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1:35-45
35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36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37만나서 이르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38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39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그들의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쫓으시더라
40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41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42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43곧 보내시며 엄히 경고하사
44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가 깨끗하게 되었으니 모세가 명한 것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셨더라
45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얼마전 인천 공항에 마중 나갈 일이 있어서 공항에 갔는데 입국장에서 진귀한 장면을 보았습니다. 중국인 20대 여성 100여명이 핸드폰을 들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너무 궁금해서 물어보니 아이돌이 입국한다는 겁니다. 저도 그 대열에 껴서 핸드폰을 들고 있었습니다.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터지고 경호원을 동원해서 입국하고 있었고 그 뒤로 수많은 여성 팬들이 뒤따르고 있었습니다. 연예인은 연예인이더라구요. 키도 크고 얼굴도 조그만하더라구요. 누군가를 좋아해서 그 뒤를 맴도는 사람들을 팬이라고 부릅니다. 카일 아일먼이 쓴 팬인가, 제자인가? 라는 책에서 그는 이런 질문을 합니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변을 맴도는 팬인가? 아니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인가? 예수님을 응원하고 감탄하지만 희생이 따를 때는 뒤로 물러설 서는 팬이 되지 말고 자신을 드려서 그 분의 뒤를 따르는 그 분의 제자가 되라고 이야기합니다.
지금 예수님이 가버나움 이라는 동네에서 병자를 고치시고 유명인사가 되셨습니다. 많은 병자들이 예수님 앞에 나아온 것입니다. 이 때의 상황이 오늘 본문을 말하고 있습니다. 36절에 이렇게 되어있죠. 시몬과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제자들도 예수님을 따랐다고 하는데 어떤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를걸까요?
여러분은 어떤 마음으로 교회에 오신 겁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신의 길을 따를 때에 십자가 길로 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삶은 과연 어떤 삶일까요? 이것에 대해 3가지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의 뒤를 따르는 삶은
1. 기도속에 안식을 누리는 삶입니다.
35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에수님이 새벽에 일찍 일어나셔서 기도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전날 어떤 날을 보냈냐면 하루 전날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셔서 설교하셨는데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귀신 들린 자가 일어나서 예수님이 그를 간절히 기도하고 고쳐주셨습니다. 이후 예수님은 베드로의 장모의 집으로 갔습니다. 가서 열병이 나서 누워있는 그녀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정말 바쁜 하루를 보내셨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예수님의 사역이 끝나고 좀 쉬실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의 장모가 고침 받았다는 소식이 그 동네에 다 퍼져서 수많은 각색 병자들이 그 집 앞에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33절 온 동네가 문 앞에 모였더라
예수님이 그 사람들을 거절하지 않으시고 일일이 다 기도해 주시고 안아주시고 귀신을 쫓아주시고 그렇게 사역을 하셨습니다. 밤 늦게까지 그런 사역을 하신 겁니다.
저도 아침 6시에 교회에 출근해서 1,2,3,4부 예배를 드리고 청년부 목장 탐방가고 끝나면 목자 모임 들어가서 양육하고 집에 돌아가면 9시쯤 되는데 기진맥진하더라구요. 우리 예수님도 육체를 가지신, 한계를 가지신 사람이신데 이렇게 하루종일 사역을 감당하시는 게 참 피곤하셨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그 다음날 예수님이 새벽 일찍 일어나신 것입니다. 그리고 동네를 벗어나서 한적한 곳, 아무도 없는 곳에 찾아가셔서 기도하신 것입니다. 피곤한 육체를 일으켜 세워서 가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에게 기도가 가장 큰 안식이고 쉼이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디서 안식을 찾으시나요? 우리도 인생이 피곤하고 힘듭니다. 이리저리 안식을 찾습니다. 알람을 꺼놓기도 하며 나를 안 찾았으면 좋겠다고 늘어지게 늦게까지 잠을 자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 보상 심리로 맛집을 찾아다니고 보고 싶었던 영상을 찾기도 하는데 찝찝한 피곤함이 더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진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방해도 없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위한 한적한 곳입니다. 그것이 교회이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거실일수도 있고 사무실이나 차 안일 수도 있고 화장실 일수도 있습니다. 아내가 직장 생활하며 아이들 양육하며 하루하루가 바쁩니다. 지친 아내가 집에서 기도하는 장소는 주방 냉장고 바로 앞입니다. 제가 냉장고 문을 열까 싶어서...^^ 저는 냉장고에서 안식을 찾는데 아내는 냉장고 앞에서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하루하루가 바쁘니까 그 자리에 앉아서 주님을 부르는 것이 자기에게 쉼이고 안식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통하여서 하나님의 뜻을 묻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안식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 우리에게도 안식인 것입니다.
