배들을 고용한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아비멜렉이 이제 칼을 잡아 들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방패만 들고 겨우 세상의 공격하는 무시와 조롱들을 막아내며 버텼습니다. 그런데 이것만 가지고는 내가 원하는 대로 세상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칼을 뽑아들기로 결정하고 지지자가 생기고 진짜 방패들이 생기고 내 손에 은 70개가 생기고 나를 무조건 따라주는 사람들이 생기니까 드디어 그것으로 휘두르며 내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내가 가라는 곳에 가서 내가 공격하라는 사람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내 대신 공격해줄 칼을 뽑아 든 것입니다. 이 과정에 깔린 이 아비멜렉의 마음은 무엇일까요? 바로 내가 왕이다. 이제는 내가 왕이다.입니다. 아비멜렉은 내가 가졌으니 나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해. 나는 내 아버지가 왕이라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이제는 내가 왕이 된것입니다. 이 아니멜렉의 칼을 뽑아 든 것입니다. 이 칼을 어떻게 휘두릅니까?

 

5오브라에 있는 그의 아버지의 집으로 가서 여룹바알의 아들 곧 자기 형제 칠십 명을 한 바위 위에서 죽였으되 다만 여룹바알의 막내 아들 요담은 스스로 숨었으므로 남으니라 

 

아비멜렉의 칼은 복수의 칼이 됩니다. 평생 자기를 없는 사람 취급했던 이복 형제 70명을 모조리 다 죽여버립니다. 한 바위 위에서... 나를 깔보고 나를 대적하는 사람들의 결말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온 국민을 대상으로 본보기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 바위 위에서 차례로 죽였든지 아니면 모아 놓고 한꺼번에 죽였든지 70명의 형제들을 모조리 죽여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죄악을 드러내셔야 되기 때문에 한 사람 요담을 남겨 두신 것입니다. 죄악을 드러내시고 이 백성의 구속사를 써내려가시기 위해 한 사람을 남겨두시는 것입니다. 아니멜렉의 칼을 휘두를 수 있는 힘이 아비멜렉에게 생기니까 결국에 행하는 것은 잔인한 복수 뿐입니다. 무서운 칼이고 무서운 결말입니다. 하지만 칼이 문제가 아닙니다. 칼을 휘두르는 아비멜렉이 문제인 것이고 칼을 휘두르고 싶고 칼을 휘두르고 있는 우리 자신의 문제입니다. 폭력은 선택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자발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폭력은 본성적인 것입니다. 누구든 상황이 되고 환경이 되고 조건이 갖춰지면 폭력적인 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폭력을 쓰고 있지 못하다면 나에게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성도님이 회사에서 역대 최고 매출을 올리셨는데 일등 공신이 본인이라고 합니다. 매출이 올라가니 매출을 더 올리려고 회사에서 더 부담을 주었는데 이 팀에 일에 부담이 생기니까 소극적으로 일에 나서는 직원들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분이 워낙 열심히 하고 공을 세운 사람이기 때문에 그 꼴을 봐줄 수 없는 겁니다. 하루는 그런 문제 때문에 언쟁을 하다가 서로 장문의 문자를 주고 받으며 감정이 상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답니다. 그런데 화가 안 풀려 퇴근을 해서도 훈계조의 장문의 문자를 다시 보냈다고 합니다. 시간이 지나 산책하다가 생각하니까 자기가 선을 넘었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너무 마음에 걱정이 되어 큐티인을 펴고 묵상을 했습니다. 그날 아침 본문이 드보라의 노래였습니다. 같이 전쟁에 참여했던 한 사람 한 사람을 거명하면서 모든 승리의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드보라의 찬양을 읽으면서 내가 여기서 일할 수 있고 공을 세울 수 있는 것은 이 회사에 다시 입사하게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인데 지금 내가 힘이 좀 생겼다고 지금 내가 일이 좀 잘 풀린다고 마음이 높아져서 그 은혜 다 잊어버리고 나의 동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있었구나 하고 회개하게 되셨답니다. 그래서 아침에 큐티한 것을 그 분에게 문자로 다시 보내며 정중하게 사과 문자를 보냈다고 합니다. 그렇게 마음이 힘들 때, 신앙 양심이 사이렌을 울릴 때 내 감정대로 놀아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폈다는 것이 참 잘하신 것입니다. 마음이 힘들 때는 무조건 말씀을 묵상해야 되는 겁니다. 그리고 내가 사과해야 되겠구나.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염치 없고 쪽팔렸지만 사과의 문자를 정중하게 보내신 것 너무 잘하셨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칭찬 도장을 꽉 찍어 주셨다고 믿습니다. 공을 세우고 인정을 받으면 우리는 저절로 권위적이 되고 폭력적이 될 수밖에 없는 유리 같은 인생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우리 자신의 폭력성과 교만함과 권위적임을 어거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생각, 의지, 지식으로 도저히 컨트롤 할 수없습니다. 오직 주님의 말씀 만이 우리의 마음이 널뛸 때 주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 가운데 임하셔서 우리를 붙들어 주셔야 되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늘 주님의 말씀을 가까이 해야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어야하고 말씀으로 think하셔야 되고 특히 작은 것 하나라도 적용해야 되는 것입니다. 지금 내 능력과 내 의지를 마음 껏 발휘하게 해 줄 칼을 찾고 계십니까? 그건 칼이 없어서 슬프신가요? 그런 칼 가진 사람이 너무 부러우십니까? 아니면 지금 하나님께서 잠시 허락하신 권세를 가지고 칼을 휘두르는 자리에 계신가요? 어떤 경우든 내가 왕이 되려고 하는 아니멜렉의 칼은 너무 너무 무서운 것임을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칼이 무서운 게 아닙니다. 내 자신이 가장 무서운 존재입니다. 가장 사납고 가장 폭력적이고 가장 악한 존재이기 때문에 이것을 깨닫는 다면 우리가 칼이 없어도 감사할 수 있는 것이고 잠시 하나님께서 그 권세를 주셨다고 해도 회개하면서 구원을 위해 분별해서 쓸 수 있는 줄 믿습니다.

