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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교회_김양재목사님/주일설교녹취기록

예수님의 자취를 따르는 삶(이효숙 권사님)

by relife_es 2026. 1. 18.


베드로전서 2:18-25
18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19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22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23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우리들교회는 큐티하는 교회, 고난이 축복인 교회, 또 가정을 살리는 교회, 목장 참석율이 최고로 높은 교회로 소문이 나 있는데요, 제가 고난을 통해서 목장에서 양육을 받고 가정이 살아나고 지금까지 가정을 지키게 된 증인이기 때문에 이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저의 약재료는 남편의 25년 외도와 이중생활, 부도, 감옥, 큰아들의 비행, 가출, 자퇴, 정신병원 입원, 둘째아들의 ADHD, 학교 안가기, 큰아들의 혼전 임신으로 손녀 키우기 등입니다.
본문 제목이 예수님의 자취를 따르는 삶인데 목양국에 딱 맞는 제목입니다.

예수님의 자취를 따르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1.큐티를 해야합니다.

18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사환들아 라고 부르는데 고대에는 종이나 하인들을 이렇게 불렀다고 합니다. 관용하는 주인들 뿐만아니라 까다로운 주인들에게도 순종하라고 하는데요, 이 시대에는 신분의 차별은 없지만 어디나 질서라는 것은 존재합니다. 인간이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해 순종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자이신 예수님도 인간의 질서로 낮아져서 내려오셨기 때문입니다.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라고 하시는데 주인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까다로운 자 라는 것은 성격이 안 좋은 사람이 아니라 부당하게 대우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주인의 인격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역할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주인들에게 순종하라고 하는데 결혼하면 남편의 질서에 순종하기가 힘들죠. 어떻게 순종해야할까요? 그래서 큐티를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들교회에서 말하는 큐티는 조용히 말씀을 묵상하는 큐티가 아니고 질문하고 생각하는 구속사적인 큐티입니다. 내게 일어난 모든 일이 성경 따로 삶 따로가 아니라 내게 일어난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께 묻고 생각하는 것인데 나의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이 사건에 대해서 뭐라고 생각하시는지 그 답을 듣는 것입니다. 내게 일어난 일이 100% 옳으신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라면 내가 모르는 하나님의 숨겨진 뜻을 들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저도 하나님의 숨겨진 뜻을 들어야 했습니다. 이런 큐티를 하지 않고서는 부당하게 대우하는 윗질서에 대해서 순종하기는 너무 힘든 일입니다. 어느 정도는 자신의 이익을 생각해서 참을수는 있겠지만 본인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에 대해서는 참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임계점이라는 것이 있는데 조금만 더 가면 성질, 상태, 결과가 완전히 달라지는 경계선을 말합니다. 우리의 인내에도 이러한 임계점이 온다는 것이지요. 결혼의 임계점에 달하면 이혼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외도하는 배우자, 생활에 무책임한 배우자, 언어 폭력에 신체적 폭력을 쓰는 배우자, 또 피를 말리도록 괴롭히는 배우자들과 결혼을 지키는 것을 우리의 성품의 인내로는 한계가 올 수밖에 없습니다. 더이상은 못참는다, 나는 최선을 다했고 나의 결혼은 여기까지다 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겠지요.

