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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교회_김양재목사님/주일설교녹취기록

그가 살아나셨다(김양재 목사님)

by relife_es 2026. 4. 6.

제목: 그가 살아나셨다!
본문: 마가복음 16:1-11
설교: 김양재 목사

1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2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3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4 눈을 들어본즉 벌써 돌이 굴려져 있는데 그 돌이 심히 크더라
5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6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7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8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9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10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알리매
11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세속사와 구속사는 전혀 다르잖아요. 사실 기독교는 이세상과 함께 할 수 없는 가치관이에요. 무슨 뜻입니까? 이세상은 악하기 때문에 심판을 몰라요. 심판을 모르면 회개는 더더욱 몰라요. 그러면 악한 이세상밖에 모르기 때문에 인생의 목적이 행복이 되어서 악착같이 공부하고 벌고 뺏고 쓰고 모으고 죄의식이 하나도 없으니까 누릴 수록 죽으면 끝이야 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부활할까봐 겁나는 가치관을 세상이 가졌어요. 그래서 코웃음을 쳐요. 광대한 하나님은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어요. 그래서 나의 육의 시력으로 볼 수가 없어요. 해달별이 떨어질 때 인자가 구름 타고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 하셨어요. 이 얘기는 육이 무너져야 영이 세워진다는 거에요. 이 말은 점으로 낮아지신 예수님의 렌즈를 그 때부터 끼게된다는 거에요. 그래서 십자가와 부활은 한단어에요. 십자가 없이 부활을 알수가 없어요. 그러니 부활은 이론으로 연구해서 믿어지는 것이 절대 아니에요. 이세상은 수많은 논리로 유명한 사상가와 학자들이 부활을 증명하고자 하지만 다 실패했어요. 왜냐하면 논리는 또 다른 논리가 나오면 바뀌기 때문이에요. 자기들끼리 또 싸워요. 부활은 생명인데 생명이 어떻게 논리로 증명되겠습니까. 생명은 생명으로밖에 증명되지 않아요. 그래서 증명이 아니고 증인이 필요한 거에요. 그가 살아나셨다의 증인은 무엇이고 누구에게 보일까요?

1.안식 후 첫날 막달라 마리아에게 보이십니다.

1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2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안식일이 지났다고 합니다. 주님을 너무 사랑해서 무덤 자리를 봐 두었다고 합니다. 아리마대 요셉도 무덤에 인봉하고 묘지 다 내주었지만 그것을 보아두었던 여자들입니다.
안식 후 첫날은 모든 복음서에 다 나오는 중요한 첫날인데 왜냐하면 안식일이 너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 때부터 구약의 율법의 안식일에서 신약의 부활을 기념하는 생명의 주의 날로 바뀌기 때문입니다. 이 날이 바로 부활절이고 날마다 주일이 부활절이기 때문에 따로 부활절 설교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매 주일이 부활절인 것입니다.

이 역사적인 부활절의 주인공은 1절에 보니까 막달라 마리아라고 합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 라는 말이 있어서 복수를 써야 하는데 원어에 보면 3인칭 단수를 썼습니다. 여인들이 왔지만 주인공은 부활의 스타 막달라 마리아 라는 뜻입니다. 왜 주인공이 됐을까요?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이 들렸었는데 주님 때문에 인생의 목적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 예수님을 다 저주받았다고 할 때 이 사람은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 그 무덤으로 갔습니다. 로마 병정의 노리개 창기로 일곱 귀신이 들렸던 마리아가 주님 때문에 살아났는데 무엇이 무섭겠습니까? 그리고 해 돋을 때 가려면 훨씬 더 일찍 캄캄할 때 출발하지 않았겠습니까? 사실 이 땅의 사랑도 죽음같이 강하다고 아가서 8장에 나옵니다.
그렇게 주님 사랑해서 떠났는데