 

적용질문

-나는 왕이다 주장하는 곳은 어디입니까?

-어떤 칼을 손에 쥐려고 합니까?

-나도 사납고 폭력적인 악인일 뿐임을 인정합니까?

 

3.'야훼 멜렉'의 신앙만이 답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만이 나의 왕이십니다 고백해야 됩니다.

 

6 세겜의 모든 사람과 밀로 모든 족속이 모여서 세겜에 있는 상수리나무 기둥 곁에서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으니라

 

세겜과 그 옆에 밀로라는 요새가 있는데 거기에는 모든 사람들이 세겜의 상수리 나무 곁에 오는데 그 상수리 나무 기둥 곁이라고 합니다. 이 기둥은 아세라 목상일 것입니다. 이 세겜에 있는 상수리 나무가 믿음의 유산이 쌓인 곳인데 그 곳에 작은 바알들인 세겜 사람들이 바알과 아세라 목상을 만들어 기둥으로 세워놨다는 것입니다. 그 유서 깊은 자리에 작은 바알들이 저지른 죄악을  다시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특별히 6절 한 절에 멜렉이라는 왕이라는 단어가 3번 반복됩니다. 아비멜렉이라는 단어로 한 번 나오고 왕으로 삼으니라로 번역된 부분을 히브리 성경으로 보면 왕이 되도록 왕을 삼았다는 것으로 왕이 두 번 나옵니다. 사실 불필요한 문장인데 이렇게 기록해놓은 것은 왕을 굉장히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사사 시대를 한 마디로 규정하면 이스라엘에 아직 왕이 없는 시대이고 그래서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딱 한 번 왕을 세우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본문인 것입니다. 세겜 사람들, 이 작은 바알들이 바알 신상 아래에 하나가 되어서 저지른 일이 자기들의 왕을 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고발하시는 것입니다. 이 죄악을 드러내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괜히 왕을 안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진정한, 또 유일한 왕이시기 때문에 하찮은 인간 왕이 사실 이스라엘에게는 필요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왕을 주시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왕이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금방 잊어버리고 금방 돌아서서 자기가 왕이 되려고, 또 자기를 왕을 만들어 줄 것 같은 사람 찾아서 여기저기로 방황하는 것이 사사기의 모습이자 또 우리 자신의 모습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왕이신데 이스라엘이 이것을 인정하지 않고 잊어버리고 고난이 오면 잠깐 하나님 찾고 부르짖었다가 또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풀어 주시면 금새 또 돌아서고... 이게 이스라엘 사람들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제멋대로 나는 왕이다 외치고 그래 너는 왕이다 하는데 그것은 네가 왕이 되면 나를 왕으로 만들어줄 것 같으니까 무조건 지지해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사기가 남의 모습이 아닙니다. 작은 바알들이 이렇게 세운 왕이 결국 세겜 사람들도 다 죽고 유서 깊은 세겜 성도 다 무너지고 아비멜렉도 결국에는 아무 이름없는 연약한 여인이 던진 돌에 맞아서 죽고맙니다. 아비멜렉이 휘두른 아니멜렉의 무서운 칼이 결국에는 다 죽이고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되겠습니까? 무거운 아비멜렉 방패 드는 수고를 멈추고 무서운 아니멜렉의 칼 휘두르는 고생도 그치고 이제는 야훼멜렉 여호와께서 왕이시다의 참된 신앙 고백으로 살아가야 되는 줄 믿습니다. 우리가 섬겨야 될 진정한 왕은 내 아비도 아니고 나도 아니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 이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 이해하지만 문제는 이해가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가 삶의 현장에서 야훼멜렉의 신앙으로 살아내야 하는 것인데 그것이 너무 힘든 게 우리의 문제이고 한계이고 슬픔입니다. 