저도 인내가 힘든 결혼생활을 지나왔습니다. 구속사의 큐티를 안했더라면 100번 이혼했을 결혼인 것 같습니다. 불신 가정에서 청소년 때 친구를 따라간 교회에서 수련회 때 방언도 받고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말씀의 가치관이 없어서 저의 삶은 이원론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교회 생활은 즐겁고 열심히했지만 S대를 갔고, 부자인 남편과 결혼해서 유학도 다녀오고 부자 동네에 살면서 세상 사람들과 하나도 다를바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고난이 시작되었는데 친정 엄마가 백혈병으로 투병후에 돌아가셨고 남편은 엄마의 장례를 치루고 온 날 가출했는데 알고보니 여자 문제였고 이후 남편의 외도와 이중생활은 25년이 지속되었습니다. 인격적인 부모님과 고생을 모르고 자랐기에 낮아져보지 않은 제가 이런 남편에게 순종한다는 것은 너무 힘든 것이었습니다. 겉으로는 웃고있지만 속으로는 교만한 삶이 바로 저였습니다. 남편에게 순종한다고 생각했지만 제 생각에 합당하다고 여겨지는 것에는 순종하고 합당하다고 여겨지지 않는 것에는 순종하지 않는 생활을 했습니다. 내 가정의 윗질서가 남편이라는 것을 말씀을 통해 알게 되었지만 관용하는 남편이 아닌 부당한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이 힘들었고 저의 인내로는 불가능했습니다. 남편의 바람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살고있던 12층 아파트에서 뛰어내리고 싶었습니다. 이혼을 할 수밖에 없다, 길이 없다 라고 생각했는데 큐티를 하게되었고 말씀도 보고 적용도 하면서 내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많이 노력했지만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의 이중 생활이 완전히 드러났습니다. 그 날 말씀이 요한계시록1:9 말씀이었는데요,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위하여 밧모라는 섬에 있었더니 라는 말씀이 제 말씀으로 들렸습니다. 제가 요한처럼 남편의 이중 생활이라는 밧모 섬에 갇혔구나 그리고 저는 그동안 이기적으로 나만 생각하고 살았구나 이제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이 고난으로 동참하게 되는 것이구나 하고 저의 말씀으로 들렸습니다. 이렇게 해석이 되니 남편과의 삶이 힘들었지만 내가 얼마나 남편 질서에 순종하지 못하고 고난 당하는 믿음의 공동체를 무시하고 차별하고 산 뼈속까지 100% 죄인이라는 것이 깨달아지고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내 죄보다 내 고난이 약하다는 것이 인정되었습니다. 이런 은혜를 누렸지만 이후로도 변하지 않는 남편의 부당함에는 매일매일의 큐티가 없었더라면 인내할 수 없었을 것 같습니다. 하루하루 큐티하면서 아, 하나님이 이런 분이구나 매일 알아가니까 하루를 견디고 지금까지 가정을 지켜올 수 있었습니다. 오랜 고난으로 큐티를 해오면서 이제는 큐티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특별한 일이 없어도 큐티인을 펼치고 큐티를 하는데요, 오늘은 무슨 말씀일까? 하는 기대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어떤 날이든 간에 오늘은 주님이 뭐라고 내게 말씀하실까? 하는 설레임이 있습니다. 제 표정이 편안해보이죠? ^^ 비결은 매일 아침 펼치는 큐티입니다. 큐티는 욕심을 가지치기 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육적, 정신적, 영적 모든 욕심이 해당됩니다.
예전에 저는 완벽주의, 강박주의가 있어서 큐티를 할 때 큐티를 틀리게 하면 어쩌지? 또 적용하는데 잘못하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과 죄책감이 있었는데 주님이 나의 영적 수준이 여기까지라면 이런 나를 들으시겠구나 하는 게 점점 깨닫게 되었고 주님께 나의 솔직한 마음을 드릴 때 주님이 받으신다는 것이 인정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내가 큐티를 더 잘해야된다, 믿음이 더 좋아야 한다 하는 것도 영적 욕심이다 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그냥 그 날의 말씀을 쓰면서 큐티를 하고 내게 주어진 상황에서 한가지를 적용하며 가고 있습니다. 제게있어서 큐티는 떠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제가 오늘 아침 큐티인을 펼치고 앉았을 때 이전까지 가지고 있던 저의 모든 삶의 고정관념을 깨고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는 가를 듣고 적용하면서 새롭게 주님이 인도하시는 곳으로 떠난다는 생각이 듭니다. 과거는 돌이킬 수 없고 현재는 붙들 수 없고 미래는 알 수 없다고 하는데 큐티를 하는 것은 지금 현재 앉아서 직전까지의 모든 과거에 대해서 회개하고 돌이키고 현재를 붙들 수 없는 우리가 주님을 붙드는 것은 만물을 붙드는 주님을 붙드는 것이고 그래서 알 수 없는 미래이지만 오히려 미래를 준비하고 대비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미래에 대해서도 염려하지 않고 지금 현재, 오늘 하루를 가장 잘 살게 할 수 있는 비결이 바로 큐티인 것입니다.