3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새벽을 뚫고 담대함으로 갔는데 부활체인 예수님은 믿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돌문을 누가 굴려 주리요 하면서 염려 근심을 하는 겁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 하신 말씀 맞구요. 주님 사랑하는 것도 많은데 염려 근심이 많습니다. 저에게도 누가 돌을 굴려 주리요 하는 걱정이 믿음의 분량대로 시기마다 평생 따라 다니기도 합니다. 두려워 하지 말라가 성경에 365번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 중에는 제자들의 멸시를 무릅쓰고 노동자 1년 품삯에 해당하는 삼백데나리온을 들고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준비한 베다니 마리아가 나옵니다. 그녀는 올아비 나사로의 죽음을 겪으면서 부활에 대해 미리 양육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3일 만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다는 이 말씀이 액면 그대로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살아나시는 것을 믿었고 자기가 장례까지 치뤘기 때문에 시체를 보러 가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살아계셨을 때 이 마리아를 세상 끝날까지 기념하여 전파하게 하라는 최고의 칭찬을 하셨습니다. 말씀을 듣던 실력이 최고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마리아가 왜 안갔을까 생각해보면 이세상은 예수님과 대적이잖아요, 부활의 주님과는 대적입니다. 예수님도 바울도 다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니가 유대인들이 살아난 나사로를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때부터 죽이고자 했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 살아났다고 하니까 그 때부터 죽이고자 하는 모의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베다니 마리아는 공적인 자리에 안 나타나는 적용을 했다고 보여집니다. 안식 후 첫 날의 의미를 너무 잘 알고 있는 그녀가 예수님의 무덤에 안 가는 것이 쉬웠겠어요, 가는 것이 쉬웠겠어요? 예수님을 너무 사랑하는데 안 가는 것이 훨씬 힘들었겠지요. 그러나 이미 살아나실 것을 믿었기 때문에, 그러므로 주님이 시공을 초월하신 분이기 때문에 부활의 현장에 꼭 안 가도 되는 것입니다. 원래 믿고 온 예수님이 오신다고 하면 우리집 옆이라면 갈 수도 있지만 더 중요한 구원의 일이 있다면 굳이 안 갈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팔복산 기도회에 와야 되겠지만 더 중요한, 누가 아프다던가, 내 힘으로 안되는 일이 생기면 안 올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없는데 안 온 것은 이상한 것입니다. 이렇게 부활을 믿기에 부활의 현장에 안 오는 이런 모델도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부활을 확실히 믿고 있는 베다니 마리라 보다는 인류를 위해서 주님은 부활의 증인으로 그녀를 택하지 않으시고 우리하고 비슷하고 가까운, 너무 부족한, 그러면서 주님의 품으로 파고드는 어린 아이 같은 가장 낮고 낮은 창기, 막달라 마리아를 부활의 증인으로 택하셨습니다. 이렇게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걱정하며 오니까

4눈을 들어본즉 벌써 돌이 굴려져 있는데 그 돌이 심히 크더라

돌이 치워졌다는 것은 과거완료입니다. 내가 눈을 들었을 때 이미 돌이 치워져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지진이 났다, 천사가 굴렸다는 등 여러가지 현상으로 묘사했지만 4복음서 기자가 한결같이 말하고 있는 것은 빈 무덤이라는 것입니다. 정말 예수님의 시신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의 진정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갈 마음만 있어도 심히 큰 돌을 이미 제거해놓고 계셨습니다. 복음 전할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들 '그 사람은 안돼요' 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특히 제자들이 그렇습니다. 제자들은 돌아가신 무덤에 오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염려하면서도 간 여인들입니다. 그러니까 큰 돌을 제거해주시고 여인을 양육해주십니다. 믿지 않고 가지도 않는 제자들 보다는 이 여인들이 훨씬 나은 것입니다.

적용질문
-여러분은 부활이 확실히 믿어지세요, 머리로만 믿어지세요?
-부활의 증명을 원하세요, 부활의 증인을 원하세요?
-날마다 묘지 찾아가서 누가 돌을 굴려 주리오 하면서 죽은 자를 살핍니까? 그보다 더 중한 구원의 일이 있다는 것을 분별하세요?

그러나 이 부활의 증인에게는
2. 양육이 필요합니다.