 

씨름 장사 타이틀까지 따셨던 성도님의 나눔입니다.

이 분이 선수 때 칼을 휘두르는 코치 밑에서 너무 고생했는데 시간이 흘러 본인이 코치가 되었습니다. 방패 들고 간신히 간신히 버티시다가 본인이 이제 칼을 휘두르는 자리에 서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분이 성적이 나쁜 팀에 부임해서 이 팀을 좋게 만드느라고 전심을 다해 지도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본인이 장사가 되어 최고의 자리에 올라보셨으니 어떻게 연습하고 훈련을 해야 성적이 올라갈 수 있는지 아시니 남다른 애정과 열정을 가지고 선수들을 트레이닝 시켰습니다. 그런데 선수들이 받아들이지 못하고 선수 중에는 운동 시간을 거짓말로 보고하는 경우도 있었고 심지어 발뺌까지 하고 대들기 까지 했다고 합니다. 주장도 선수와 한편이 되어 선수 편을 들었답니다. 총체적 난국이라 생각해서 전체를 집합시켜놓고 따끔하게 혼을 냈는데 한 선수에게 문자가 왔답니다. 다음부터는 선수들이 녹음하겠다고 한다는... 너무 어이 없는 이 상황에 상담 요청이 들어와 상담을 하는데 상담 중에 선수가 실제로 녹음하는 것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너무 배신감이 들고 마음이 무너지고 속이 상하고 말이 안나오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우리들 공동체에서 계속 양육도 받으시고 목장도 나가시고 목자이시니 머리로는 네가 나보다 옳다가 되어야 하는 것을 알지만 그 선수들 얼굴을 보면 도저히 그게 안된다고 합니다. 그래도 말씀을 보며 인정되는 것은 이렇게 연약한 선수들과 같이 있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관심은 나에게 있고 이 어려운 선수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나를 트레이닝 시키시는 구나. 훈련시키시고 코칭하시는 구나. 결국은 내가 이것을 잘 받아내야 하는 구나 라는 고백까지는 한답니다. 그러나 이렇게 고백했어도 선수들을 보면 마음이 힘들어지고 적용이 잘 안됩다고 합니다. 이게 이 분만의 문제이겠습니까? 저의 문제이기도 하고 여러분 한 분 한 분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기도해야 됩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붙잡아 주시고 도와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렇게 내가 왕이다의 아니멜렉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저절로 됩니다. 상황만 되면 칼을 휘두릅니다. 그러나 야훼멜렉 여호와께서 왕이시다의 고백은 아무리 말씀을 듣고 양육을 받고 사건이 와도 진짜 안되는 것 같습니다. 저도 이렇게 설교하지만 안됩니다. 집에서도 안됩니다. 결국은 우리 힘으로 안되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 겁니다. 내가 할 수 있다. 내가 양육 받으면 되는 것이고 내가 말씀이 들렸으니까 되는 것이고... 된다는 생각 자체를 안하는 것, 나는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진정한 믿음인 것 같고 야훼멜렉의 신앙인 것 같습니다. 그럼 야훼멜렉을 어떻게 삶의 현장에서 적용할 것인가? 각자 삶의 자리에서 어려운 일이 계속 생길 때 불평하지 마시고 화내지 마시고 억울해하지 마시고 이것이 하나님이 나를 훈련시키시는 것이구나 하나님의 코칭이구나 나를 하나님의 백성 삼으시려고 나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려고 나를 만들어가시려고 하나님이 특별히 세팅해주신 커리큘럼이구나 훈련과정이구나 생각하시고 잘 당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혼자 두지 않으셨습니다. 목장에 가면 같이 시달리는 분들 많이 있고 다 저마다의 환경 속에서 힘들고 지치고 일어설 힘 없는 연약한 인생들이 한 공동체로 성령의 사랑의 끈으로 묶여 같이 한 걸음 한 걸음 갈 때에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거룩한 백성으로 다 빚어지게 될 줄 믿습니다.

 

적용질문

-여호와는 왕이시다를 고백하기 제일 어려운 자리는 어디인가요?

-거기서 내가 잘 받아야 할 하나님의 코칭은 무엇인가요?

 

우리가 섬겨야 할 왕은 내 아버지는 왕이시다의 아비멜렉의 방패가 아닙니다. 너무 무거워서 깔려 죽습니다. 또 나는 왕이다의 아니멜렉의 칼도 아닙니다. 너무 무서워서 전부 망하는 겁니다. 우리가 섬겨야 할 유일한 왕은 여호와는 왕이시다의 야훼멜렉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 구원을 위해 칼을 들지 않으셨습니다. 방패도 쓰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고초를 그대로 다 받아내셨고 칼이 아니라 십자가 지는 순종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유일한 왕으로 섬기는 우리 모두도 주님 따라서 우리 각자 삶의 자리, 맡겨주신 십자가 사명 잘 지고 그 자리 잘 지키심으로 야훼멜렉의 신앙 고백되는 복된 인생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