또 큐티는 주제파악 이라고 하면 뭔가 안되는 사람이 자기 수준이나 역량을 아는 것만 생각하는데 주님 안에서 나를 부르신 사명을 다하는 것이 주제파악입니다. 내가 하지말아야 할 일을 안하고 내가 해야할 일을 하는 것이 바로 사명인 것입니다. 큐티하면서 어제 오늘 내일을 다 살 수 없는 우리가 오늘 주님이 하라는 것 하고 하지말라는 것 안하고 가면 나에게 주신 오늘 하루를 사명 감당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쌓이게 되면 영육 간에 실력이 쌓일 수밖에 없겠지요.
제가 양육할 때 낭중지추 라는 말을 많이합니다. 주머니 속에 송곳이라는 말인데 주머니 속에 송곳이 들어있으면 삐져나올 수밖에 없잖아요. 그런 것처럼 새해가 되어 직분이 새로 주어지는 이 시간에 내가 믿음이 있는데 직분이 안주어졌다, 이런 억울한 평가를 들었다. 이래서 마음이 속상하신 분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럴 때 낭중지추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내가 영육 간에 실력이 있다면 지금 비록 안 보인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나의 믿음과 모든 것들이 인정 받는 시간이 올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내 믿음 없음과 실력 없음에 대해서 겸손히 회개하며 주님을 만나가는 시간이 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 주님은 무능하고 무력한 나를 만나주시는 분임을 아시죠?^^
큐티를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십니까? 새해가 시작되었는데 큐티를 매일 해야겠다는 결단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큐티의 원조 이 자취를 따라서 우리 목사님 저서 '날마다 큐티하는 여자'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들교회 다니면서 큐티를 안한다는 것은 보물 창고에 들어와서 보물을 하나도 못 줍는 것과 같습니다.

적용질문
-나에게 부당하다고 여져지는 사람이나 환경은 무엇입니까?
-그 사람이나 환경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큐티를 하며 나의 죄를 보는 길밖에 없다는 것이 인정되십니까?
-날마다 큐티를 하며 영적 실력을 쌓고 계신가요?

2.양육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공식적인 양육과정으로 기초양육, 씽크양육, 양육교사, 예목1,2 등이 있지만 모든 목장과 교회 모임이 양육을 받거나 하는 구조로 되어있습니다.

19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부당하게 고난을 받았는데 저는 예전에는 고난이 축복이 아니라 고난이 없어야 된다는 마음으로 어떻게 하면 고난을 안 당할까 애쓰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고난이 축복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시점에서 고난에 대해 부당하게 고난을 받는 것인지, 죄가 있어 매를 맞는 것인지 헷갈리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고난이든 고난은 힘드니 고난을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부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감옥에 간 사람 이야기로는 감옥에 가면 자기가 죄가 있어서 감옥에 들어왔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합니다. 이런 부당한 고난에도 하나님을 생각하며 슬픔을 참으면 아름답다고 하십니다. 내가 받는 부당한 고난에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은 나의 고난을 말씀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힘든 상황에 하나님을 주문처럼 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왜 이 고난을 내 삶에 주셨는지 그 이유를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 죄를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로마서에서 하나님의 뜻의 과녁에 맞지 않는 모든 것이 죄라고 하셨습니다. 최근 해외 관광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있는 절을 들렸는데 그들이 뭔가를 웅얼웅얼 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이단 중에는 주문을 외워 마음의 평안을 얻으려 하는 곳도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교회를 다니며 너무 많은 성경 구절을 암송하고 있어도 일어나는 모든 일을 남탓을 하기만하고 말씀이 내 삶으로 내려오지 않는다면 성경 말씀을 주문처럼 외우는 것과 같습니다. 큐티는 말씀으로 주문을 외우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나의 삶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일어난 사건을 뭐라고 하시는지, 그 숨을 뜻을 듣고 적용하는 것입니다.
선을 행함으로 인데요,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칭찬이 없고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참으면 하나님 앞에 아름답다고 하십니다.