5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6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에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이렇게 양육을 해주십니다.
우리가 부활을 왜 믿기 힘든가 하면 부활 장면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 이 땅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볼 수가 없잖아요. 예수님도 창조주이시잖아요. 그래서 아무도 직접적으로 예수님이 뼈가 되고 살이 되는 장면을 못 본 것입니다. 볼 수도 없고 본 사람도 없습니다. 나사로나 나인성 과부의 아들 사건은 살아나는 것을 사람들이 직접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잠시 후에 다시 죽었습니다. 그들의 살아남은 병고침 정도의 살아남 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체 이기 때문에 돌을 굴리지 않아도 나올 수 있는 분입니다. 양육하려고 돌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인들은 몸의 부활만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부활은 이 땅에서 유일무이한 것입니다. 그 분만 부활의 실체가 되신 것입니다. 창조주가 부활하셨기 때문에 창조적인 부활인 것입니다. 진짜 창조를 믿으면 사람이 창조적이 되게 되있습니다.
돌이 이미 치워져 있다고 하는데 그러면 이 때라도 부활을 믿어야 하는데 예수님을 그토록 사랑하면서도 믿지 못하는 증거가 여전히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기 때문인 것입니다.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부활을 믿지 못하는 증거가 계속 무덤과 시신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도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이 앞에 계신데 동산지기 인줄 알고 슬퍼했다고 하잖아요. 우리는 이렇게 무덤에 집착하고 시신에 집착합니다. 사별후 날마다 아름답고 비싼 꽃을 들고 묘지에 찾아가는 사람과 같습니다.
마릴리 몬로의 두 번째 남편이 전설적인 야구선수 조 디마지오는 9개월 간 결혼 생활을 했는데 마릴리 몬로가 한국 전쟁 당시 한국에 주둔한 미군 병사를 위해 전설적인 위문 공연을 하러 가서 질투심이 폭발해서 이혼했습니다. 그러고는 평생 그리워 하는 것입니다. 세번 째 남편인 아서 밀러도 유명했지만 몬로 사후에 조 디마지오는 매주 세번 씩 무덤에 찾아가서 꽃을 바쳤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혼 후 84살 까지 혼자 살면서 몬로를 그리워했다고 합니다. 죽을 때는 이제 몬로를 만나겠구나 했다고 합니다. 날마다 시신을 보고 위로를 얻으려고 한 것입니다. 전설적인 야구선구이니 인생의 허무함을 전했으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주께로 인도했을 것입니까. 이 땅에서 시체 찾아 삼만리하며 아까운 시간을 사명 때문에 쓰는 것이 아니고 무덤에서 다 허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간은 생명이고 생명은 예수님이기 때문에 시간 낭비는 예수님을 천히 여기는 것입니다.
어떻게 양육해주시나요? 놀라지 말라고 하십니다. 마태복음에는 무서워 하지말라, 누가복음에는 두려워 하지말라고 하며 살아나셨다고 하는데 모두가 두려워 하는 것입니다. 아주 용맹스런 병사들 조차도 두려움과 공포에 질려서 예수님이 살아났다고 하는데 부활도 온전히 믿지 못하는 이 여자들이 얼마나 무서웠겠습니까?
그런데 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 오직 여인들에게만 놀라지 말라고 양육해주시는 겁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잘나서가 아닙니다. 양육 받는 게 얼마나 은혜인지 모릅니다. 양육자가 좋고 나쁘고는 상관없습니다. 양육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택자로 인정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교만하기 때문에 여기서 10년 20년 설교 들어도 일대 일로 받는 양육을 경험하지 않으면 부활을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까지것 제 설교 아무리 혼자 들어서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인들에게 양육해 주신 것이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마리아야'하고 요한복음 20장에서 불러주시잖아요. 그러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만 집착하고 살아나신 예수님은 모르는구나' 하시는 겁니다.
이렇게 특별한 경험을 하지 않으면 그들이 그리스도로 믿는 부활의 주님은 그냥 나사렛 사람이고 가장 저주스러운 십자가 형으로 처형 받은 죄수 중의 죄수인 것입니다. 어떻게 그 사람을 구세주로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인간은 불가능하고 오직 부활의 경험을 해야 예수가 믿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수치의 회개 간증을 하면 여러분 가운데는 이상하다고 너무 지질하다며 무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타나는 것으로만 평가를 하니까...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녀도 잘 된 간증만 들은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 특별한 부활의 경험이 없으면 이렇게 솔직한 수치의 간증을 인정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어찌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동침한 사건이 예수님의 계보에 오른다는 것이 믿어질 수 있겠습니까? 제자들도 아무도 못 믿는 겁니다. 그렇게 양육을 받았는데도 부자 청년이 반듯하게 율법을 다 지키고 계명 다 지키고 십일조도 했다고 하는 이런 부자 청년이 재물 하나 내놓지 못해서 구원을 받지 못하면 제자들이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으리료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도 구원 받으면 부자 청년처럼 되고 우리도 예수 믿으면 부자 청년처럼 될 줄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고정관념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람으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들은 그래도 그만큼 낮아져있기 때문에 머리로도 메시아로 알고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부자 청년은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합니다. 