올 여름에도 경상도로 TT를 갈텐데 잠자리도 불편하고 먹는 것도 입에 맞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 죄고백이 있고 하나님의 임재가 있으니까 깊은 안식이 거기에 있습니다. 요즘 호텔로 호캉스를 간다고 하는데 저희 아이들도 그렇게 좋은 곳에 데려가서 맛있는 것 먹이고 집에 돌아오면 이렇게 좋은 곳에 데려다 주셔서 감사해요. 이런 적이 없습니다. 집이 왜이렇게 안 좋냐고 불평을 합니다. 그래서 T캉스(TT바캉스)를 가셔야 합니다.^^ 그러면 아이들이 집에 돌아와서는 집이 좋구나 얘기 합니다. ^^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때 안식이 있는데 내 뜻대로 행하면 허수고밖에 안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예수님이 드러나신 사역을 많이 하신걸로 보이지만 사실 사람과의 관계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더 많은 시간을 쓰셨습니다. 사역이 너무 바쁘셔서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셨고 사역이 조금 일찍 끝날 때면 산에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잠이 들지못하는 십자가 들기 전 그 밤에는 번민스런 밤에 기도하셨습니다. 기도 못할 핑게를 대지 않으시고 기도를 계획하셨습니다.
그 어떤 핸드폰이든 하루 종일 쓰면 충전을 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 영혼도 말씀과 기도로 충전해야 하는 겁니다. 기도를 통하여서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우리 가운데 채워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기도 가운데 안식하셨는데 제자들은 어땠을까요?
36시몬과 및 그와 함게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그들이 새벽같이 일어나서 예수의 뒤를 따랐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들도 기도하러 가는 것일까요? 원문에 보면 이들이 순종하는 마음으로 예수를 따른 게 아니고 사냥감을 쫓듯이 추격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찾으려고 샅샅이 뒤졌다는 의미입니다. 새벽에 일어나니까 예수님이 안보이니 예수님을 쫓아가시 시작하는 겁니다. 이유는 이것 때문입니다.
37만나서 이르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예수님, 지금 이곳에서 한가하게 기도할 때가 아니에요, 지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찾고 있는데~ 빨리 가셔야죠. 주님,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하고 예수님을 재촉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께는 기도가 너무 큰 안식인데 제자들에게는 기도가 큰 낭비로 보이는 겁니다. 제자들이 왜이랬을까요? 병든 사람이 너무 안스러워서 고쳐주시라고 한걸까요? 그게 아니고 가버나움은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 때문에 예수님의 인기가 절정에 올라서 예수님을 찾는 사람이 많습니다. 다 예수를 부르짖고 있습니다. 이 인기에 제자들이 취해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의 열광에 제자들의 마음이 뺏겨버린 겁니다. 본인이 뭐라도 된 줄 아는 겁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일인데 자기가 뭔가 된 줄로 착각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성공적인 사역으로 인하여서 그들의 마음에 뭔가 특권의식이 생긴 것입니다.