저의 남편처럼 바람 많이 피우는 부당한 남편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 남편이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되어도 칭찬이 없고 저같이 참고참으며 조강지처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예수님을 생각하는 회개나 돌이킴이 없어도 아름다운 것일까요?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100% 죄인이고 하나님의 기준에 죄에 걸리지 않는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하면 온전히 선을 행하는 것이 되겠습니까? 선은 내가 죄인 임을 인정하고 하나님께로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이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양육을 받으면서 저는 온전히 남편에게 피해자죠,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남편은 가해자, 저는 피해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양육에서 요셉 형들의 얘기도 나오는데요, 내가 가해하는 사람일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모범생으로 항상 인정만 받던 제가 양육을 통해 죄인 임을 깨닫게 된 것이 기적 중의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전같으면 입을 꼭 다물고 있었을 저의 죄와 수치를 고백하면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일대일 양육 중에는 당시 운영하던 학원에 대해서 경제적으로 풍요한데 학원을 그만 두면 어떻겠냐는 양육자의 권유로 다 정리하게 되었는데 그것을 제가 풍족한 상황이었는데도 이 결혼이 언제 깨질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돈을 벌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때 큐티 숙제를 통해서 말씀을 듣고 정리를 하게 되었고 양육교사 과정 중에는 이사야 말씀으로 제게 닥쳐 올 부도에 관한 준비도 하게 해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영혼 구원을 위해서 선을 행하는 우리들교회 양육의 과정이었기에 이후의 고난에 대해 하나님이 다 아름답다고 해주신 것 같습니다. 양육의 힘이 놀라워서 저의 가치관은 점점 더 말씀의 가치관으로 바뀌게 되었는데요, 예목도 받고 제가 양육자로 양육을 하면서 점점 더 나도 죄인 너도 죄인의 가치관으로 바뀌었습니다. 왜냐하면 남편이 이중 생활을 하고 부도나서 돈도 너무 없는 상황에서 주눅들수 있잖아요. 그런데 나도 죄인이고 너도 죄인이라는 마음이 되어서 모든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찌들지 않고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또 문주경 전도사나 첩을 두고 사는 아프리카 여자들의 삶을 보면서 나는 당할 수 없다, 그 시대니까 그랬다, 아프리카니까 그렇다 라고 생각하는 가치관에서 이 시대에 한국에서 나도 당할 수 있는 일 이구나 라고 시각이 변했고 내연녀로 지냈던 분들과 목장을 함께 즐겁게 했습니다. 제가 조강지처 인데도 같이 목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조강지처로 구원으로 이끄시는 구속사의 삶이라면 내연녀로서의 하나님이 구원해 가시는 과정을 믿었기 때문에 같이 목장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전에는 남편과 사이가 좋은 분을 보면 너무 부럽고 내가 너무 비참하고 나는 어쩌다가 이런 삶을 살게 되었나 하는 마음이 들었는데 점점 가치관이 변해가면서 이제는 안타까운 마음도 생기는 거에요. 저렇게 사이가 좋다가 말씀이 안 들리면 어떻게할까? 그것은 제 속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가 너무 커지고 귀하게 되니까 이런 담대함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많은 간증에서도 고백했듯이 저는 사랑을 받지 못하는 여자입니다 라고 고백하는 레아의 당당함이 생겼습니다. 저는 남편의 바람이 10년이 넘어가는 것에 대해서 섭섭함이 아주 조금 있었습니다. 이전에는 말씀 따라 살지 못해서 이지만 그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남편의 문제는 해결해주시지 않는 걸까? 생각을 했는데 새가족 교사를 하면서 태도가 아주 부정적인 새가족 한 분이 오셨습니다. 남편이 바람 피웠다고 하면 남자가 바람 안 피우는 사람이 어디있어 하시는 거에요. 그러면 부도가 났다고 하면 그건 기본이지 하면서 고난을 많이 겪으신 듯했습니다. 어떻게 하나 했는데 남편이 10년이 넘게 같은 여자랑 이중 생활을 한다고 했더니 그 분이 싹 돌아 앉으셔서 참 힘들었겠네 하시는 거에요. 그 때 저의 10년이 넘는 남편의 이중 생활에 대한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어차피 남편의 바람으로 이중 생활의 고난을 겪어왔는데 한 8년이다 하면 애매했을텐데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이라 하니 제 말을 들으셨습니다. 접시 물의 고난 보다는 나일강의 고난이 빛을 발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저의 10년의 약재료가 쓰여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그것을 알고 하나님이 옳으십니다 깨닫게 된 것이죠.