본인이 하나님 위에 올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이 여인도 아직 부활의 실체를 모릅니다. 인간적인 사랑이 더 앞서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하십니다. 가난하면 천국을 보기가 그만큼 쉬워지기 때문입니다. 부자는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천국에 들어가기가 더 어렵다고 하십니다. 유대인도 제자들도 여인들도 우리도 사실 다 똑같습니다. 제자들도 처음에는 도망갔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은 여인들의 증언을 통해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고 특별한 체험을 했는데 믿음으로 부활의 주님을 알아본 게 아니고 택자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줄 믿습니다. 우리의 행위는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저 사람은 안돼, 이 죄는 틀렸어, 저 죄는 좋아' 이렇게 얘기할 게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양육해주십니다. '십자가에 못박힌 주님만 찾을 게 아니고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는 과거 수동태 직설법이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일으키심을 받아 부활하셨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더이상 무덤에 계시지 않고 따라서 무덤이 비워졌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대단한 탁월성과 우월성이 바로 여기 있는 것입니다. 모든 종교의 창시자들은 무덤을 성지로 참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창시자 주님은 하나님께서 일으키셨기 때문에 숭배 받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로 하나님의 광대하심이 드러난 것입니다. 예수님이 위대한 게 아니고... 죄로 인한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무덤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타 종교와 구별되는 결정적 차이인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자랑은 화려하게 꾸민 무덤이 아니라 초라하게 비워진 빈 무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택자가 아니면 누구도 부활의 주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이 특별한 경험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기 때문에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에 이른다고 하셨으니까 아주 쉬운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가난하고 마음이 겸손하면 주님이 필요하지만 부자 권세자들은 80년이 지나도록 뚫고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의 나라도... 제가 설교한다고 여러분들이 택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만세 전부터 정해졌으니까 택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잘난 척 할 것이 조금도 없습니다. 오늘 그 한 택자가 주님께 나오기를 바랍니다.
항상 모든 성경은 제 이야기 입니다. 여러분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저 역시도 하루 만에 간 남편의 죽음은 이 땅에서 가장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구원은 그보다 더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주님이 죽으셨는데 그보다 더 놀라운 구원이 있는 것입니다. 날마다 말씀을 보지만 순간적으로 이 여인들처럼 저도 죽은 예수님을 찾았기 때문에 하루 동안은 구원 되었다는 사실보다는 죽음 자체에 관한 인간적인 놀람이 더 앞섰습니다. 내가 30대에 과부로 산다는 이 편견의 심히 큰 돌을 누가 굴려줄까. 그러나 하루 만에 진리의 성령님의 도움으로 창조주가 말을 걸어주셨기 때문에 해석이 되었습니다. 부활의 은혜가 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들어두었던 말씀이 없었다면 제가 살아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저는 여전히 막달라와 베다니를 왔다 갔다 하면서 신앙도 혼란스럽게도 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진정한 인생의 나침반으로 삼고 살아갔기 때문에 지금까지 생명의 증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믿어야 됩니다. 주님은 무덤에 계시지 않고 죽음을 정복하신 분입니다. 죽은 남편 찾지 말아라 그가 구원 받고 부활했기 때문에 무덤에 있지 않다는 것을 제가 알았습니다. 어떻게요? 말씀으로요. 제 인생은 말씀이 저를 인도해온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창조주와 대화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말씀의 인도함을 어떤 수백명의 심리학자 상담가 의사와도 비교가 안되는 것입니다. 물론 상담도 받고 병원도 가야 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현대의 사회 문제가 그렇게 많은데 그 모든 것의 답은 성경 밖에 없고 성경만이 문제의 해결점이 된다는 것을 4대째 모태신앙으로 천국 갈 날이 가까운 저는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남편이 간 날의 그 말씀은 40년이 되오도록 저를 지켜주시고 보호하시고 사명으로까지 인도하십니다. 그까짓 말씀 하나가 뭐가 대단하다고 그러냐고 하실 분이 있겠지만 저도 남편이 죽은 그날 여전한 방식으로 하던 큐티로 하나님께 물어보면서 묵상한 것이 이렇게 쓰임 받을 줄 상상도 못했습니다. 당시 제가 신학도 안했고 목사도 아니었는데 창조주 하나님이 살려주신 얘기를 했습니다. 과연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활력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부활의 은혜입니다. 이 부활을 경험해야 모든 것이 풀리고 들리고 모든 것에 증인이 될 수 있는 줄 믿습니다