요즘 큐페시즌입니다. 예전에 동료 사역자들과 큐페에 가는 길에 한 전도사님이 자기가 군생활할 때 다니던 교회가 근처에 있으니까 한 번 들렸다 가자고 했습니다. 큰 군교회였는데 문이 잠겨있어서 밖에서 사진만 찍고 돌아가려고 하는 찰나에 중령 한 분이 오시는 겁니다. 그 교회 담임 군목이셨는데 자세히 보니 너무 신기하게 저의 신학교 선배인 겁니다. 너무 놀라고 반갑고 신기해서 선배님~ 불렀더니 자신을 얼마 전에 부임한 담임 목사라고 중령인데 장군처럼 소개하시더라구요. 제게 요즘 뭐하냐고 묻길래 작은 소리로 부목사해요 겸손하게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약간 놀라는 눈치였습니다. 네가 목사를 한다고? 같은 신학교를 나왔고 같은 기숙사 방도 썼는데 네가 목사라고? 그 이유는 제가 당시 자유로운 영혼이어서 기숙사 생활할 때 새벽기도 가기 싫어서 화장실에 숨어 있고 방이 더럽지? 하고 선배가 말하면 하나도 안 더러운데요~라고 말하곤 했던 사람이었는데 제가 목사가 되었다니 참 놀라운 것이었던 겁니다. 어디서 사역하니? 라는 물음에 옆의 사역자가 저를 대변해서 김양재 목사님이 담임하시는 우리들교회에서 사역하십니다 라고 얘기해주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때부터 그 선배님의 눈빛이 달라지는 겁니다. 네가 거기에 어떻게 갔냐?는 식입니다. 그 대단하고 유명한 목사님과 교회인데... 옆의 목사님이 청년국의 총괄 목사님이라고 하면서 청년들이 3000 명이 넘는다고 하니 저는 뭐 그런것까지 얘기하고 그래... 했습니다.^^ 그 선배가 정말 대단하다고 하면서 저를 달리 보는 게 느껴지더라구요. 그 때 제 안에 소명의식이 불타오르는 게 아니고 특권의식이 생겼습니다. 아까까지는 선배님~ 하다가 갑가지 목에 힘이 들어가면서 선배님, 제가 연락 한 번 드릴게요~^^ 했습니다. 이게 사람들의 인기와 사람들의 박수에 휘둘리는 우리 인생인 것 같습니다. 사람들에게 안식을 찾으려는 제자들은 예수님을 재촉합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야 하는데 예수님보다 앞질러 가려고 합니다. 내 생각과는 다른 자리에 계실 수도 있는데 그래서 조급함이 올라와도 조금 기다려줄 줄 알아야 하는데 그냥 내가 원하는 그 자리에 예수님이 빨리 오시길 재촉하는 겁니다. 승진과 합격, 성공와 인정의 그자리에 예수님 빨리 오시라고 새벽부터 예수님을 쫓아간 것입니다. 그래도 이렇게라도 주님을 찾는 것이 아예 무시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가버나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지 않고 제자들을 찾았다면 그들은 예수님을 쫓아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도 내 힘으로 무언가 할 수 있다고 하는 일에 대해서는 예수님이 어디 계시든 상관하지 않잖아요. 우리가 왜 예수님을 찾겠습니까? 내 힘으로는 도저히 안되는 그 사건을 통하여 주님을 찾는 것입니다.