목장에서 내 얘기를 한다는 게 쉽지 않은 분들이 있을 것 같은데 이 의미를 안다면 입을 열어 나의 이야기를 해보시면 어떨까 생각됩니다.
큰아들은 비행에 오토바이로 날마다 사고를 쳤습니다. 밤 2시에 거실 유리창을 깨고 베란다 난간에 매달려서 죽는다고 하고 칼을 들고와서 소동을 벌이고 자퇴하고 정신과 폐쇄병동에 입원도 했습니다. 우리교회에서 문제 자녀를 둔 부모들이 자녀에게 하는 무릎 꿇고 사과하는 적용을 저도 했고 그는 나보다 옳도다의 고백이 이 아이의 수고가 아니었다면 깨닫지 못했을 죄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릴 때 남편의 바람을 해석하지 못하고 내 생각과 감정에 갇혀서 우울에 빠져 있던 제 자신의 모습을 보게되었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사명을 모르니 연민에 빠져 있던 저를 보았습니다. 그런 저를 아들이 수고해주어서 깨닫게 해주었으니 옳도다가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 큰 아이가 너무 애를 많이 먹였는데요, 그 때 너무 힘든 상황에 이 아이의 얘기를 맘껏 할 수 있는 사람이 남편 밖에 없더라구요. 그래서 누워있어도 남편이 있어야 된다는 목사님의 얘기를 실감했습니다.
현재 재혼해서 살고 있는데도 아이가 병이 걸리고 나니까 무능한 친아빠가 너무 아파했다는 어떤 분의 얘기도 들었습니다. 남편이 너무 무서워서 아이가 상처도 많이 받았는데 아이가 이런 무서운 아빠가 아니었으면 더 한 사고까지 쳤을거라고 하더라구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남편이 있고 결혼을 지키는 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특히 자녀가 있으면 꼭 더 결혼을 지켜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적용 질문
-양육을 어디까지 받으셨나요?
-모든 만남에서 양육을 하거나 양육을 받고 있나요?
-나를 향한 어떤 불편한 소리도 나의 양육을 위한 것임을 알고 받아들이나요?

3.목장에 가야 합니다.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이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고 했는데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참는 것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고 합니다. 선은 자신이 죄인 임을 알고 말씀 앞에서 회개하는 것인데요, 이런 회개하는 사람이 고난 앞에서 당신이 옳다는 심정으로 고난을 참을 수 있습니다. 이 부르심은 성경에 보면 항상 우리와 너희라는 공동체가 나오는데 공동체를 통해서 하나님이 역사하심을 말씀하고 계시고 하나님이 한 사람, 훌륭한  믿음의 인물에 걸어가는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많은 목장을 거쳐왔는데 처음에 목장은 즐겁기도 했지만 쉽지 않고 많이 힘들었습니다. 별별 소리를 다 들어내는 것이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곳이 바로 나를 부르신 곳이고 오픈해서 내 얘기를 하면서 저도 본을 따라가고 저도 본을 끼치며 왔습니다. 목장에서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이런 고난으로 하나님께서 부르셨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 얘기 저 얘기도 다 하겠지만 자기의 죄를 고백하는 곳이 목장인 것 같습니다.
목사님이 설교에서 해주셨던 이야기 인데 해외의 유명한 목사님이 큰 음란 사건으로 목회를 그만 두는 일이 생겼습니다. 신실한 사모님이 남편 목사님의 음란을 위해 기도, 금식 등 안해본 것 없이 다 했는데 딱 하나 못한 것이 남편의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오픈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오픈은 정화조를 덮을 잔디가 없는 사람은 조금은 쉽겠지만 육적으로든 영적으로든 무엇이든 조금 더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하기가 힘듭니다.