6...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천사가 '그가' 즉 예수님이 누우셨던 곳을 보라고 합니다. 제가 남편의 죽음을 겪고 나니까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되었습니다. 말씀의 권세가 얼마나 대단한지
에스겔 18:28그가 스스로 헤아리고 그 행한 모든 죄악에서 돌이켜 떠났으니 반드시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대로 회개하고 예수님 영접하고 갔기 때문에 반드시 살았다고 하십니다. 이 일이 그대로 일어났는데 30대 여자인 제가 엘리베이터도 없는 집에서 남편의 장례를 치뤘습니다. 시신이 3일 동안 안방에 있었습니다. 장지에 묻고 와서 남편의 시신이 누웠던 곳을 '보라' 하면 얼마나 무서웠겠습니까. 죽음이 이 땅에서 가장 무서운 고통이고 원수라면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살았다고 하는데 창조주가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왜 무서워합니까. 저는 그 때 아직도 새댁같은 30대 과부였습니다. 너무 연약해서 남편이 나만 걱정하다 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시신이 있던 자리가 하나도 무섭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슬프지 않았겠습니까. 무서운 것과 슬픈 것은 완전히 개념이 다른 것입니다. 슬프지만 남편이 예수 믿고 회개하고 갔으니 무섭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전한 방식으로 남편을 보낸 후에 저는 사람들이 다 가고난 첫날 안방에서 시신이 누워있던 그 자리에서 제가 혼자 잤습니다. 저는 이미 시신과 같이 2일을 안방에서 있었습니다. 이것이 죽음을 정복하신 부활의 은혜인 것입니다. 아들도 딸도 각자의 방에서 평소와 다름없이 잤습니다.우리 큰일났다. 이런 얘기 한마디도 안했습니다.  그날 말씀으로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말씀 읽고 내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고 해결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다음 세대를 위한 양육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이 사건 마다 어떻게 해석하고 가는지 다 보는 것입니다. 실수할 수 있고 질병에 걸릴 수도 있습니다.
남편이 하루 만에 간 것도 기가막히지만 안방에서 있다가 간 것도 제가 경험한 결과 하나도 무서운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구절에서도 말씀과 부활의 증인이 되라고 제 남편을 안방에 빈소를 차리게 하시고 가게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시신이 있던 자리에서 똑같이 30년을 더 살고 사역하게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그가 살아나셨다! 제가 너무 어울리지 않는 일을 한 겁니다. 이것이 부활의 은혜입니다. 죽음을 통과하게 되면 그 다음에는 어떤 무서운 일도 힘들고 두렵지만 해석해 갈 수 있는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예수님이란 얼마나 우리 인생을 바꾸실 수 있는 분인지 모릅니다. 주님은 누우실 필요가 없음에도 우리를 위해 누우셨습니다. 어두운 무덤에 누우셨던 것을 보라고 하신 것처럼 저도 남편의 구원을 위해 내 의지를 다 꺾고 누워야 할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구원을 위해 누워야 될 일이 있고 보라고 하기 위해 6시부터 9시까지 암흑 속에 누워 있어야 휘장이 찢어지는 간증을 할 수 있게 되는 줄 믿습니다.
천사가 보라고 한 첫 사람이 여인들, 막달라 마리라가 부활의 첫 증인이 되었습니다.
장례식에서 슬퍼하고 눈물을 흘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구원 받고 영생에 들어갔으면 슬퍼서 울고 난리칠 일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적용질문
-우리의 사건에서 죽은 예수를 찾습니까, 살아나신 예수를 찾습니까?
-교회를 다니고 큐티를 해도 아직도 죽음이 너무 두렵습니까? 간증을 들을 때 무시가 되세요, 부러우세요?
-양육에 참여하셔서 실제적인 부활을 경험해 보시면 어떨까요?