(지난 주 부목자님 큐티 나눔
저는 아들이 세 명 있습니다. 둘째는 제게 큰우상이었습니다. 그 아이를 통해 제 만족과 자랑을 채우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가출과 학교를 거부하고 경찰서에 불려다니고 술과 담배등 말할 수 없는 여러가지 일들을 겪으면서 지내오고 있습니다. 저는 아들을 이해하지도 공감하지도 못하고 오히려 폭력적인 방법으로 붙잡아보려고 했습니다. 이보다 더 힘든 지옥이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정도로 너무 지옥 같은 수년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2024년 6월 둘째 아이는 스스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생을 마감하기 1시간 30분 전 마지막으로 통화를 했고 통화 끝에 아이는 '아빠, 사랑해' 라고 말했습니다. 그 한마디가 지금까지도 제게는 감사로 남아있습니다. 처음에는 고난이 축복이라는 말이 전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왜 이런 고난이 축복일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돌아보면 이 고난으로 인하여 저는 십자가를 바라보게 되었고 하나님께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저는 깊은 우울 속에서 여전히 세상만 바라보며 살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둘째 아이 장례가 잡히지 않고 영안실에 머물던 날 큐티 말씀이 시편23편 이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그 말씀을 읽는 순간 저는 처음으로 바닥에 주저 앉았습니다. 그동안 말씀을 많이 들었지만 제 자아가 너무 강하여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날은 달랐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힘은 없고 하나님이 정말 나의 목자이시구나 라는 고백이 제 안에서 터져 나왔습니다. 그 때 제 마음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도 자식을 잃은 이 아픔이 이렇게 큰데 하나님은 나를 자녀로 삼으신 분이니 그 마음은 얼마나 더 아프실까? 하나님께서 제 아픔과 제 모든 상황을 아신다는 위로를 깊이 받았습니다. 저에게 목장은 은혜의 자리입니다. 많은 기도를 받았고 그 기도로 우리 가정이 무너지지 않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자녀를 잃는 큰 고난을 겪었지만 낙심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누군가 우리 가정을 위해 기도해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기도가 안식이십니까?
적용질문
- 안식을 얻고자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큐티, 목장, 기도가 진정한 안식이 되고 있습니까?
- 특권의식으로 누리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2. 한 사람의 길 위를 걷는 삶입니다.
38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39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그들의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쫓으시더라
예수님은 기도를 통하여 사명을 재확인 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주를 찾습니다 라는 달콤한 유혹을 거절하시고 다른 마을로 가서 전도하자 내가 이것 때문에 왔다 라고 하십니다. 익숙하고 편한 길, 사람들이 많은 그 길을 떠나 험난할 지라도 영혼 구원의 길을 가십니다. 그래서 한창 인기가 좋은 가버나움을 떠나서 갈릴리 전 지역을 다니시면서 복음을 전하십니다. 갈릴리 지역이 작은 동네가 아닙니다. 갈릴리 전 지역은 제주도 보다 크기가 조금 작습니다. 지금도 제주도를 걸어서 전 지역을 다닌다고 생각하면 다니기 어려울 것입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전지역을 다니셨는데 가버나움이란 동네는 평지가 있어서 길이 잘 닦인 동네입니다. 예수님이 큰 길, 넓은 길 다니시면서 전도하셔도 충분합니다. 사역도 편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산악 지대인 갈릴리로 가셔서 좁은 길을 걸어가시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제자들이 기쁘게 따랐다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불평했다는 말도 없습니다. 어떤 길이든 그냥 예수님이 가자고 하시니까 따라 갔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너 왜 이렇게 기쁘게 안 따라와! 왜 그렇게 감사가 없어' 라고 하지 않으셨을 것 같습니다.
우리 자녀가 교회를 군말 없이 따라와 주는 것도 참 고마운 일인데 '너 왜이렇게 기쁘게 안 와!' 혹시 이러지 않습니까? '왜이렇게 기쁘게 큐페 안가? 엄마가 차려준 것 왜 기쁘게 안먹어?' 라고 하는 부모가 아닌지 한 번 돌아보기를 바랍니다.
한 마을님이 자신의 청년 아들에게 네가 무엇을 하고 다니든, 게임을 하던 말든, 집에 빨리 들어오든, 늦게 들어오든, 술을 마시고 다니든 아빠가 네게 뭐라고 하지 않겠다. 그런데 딱 하나만 약속하자. 주일에는 예배 드리고 목장 가는 것만 약속하면 네가 뭘하든 아무런 터치도 하지 않겠다고 하셨답니다. 마을님도 아들의 구원을 위해 뜻을 정한 단호함을 보여주셨습니다. 아들도 그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했다는 것이 참 고맙습니다. 어떤 분은 교회 가자 한마디 하는 것이 목구멍까지 나왔다가 그 한마디를 못하고 입을 다무는 것 이것이 뜻을 정한 단호함일 수 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구원을 위한 길입니다.