첫 목장에 참석했을 때 은혜도 넘쳤지만 너무 무시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때는 부도나기 전이었는데 어떤 분은 제 옷의 라벨이 무엇인지 옷을 들쳐보기도 하고 가방도 어떤건가 보고... 너무 교양이 없고 무시되었습니다. 경제적으로 너무 어려웠던 한 분은 환승으로 몇 백원을 절약할 수 있는 얘기를 한 시간을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이 아까운 시간에 계속 그 얘기를 하는 게 너무 답답해서 지갑에서 만원을 꺼내서 집사님, 그만하시지요 라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저도 망하는 시간을 지내면서 여러 목장을 가면 이런 죄인들의 각종 모습을 보면서 제가 얼마나 교만하고 차별이 많은 사람인지를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한 시간 동안 몇 백원 아낄 수 있는 이야기를 하실 수밖에 없는 그 집사님의 아픔으로 저도 내려갈 수 있었습니다. 이 목장이 아니었다면 이런 저의 밑바닥을 절대로 보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또 장애 아이를 키우며 가시는 집사님이 장애아를 받아들이는 것도 힘든데 매일 위급한 상황을 살아내야 하고 감옥 같이 묶여있어야 하는 답답함을 견디어야 하고 이 모든 것이 이 아이가 낫거나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끝이 안보이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을 같이 느꼈고 내가 수준이 안되어서 하나님이 이 고난을 내게 허락하신 것이 아니구나 내가 당연히 받아야 되는 고난이라는 것이 인정되었습니다. 또 어떤 집사님은 간암 말기이신데 남편이 바람을 피우신게 드러났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죽음을 앞두고 있으니까 이런 문제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럼에도 그 분이 남편의 바람을 견디지 못해서  집을 나갔다 들어왔다 난리가 났습니다. 이렇게 큰 고난이 온다고해서 각자의 죄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느꼈습니다. 그렇게 다른 분의 나눔이 나를 살리게 되고 또 나의 지질한 이야기가 다른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약재료가 되는 것을 점점 더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들교회 목장은 예수님의 자취가 곳곳에 넘쳐납니다.

22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23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목장은 죄를 범하지도 아니하시고 거짓도 없으신 예수님이 주인이십니다. 매주 목장은 말씀을 가지고 나눕니다. 목장에도 온갖 욕이 난무해서 하나님이 계시면 이럴 수 있나, 이러면 이혼하겠다, 죽겠다, 목장을 떠나겠다 하며 위협이 넘치지만 이 모든 것을 감당하며 갈 수 있는 것은 우리들 목장이 예수님의 자취를 따라가며 사는 이들로 모였기 때문입니다.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이렇게 매주 하는 목장에서 모든 얘기를 실시간으로 나누고 가니 이전같으면 아예 이야기도 안했을 텐데 정리해서 나눔을 해야지 생각했는데 점점 양육되어 가면서는 사건도 휘몰아쳐오고 나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증인이라는 확신이 들면서 모든 얘기들을 나누면서 올수 있었습니다.
큰 아이가 정신 병원에 입원하고 매일이 전쟁이었고 작은 아이까지 집에 있는 모든 리모컨, 핸드폰, 노트북, 탁자 등을 다 부수고 욕설이 난무하는 그야말로 침 삼킬 틈이 없는 시간을 계속 보냈습니다. 저도 육적, 정신적으로도 너무 지쳐서 기도할 틈도 없이 숨을 헐떡이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요, 그 때 모든 이야기를 알고 있는 목장 식구들이 나보다 더 나와 우리 가정을 위해서 애타게 기도해주셨던 때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목사님과 목장 지체들의 그 사랑을 기억하여 결초보은의 심정으로 교회의 부르심에 어떤 것이든 순종하려는 마음입니다.