3. 사명 주시기 위함입니다.

7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나를 무서워하지 않게 양육 하시는 이유는 내가 잘 먹고 잘 살라고가 아닙니다. 이 땅이 가장 무서워하는 죽음을 정복했다고 이것을 전하라고 사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에게는 어떤 환경이라도 사명을 주십니다. 주님은 이 여인에게 엄청난 명령을 주십니다. 수제자 베드로에게 전하라고 하십니다. 세 번이나 부인했던 수제자 베드로를 회복시키시기 위해 이 여인을 쓰십니다.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먼저 말씀을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기 때문에 말씀 보고 큐티하며 적용하는 말씀 대로 되었네~ 제자들은 갈릴리는 처음으로 주님을 만났던 장소입니다. 실패해서 주님을 버리고 도망간 장소이기도 합니다. 솔로몬 시대에 건축비로 주었지만 두로 왕 히람도 가지기를 싫어했던 가불 땅이 갈릴리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그들의 고향 갈릴리에서 만나주십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어가셨을 때 베드로가 나는 이제 물고기 잡으러 간다고 하고 모든 제자들이 나도 나도 해서 3년 동안 그렇게 공들여 양육했는데 모두 물고기 잡으러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에게 다시 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너무 쪽팔리니까 '내가 먼저 가서 기다릴게' 하십니다. 정말 우리는 끝없이 참고 기다려야 됩니다. 예수님이 그곳에 가주심으로 가불 땅 갈릴리는 시쳇말로 완전히 주 안에서 강남 땅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에게는 가기도 싫고 생각조차 하기 싫은 곳이 갈릴리 입니다. 갈릴리 당이라고 멸시 천대까지 받았잖아요. 그러니 베드로는 갈릴리가 너무 싫습니다. 부활의 증인이라면 어떤 자리에서 은혜 주셨는가를 기억하면서 생각도 하기 싫은 사람, 만나기도 싫은 사람이 있다면 첫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아직도 그렇게 싫은 게 많고 그렇게 좋은 게 많고 이러면 아직 주님을 시체로 보고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연약함을 아십니다. '네가 싫어하니까 내가 먼저 기다리고 있을게' 하십니다. 내 삶의 자리에 예수님이 들어오시기만 하면 그것이 가장 일류의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가져도 예수님이 없으면 감사가 없습니다. 그러면 그곳을 천한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번 주 초원님이 평생 불교 믿으시는 어머니에게 '올 해 저 권사되었어요. 제가 설교하니까 한 번 오세요' 했더니 '권사가 뭐냐?' 물으셔서 '말하자면 삼성에서 임원되는 것이에요'했답니다. 그랬더니 몸이 그렇게 아프신데도 수요일에 오셨습니다. 맞습니다. 사명의 자리는 가장 일류의 자리입니다.