예수님은 마을을 다니시면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너에게 천국이 임할 것이다 하시며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 길 위에서 예수님을 좋아하고 반기는 사람만 만났을까요? 예수님을 비아냥 거리고 조롱하고 무시하는 사람도 만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길을 피하여 돌아가지 않으시고 그 길을 계속 걸어가십니다.
그래서 마가는 그 길 위에서 만난 한 사람을 언급합니다.
40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예수님이 마을과 마을을 옮겨 다니는 그 길을 지나면서 한 나병 환자를 만나십니다. 이름도 없습니다. 나병은 참 잔인한 병입니다. 몸의 조직이 썪어가면서 통증을 느끼지 못하게 되는 병, 손가락이 떨어져 나가고 얼굴이 일그러져도 통증을 못느끼기에 치료법도 찾기 어려운 병입니다. 몸의 통증 뿐만 아니라 그 사람에게 참기 힘든 고통은 사람들에게 완전히 버림 받음을 겪어야 하는 상처입니다.
나병은 당시 하나님께 저주 받은 병 취급을 받았습니다. 나병에 걸리면 저주 받은 사람이란 인식을 가지게 되는 겁니다. 레위기 율법에 따라 그들은 마을 밖으로 격리되어 홀로 외로이 살아야 했습니다. 누구와도 교제할 수 없었습니다. 가끔 예배를 위해 회당에 올 수 있었지만 회당에서 한 구석에 앉아 고개 숙이고 있다가 돌아갈 뿐이었습니다. 나병 환자가 당당하게 사람들 틈을 비집고 나와서 예수님, 저좀 고쳐주세요. 저 여기 있어요. 라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마을 어귀에 많은 길들이 있었겠지만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넓고 잘 다듬어진 길을 이 사람을 걷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람이 많으니까. 이 사람이 다니는 길은 사람들이 안다니는 뒷골목 같은 냄새나고 쓰레기 더미가 던저져 있는 그런 길이었을 것입니다. 나병 환자는 그런 길만 다닐 수밖에 없는 외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넓고 편한 길만 가셨다면 어떻게 그를 만날 수 있겠습니까? 나병 환자가가 다니는 그 길 위로 예수님이 걸으신 겁니다.
영적 나병에 걸린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 나병에 걸린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이 괴롭게 해도 본인은 잘 모르는 무딘 분들도 계십니다. 더 나아가 무감각한 분들이라고 한다면 죄를 지어도 양심의 가책을 못느끼고 타인의 상처를 이해하지도 못하고 본인이 중독인데 중독인지도 모르고... 우리 다 그런 모습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옆에 있으면 안 마주치고 싶고 피해가고 싶습니다. 외롭든지 말든지 내버려두고 싶은 것이 우리 마음일 것입니다. 실패와 버림 받음과 온갖 더러움과 아픔과 상처의 길 위에 서서 걷 앉고 주저 앉기를 반복하는 그 나병 환자를 주님은 보시기 위해 그 길 위를 걸어다니신 것입니다.
우리들교회 청년들이 매년 130 커플 이상 씩 결혼합니다. 교회 본당이나 탄설홀에서 결혼식하기를 사모해서 결혼 예약이 금새 마무리가 됩니다. 왜 그렇게 교회에서 결혼하기를 사모할까요? 그것은 한 사람의 구원을 위한 결혼 예배가 되기를 원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영상)
적용질문
- 구원을 위한 단호함을 가져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 원칙을 지키려고 거절해야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 내가 전해야 할 그 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3. 불쌍히 여겨 손을 내미는 삶입니다.
40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성경을 많이 알았던 율법학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그렇게 무시했는데 바닥까지 내려간 고난을 당한 이 나병환자는 주님께 꿇어 엎드리는 축복된 인생이 됩니다. 상처가 다 드러나고 아픔이 다 드러나는 게 부끄럽고 수치스러울 수 있지만 감추어진 사람보다는 훨씬 더 축복된 인생입니다. 왜냐하면 드러난 것 때문에 자신의 더러움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병환자가 간구합니다. '주께서 원하시면' 얼마나 겸손한 표현입니까? 당장 고쳐주세요가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으십니다. 당시에는 병원도 없고 의술도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았으니까 얼마나 많은 환자들이 있었겠습니까? 많은 환자들은 예수님께 병고침 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왔습니다.