목장의 한 집사님이 믿음도 없으시고 연약한데 남편이 혼외자를 낳는 사건이 오니 그야말로 난리가 났습니다. 집사님을 진정시킬 수도, 그 남편을 되돌릴 수도, 낳은 아이를 다시 되돌릴 수도 없는 상태였습니다. 고심 끝에 목사님과 통화 중에 그 집사님은 아무래도 가정이 회복된 목자님께로 옮겨드리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하고 아주 겸손하고 신중한 태도로 말씀 드렸는데 목사님이 아무 말씀을 안하시더라구요. 제가 뭘 잘못했는지를 모르겠더라구요 그래서 왜 그러신걸까 하는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 집사님은 목원으로 있게 되었는데 한 장면이 생각납니다. 냉난방이 안되는 휘문 강당에서 수요 예배 후 기도 시간에 제가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미친듯이 외쳤던 그 순간이 생각납니다. 저는 항상 교양있게 기도했는데 그 날은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교양이 완전히 무너진 모습으로 기도했습니다. 주여!~~~ 악~~~~ 이렇게 미친~처럼 기도했는데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그 집사님을 살려달라고 안그러면 그 집사님도 죽고 그 가정도 죽고 아이들도 죽는다고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는 그 순간은 저도 나무에 달려 집사님과 그 남편의 죄를 담당하면서 나도 그 집사님도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려는 것이었고 우리 주님이 채찍 맞으신 것처럼 기도의 고통으로 저도 나음을 얻고 오랜 기간에 걸쳐서 그 기도의 응답으로 집사님도 나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간증하신 집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그 일로 목자로서 목장은 내가 할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 하는 게 아니구나를 깨닫고 수고하는 가족과 마찬가지로 목원이 나의 양육을 위해서 수고하는 것임이 믿어졌습니다. 그래서 이후 어떤 목원을 만나게 되든 그 목원을 내가 변화시키려고 애쓰는 것 보다 그 목원을 통해 내 죄를 깨닫기에 힘썼더니 저도 양육되고 목원들도 변화되는 것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그제서야 목사님의 침묵이 무슨 의미인지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전에 애를 먹이던 큰아들의 혼전임신을 알게 되었을 때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생명을 지키고 결혼을 하게 된 것은 우리교회에서는 고등학생인데도 낙태하지 않고 아이를 낳은 간증을 저도 아이도 많이 들었었거든요. 그렇게 믿음의 선배들이 한 간증이 있어서 이전 같으면 양과 같이 길을 잃어서 이래서 아이를 못 낳고, 저래서 아이를 못 낳고 포기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런 강한 공동체를 만났기 때문에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와서 저희 손녀가 3학년이 되어서 어린이 큐티인 간증 필자가 되었습니다. 아들 부부도 목장을 즐겁게 다니고 둘째도 태어나서 그 정신 없던 아들이 남편과 아빠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으니 기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동안의 목장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끝이 안보이는 것같은 오랜 고난에서 육적으로도 회복시켜 주셔서 돈도 주시고 남편도 외국에서 온라인 목장에 참여하고 작은 아들도 목자로 교회 스텝으로 섬기는 은혜도 주셨습니다.
길을 잃었던 우리 가정도 주님께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요즘 같은 나이 친구들을 만났더니 믿는 친구들이었지만 부모님 돌보는 문제와 자신의 노후에 대해서 걱정이 많더라구요. 그런데 저는 염려가 안됩니다. 제가 뭐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고 우리에게는 SG에 가도 목장이 있고 혹시 여러 상황이 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one of them의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요양 병원이든 주간보호센터이든 어디를 가도 목장을 하면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명 따라 와서 사명 따라 살다가 사명 따라 죽는 것이라고 목사님께서 계속 말씀해주시는데요 우리의 노후가 어떠하든지 어디에 있든지 그것이 사명이라면 사명 따라 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병에 걸려도 노년의 시간이 와도 길을 잃지 않고 영혼의 목자, 감독 되신 예수님께 돌아올 수 있는 목장이 있어서 너무 감사합니다. 우리들교회 목장 만만세입니다. 목장에 꼭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적용질문
-배정된 목장이 하나님께서 부르신 장소라고 생각되시나요?
-목장이 즐거우신가요? 힘이 드신가요? 힘들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나의 힘든 사건을 목장에서 온전히 오픈하고 있나요?

예수님의 자취를 따르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큐티하셔야 하고 양육 받으셔야 하고 목장에 가야합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면서 나의 죄를 위해서 죽으시고 살아나셨습니다. 저의 삶에 이 비밀이 펼쳐지게 해준 절대 공헌자는 남편입니다. 이 남편의 수고가 아니었다면 이 엄청난 천국을 어떻게 제 마음에 품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너무 미안하고 고맙고 뜨겁게 사랑합니다. 예배 드리는 우리 모두에게 내 죄가 깨달아지는 은혜가 임하고 또 당신의 고난을 약재료로 예수님과 바울 사도의 자취를 따라가시는 분, 이 아름다운 덕을 널리 선포하시는 우리 담임 목사님의 자취를 우리도 따라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