8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마태복음에 보면 양육 받고 사도들에게 큰 기쁨으로 소리쳣다고 합니다. 그런데 먼저 성격을 기록한 마가는 여인들의 기쁨의 감정을 쓰지 않았습니다. 도망하여 무서워했다고 불신앙적으로 묘사했는데 저는 이게 너무 이해됩니다. 죽음과 구원의 사건 모두가 놀라운 일이잖아요. 남편이 일년도 아니고 일주일도 아니고 하루 만에 구원되었는데 이게 얼마나 놀라운 일이에요. 죽음도 너무 놀랍고 구원도 너무 놀라우니까 이 때 기뻐할 겨를이 없는 거라. 이 말도 맞는데 나중에 다른 성경의 기자들은 결과론적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을 너무 사랑하지만 양육이 안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조건반사적으로 무서워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활의 현장에서 온 인류를 양육시키려면 이런 막달라 마리아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목장에서도 사건이 무서워 몹시 놀라 떨며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성도가 있다면 그 성도를 양육할 때 목장 모든 성도들이 부활을 경험하게 될 줄 믿습니다. 목장마다 베다니 마리아만 있다면 그것이 좋은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막달라를 택했을 때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9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제가 예수님이라면 부활체 몸을 누구에게 가장 먼저 보이고 싶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가장 잘 외쳐줄 사람이 똑똑한 사람이겠어요? 마음씨 좋은 사람이겠어요? 육이 무너져야 영이 들어가잖아요. 가장 비천한 막달라 마리아같은 사람에게 부활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이른 새벽에 제자들도 남자들도 안 가는 무덤에 갔습니다.
저에게도 막달라 마리아의 사모함이 있어서 혼자서 맞는 새벽이 무섭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모습을 보이셨지만 막달라 마리아의 사모함도 같이 역사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천사가 말씀을 기억하라고 양육해주시고 말씀을 기억하고 나서야 기쁨으로 무덤을 빨리 떠났다고 했는데 저도 남편이 세상을 떠날 때 무서웠지만 그 날 말씀으로 양육해 주시니까 살아났습니다. 이 말도 저 말도 다 사실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거 틀렸다 저거 틀렸다 하면서 세월을 낭비하지 마세요. 무덤을 향해 앉은 이도 막달라, 부활을 처음 보러 온 이도 막달라, 그러므로 인류에게 가장 알려진 마리아는 베다니 마리아가 아니고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역할이 다르다고 봅니다. 베다니 마리아는 주님이 알아주시는데 뭐가 더 필요하겠습니까? 미리 다 칭찬해 주셨는데...
무서운 죽음을 갑자기 겪은 저로서는 막달라도 너무 공감되고 말씀을 죽자고 본 저로서는 베다니 마리아도 너무 이해가 되고 좋아합니다. 그러니까 이 여인들은 직분도 없고 제자도 아니었지만 주님 자체로 사랑했잖아요. 2천 년이 지나도록 막달라 마리아를 알려지게 하셨지만 그당시는 부활을 믿지 않고 또 완악하게 믿지 않던 제자들인데 붙어만 있었더니 이 제자들을 쓰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 바울이 부활의 증인을 소개하면서 게바, 열 두 제자, 5백여 형제, 야고보, 모든 사도, 바울에게 보였다고 하면서 4복음서에서 모두 소개한 이 여인들을 바울은 소개하지 않더라구요. 너무 중요한 얘기인데 바울이 몰랐을리가 없는데 여성의 위치가 그만큼 열악할 때 부활의 첫 증인으로 여자 중에서도 창기, 그중에서도 귀신 들린 자를 택했다는 것이 주님이 부활하신 이유입니다.
제가 잘나서 목회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 주제를 너무 잘 압니다. 저는 개척 때부터 대놓고 우리들교회가 귀신 들리고 눌리고 아픈 사람들이 와서 예수님을 사모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한다고 했는데 그렇게 말하는 게 하나도 무섭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22년이 지난 지금 그대로 다 와서 치유가 일어났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서 막달라 마리아처럼 일곱 귀신, 돈 귀신, 음란 귀신, 술 귀신, 담배 귀신, 혈기 귀신, 여자 귀신, 남자 귀신 딱 일곱 귀신만 물러가기를 축원합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의 증인이 되었지만 결론적으로 하나님이 쓰신 일꾼은 예수님과 같이 동거동락하던 믿음이 없던 제자들이었다는 것. 다 택자라는 것입니다. 택자니까 양육의 순서가 조금 다르지만 ... 부활의 경험은 누구도 자랑할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적용 질문
-내 삶의 자리는 천합니까, 일류입니까? 사명의 자리를 사모하세요, 세상의 높은 자리를 목말라 하세요?
-여러분은 누가 여러분의 부활 간증을 들어줬으면 좋겠습니까? 막달라 마리아 같은 자입니까, 지식 있고 권세 있는 자입니까?