우리도 아프고 병들고 힘들고... 그것이 사실 우리의 삶입니다. 우리 중 안 아픈 분들이 누가 있습니까? 어디라도 다 아픕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침 받기 원하는데 문제 해결을 위해서 간절히 부르짖는데 나병환자처럼 자신의 더러움을 알고 깨끗하기를 간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는 천국의 복음이 들려서 자신의 더러운 질병보다 자신의 죄가 깨끗하게 되어 구원 받아야 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인 것을 알게되는 것입니다.
그의 고백이 예수님이 뭐라고 반응하십니까?
41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그가 깨끗함을 받을 수 있는 근거는 그의 간절함 때문이 아닙니다. 나병환자를 불쌍히 여기시는 주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배에 나왔기 때문에, 목장에 가기 때문에, 큐티하기 때문에 깨끗함을 입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주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이 얼마나 크고 귀한지 우리가 예배에 오는 것도 귀한 믿음으로 봐주십니다. 우리의 공로가 아닌데 목장 가는 것도 우리의 믿음으로 봐주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너무 주님의 은혜가 큽니다.
불쌍히 여기다는 긍휼(compassion)인데 고통을 함께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 아픔은 내장이 끊어지고 뒤틀리는 듯한 큰 아픔을 동반한 슬픔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이 그를 보면 너무 마음이 슬프신 겁니다. 불쌍한 것은 단순한 감정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에게 손을 대십니다. 율법이 금한 일을 그 사람에게 행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따듯한 온기를 전해 주셨습니다. 긍휼은 찾아가서 만져주고 안아주고 실천까지 가는 것입니다. 한 나병환자는 이름이 기록되있지 않고 세상에서 그의 이름이 지워졌습니다. 아마 그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는 거죠. 그의 이름이 뭔지도 모릅니다. 관심보다는 무시가 익숙하고 돌봄보다는 거절이 당연하게 여겨져서 굳어져있는 그의 마음을 주님께서 들여다 보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름도 없는 그의 이름이 아마 천국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오늘도 지금 이 곳에 있는 한 죄인을 향한 주님의 긍휼의 마음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다 몸도 아프고 마음도 힘들고 삶이 매일 매일 지쳐가고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로서 온갖 짐을 지고 살아가고 마음에는 상처가 있지만 상처인 줄도 모르고 문제가 문제인 줄도 모르고 그것이 뒤범벅되어 그냥 하루하루를 소진하며 살아가는 한 죄인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인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긍휼이 헬라어로는 내장이 끊어질듯한 고통인데 히브리어로는 라함으로 자궁이라는 뜻에서 나왔습니다. 즉 어머니가 자궁 속에서 자신의 아이를 품고 그 모든 아이를 온 몸으로 느끼고 본능적익고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길러내는 것을 하나님이 긍휼이라는 단어로 쓰셨습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죄인, 이름도 무엇인지 모르는 그 죄인을 마치 어머니가 배속에 아기를 품어내듯 하나님이 지금 품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난 주 한 청년과의 통화하는데 수화기 너머로 그 청년의 아버지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얼마나 술을 많이 드셨는지 꼬부라진 소리로 소리치시며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을 딸에게 계속하시는 겁니다. 그 얘기를 들으니 너무 화가 나서 당장 집에서 나와라 아빠 상대하지마 하고 제 귀를 씻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조차 모르고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생각이 들정도로 너무 화가 일어났습니다. 전화를 끊고 말씀을 보는데 나병환자가 너무 싫은 겁니다. 어떻게든 안 마나고 싶다. 같은 길 위에서 부딪히면 돌아가고 싶다. 전화도 하고싶지 않다. 나병환자를 우리 예수님은 어떻게 찾아가셨을까? 나는 상대하고 싶지도 않다 하는 화가 일주일 동안 있었습니다. 다시 전화해보니 지금은 잠잠하시다고 합니다.
1부 예배 후에 한 성도님이 '목사님의 더러움은 뭐예요?' 물으시더라구요. 그 얘기에 마음이 너무 무거웠습니다. 나도 나병환자였는데 어릴 때부터 아토피를 심하게 앓으면서 내가 저주 받은 인생이다. 버림 받은 인생이라고 생각하며 예배당에 와도 한켠에 앉았다가 그냥 집에 가는 것이 일상이었던 나병환자였는데. 그리고 10년전 우리들교회에 왔을 때 목장 집사님이 우리들교회 어떻게 왔냐는 물음에 솔직하게 얘기하기 부끄러웠지만 면접 때 목사지만 야동을 못 끊고 본다는 고백에 목사님이 너무 기뻐하시면서 그런 것을 나누어서 뽑아주셨다는 것을 얘기하니까 그 집사님이 저는 여러 목사님을 보며 목사님의 위선으로 상처를 많이 받았는데 목사님이 인간적으로 이렇게 솔직하게 나눠주시니 제가 너무 위로를 받습니다. 감하하다고 나눠주셨습니다.
저도 나병환자였습니다. 우리들공동체 담임 목사님이 이렇게나누는 것을 받아주시고 들어주시지 않았으면 저도 말씀이 들리는 공동체에 올 수 없었던, 길 위에서 주저 앉는 것을 반복하는 나병환자 였는데 그것을 잊어버리고 나병환자가 싫다는 마음이 일어나더라구요. 저도 나병환자였는데 나병환자가 싫다고 화내는 저를 용서해주세요 하는 기도가 나왔습니다.
우리가 다 나병환자로 이곳에 부름을 받았습니다. 아무도 받아주지 않는 그런 삶이었지만 목장에서 우리를 받아주었고 안식을 누렸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우리 죄를 깨닫게 되는 은혜를 입고 깨끗함을 입었습니다. 우리 주변에 주님이 또 한 명의 나병환자를 두고 그 위를 함께 걸어가라고 하십니다. 이 초청을 거절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이 우리르 제자로 부르신 것은 그 길을 함께 걸어가자고 부르신 줄 믿습니다.
청년 헌신 예배로 드리는 오늘 왜 이 말씀을 주셨을까 생각해 봅니다. 청년이 참 안식이 필요할 때입니다. 인생이 지치고 매인 삶이 많습니다. 정말 하나님과의 기도 속에서 안식을 찾아야 하고 나병환자같은 청년들, 나병환자같은 가족들, 그 한 사람을 위해 찾아오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 한사람을 위해 그 길을 걷는 것, 무시하고 외면하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 불쌍히 여기며 손을 한 번 내밀수 있는 적용을 하는 청년들, 이것을 위해 기도해주시라고 이 말씀을 주신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예수님은 나병환자에게 돌아가서 절대로 나음 받았다는 것을 소문내지 말고 제사장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면서 깨끗함을 받았다는 입증을 받고 공동체로 돌아가라는 신신 당부를 하십니다. 그런데 나병환자는 곳곳에 소문을 내고 다닙니다. 그것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셔야 하는 사명 때문에 아직 때가 되지 않았는데 병고침이 다인줄 알고 드러나면 안되니까 예수님은 오히려 마을에 들어가지 못하고 한적한 곳에서 지내실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나병환자로 은혜를 받아도 순종하지 않고 내 욕심을 부리는 게 있는 것입니다. 또 내 마음대로 하는 게 있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 예수님을 한적한 곳으로 내보내는 악을 저지르는 게 있더라구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나병환자입니다.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한적한 곳으로 내모는 인생이 아니라 그 한가지를 꼭 순종해서 예수님을 삶의 중심으로 모셔드리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적용질문
- 내 원함을 내려놓고 주님의 원함을 구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요?
- 깨끗함을 받기 위해 드러나야 할 나의 악함과 죄악을 무엇인가요?
- 불상히 여김 받기를 원하는 것은 무엇이고 손 대는 적용을 해아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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