오래전 한 집사님 간증
목자님이 한 목원에게 병상에서 부활의 증인으로 감당하신 것이 너무 감동 받아 일주일 동안 일어났던 일들을 적어보내주셨습니다.
말기 암이었는데 의식을 잃었다가 입원해서 의식을 되찾고 그 때부터 일주일 동안 애통해왔던 구원의 대상자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불러 마지막 유언으로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믿음이 연약한 아들에게 교회 나가라, 공동체에 붙어 있던 딸에게 감사하지만 꼭 우리들교회 청년 예배와 목장에 나갈 것을 약속 받았습니다. 친정과 시댁 식구들은 너무 세상적으로 탁월해서 복음을 전하기가 너무 쉽지 않았습니다. 지방에서 화급히 달려온 큰 언니는 독실한 불교 신자인데 암으로 죽음을 앞둔 동생이 복음을 전하고 지방의 교회 이름까지 정해주며 나가라고 하니까 어쩔 수 없이 약속했습니다. 눈 뜨기도 힘들 정도로 기운이 진하여 있다가 복음의 불모지인 친정, 시댁 식구 한 사람, 한 사람 올 때마다 상상할 수 없는 우렁찬 목소리와 미소로, 안타까움으로 이 시대 최고의 축복이 암이라고 하면서 그 권세로 복음을 전하는 모습이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감동이었다고 합니다. 아들 친구가 왔는데 '세자야, 세자야 이것은 내가 하는 말이 아니야.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야. 이렇게 와줘서 고맙고 아들과 친구해줘서 감사해. 그런데 내가 너한테 부탁이 하나 있는데 꼭 들어줘야해. 들어줄 수 있지? 약속할 수 있지?' 하니까 그 아이가 엉겁결에 '네' 하니까 '이번 주부터 청년 예배와 목장에 꼭 나가줄래? 예수 믿어라. 내 부탁 들어줄 수 있지? 손가락 걸고 약속해. 도장 찍고 복사. 약속했다. 꽝꽝꽝.' 그리고 위를 향하여 '하나님 보셨죠? 아멘 세자야 너도 아멘해.' 하니까 '아멘'하니까 손가락 걸고 도장 찍고 복사하고 꽝꽝꽝 통과하고 하나님께 보고하고 이렇게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감동적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 하나 부르며 왜 빨리 오지 않냐고 오늘 꼭 와야 한다고 시간이 없다고 계속 재촉하며 몇 번씩 누구누구 출발했냐고 어디쯤 오고있냐고 확인하고 또 확인했습니다. 시간이 지날 수록 불려온 구원 받아야 할 영혼들이 온통 응급실을 가득채우고 숨가쁘게 복음이 전해지며 뜨거운 성령의 열기가 가득했습니다. 찾아온 사람 중에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은 손을 뻗어 재촉하며 자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라면서 자기가 하는 말은 자기가 하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시는 말이라고 반드시 예수 믿고 교회 나가겠다고 약속하되 서울에 있는 자들에게는 우리들교회와 목장을, 청년은 우리들교회 청년부와 목장을, 지방에 있는 자들은 가까운 교회에 이번 주부터 나가겠다는 약속을 받아냈습니다. 성령이 집사님께 임하여 전해지는 복음의 권세 앞에 어느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힘과 능력이 있었습니다. 임종 예배를 드린 후에 목장식구들을 바라보면서 모두들 여기 있지 말고 빨리 나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예수 믿고 교회 다니는 자들은 여기 있을 필요가 없다고 돌려보냈습니다. 집사님은 목자인 저를 보더니 토요일 말씀은 경계를 주셨고 어제는 도피성이었고 오늘 말씀은 뭐죠? 아! 슬로보앗의 딸들! 그 아픈 가운데 이 분이 큐티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평범한 목원이었으니까 '목자님, 김양재 목사님께서 저를 기억하실까요? 제가 한 번만 목사님을 안아보고 싶어요. 저의 간절한 소원이에요. 꿈을 꿨는데 목사님이 저에게 김은자집사 참 예쁘다, 너무 예뻐서 내 입에 넣어도 혀가 아프지 않을 정도로 예뻐, 천사처럼 예뻐.'그래서 내가 예쁠 것이 하나도 없는데 무엇이 예쁘실까 했는데 제가 복음 전하는 것 때문에 예쁘다고 하신 것이 깨달아졌어요.'라고 얘기했다고 합니다. 암투병 하면서 같은 아파트에 사는 파킨슨 병을 앓고 있는 아들 친구 엄마와 아들 친구를 전도하고 싶어서 또 오라고 연락을 했더니 그 사람도 아프지만 그동안 말 안듣다가 더 아픈 사람이 말하니까 휠체어에 그 엄마가 아빠와 아들과 셋이 다 온 것입니다. 또 복음을 전해서 다 교회에 나가기로 약속했습니다. 남편이 우리들교회 오지 않는 여자 집사님들의 남편, 목장 식구의 자녀 중 믿지 않는 아들들, 교회만 나가고 목장에 들어가지 않는 자녀들, 평소에 기도제목으로 올리고 구원을 위해 기도했던 모든 영혼 하나하나를 다 거론하고 불러들여 복음을 전했습니다. 또 저에게 '목자님, 제가 전할 자에게 복음을 다 전했어요. 모두 다 약속했는데 딱 한 사람이 거부했어요. 아무개에요. 그리고 오지 않은 사람도 딱 한 사람이 있어요. 이 좋은 축복을 주는데도 받지 못하니 어떻게해요? 할 수 없지요. 참 바보에요.' 했습니다. 정말 사명 감당하는 집사님의 모습이 너무도 안식과 평강이 넘쳐서 천사의 모습이 이렇겠구나 싶었습니다. 너무 신기한 것은 복음 전하던 시간에는 진통제를 투여하지도 않았는데 전혀 통증을 느끼지 못하셨다고 합니다. 다 전하고 다시 의식을 잃고 처치실로 옮겨졌습니다. 그런데 또 한 번의 기적을 허락하셔서 제가 수요 예배 끝나고 심방을 갔습니다. 가서 제가 '집사님' 부르니까 눈을 번쩍 뜨고 제가 천국에서 만나요 하니 혀로 아멘하던 모습이 생생합니다. 제가 가자마자 김은자집사 어쩜 그렇게 예뻐요. 정말 천사같아요. 이렇게 깨끗하고 마지막까지 사명 다하고 가는 은자집사가 너무 부럽고 나도 은자 집사처럼 천국 가고 싶어요. 은자 집사님이 꿈 속에서 들었던 말 그대로를 제가 했습니다. 다녀간 후 기적 같이 정신히 한 시간 쯤 돌아와서 그렇게 사모하시던 목사님이 다녀가셨다고 하니까 그 때 내가 무슨 옷 입고 있었어요? 목사님 뵈올 때 병원 옷 말고 예쁜 옷 입고 있었더라면 좋았을 걸 하면서 너무 수줍은 미소를 띄었다고 합니다. 남편 집사님이 꼭 전해달라고 하신 것은 마지막에 남편과 함께 임종하고 주님 품에 안기셨다는 것입니다. 부활의 증인이 아니면 이렇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목사도 권사도 아닌 한 평범한 목원 성도가 이렇게 마지막 병상에서 확신을 가지고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하나님을 부활의 증인되어서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큐티의 꽃은 적용이고 결론은 영혼구원인 것입니다.
저 또한 일개 집사 시절에 남편이 회개하고 천국 간 것 때문에 간증함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주께 인도한 것처럼 누구나 죽음 앞에서 이런 확실한 천국을 어떻게 보여주겠습니까? 죽음 앞에서는 거짓말 못합니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 헤밍웨이는 죽음 앞에서 권총 자살했습니다. 천국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암에 걸린 수많은 환자 앞에서 천국을 전할 기회라고 부르짖으라 해도 그 사명을 감당하는 게 쉽지 않아 보이는데 우리들교회에서 너무도 아름다운 죽음을 자주 경험하게 하시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그것도 직분도 없는 평범한 성도들이 헌결같이 천국이 있음을 확실히 보여주니 너무도 감사하고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더 확실히 알게되는 줄 믿습니다.

그가 살아나셨다의 주님은 증인으로 안식 후 첫날 낮고 낮은 막달라 마리아를 택하셨습니다. 그에게 양육이 필요합니다.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으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또 그 이유는 사명 주시기 위함입니다. 죽음을 정복한 부활의 증인의 사명을 감당해야 할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