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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교회_김양재목사님/주일설교녹취기록

모퉁이의 머릿돌 (이태근 목사님)

by relife_es 2026. 3. 17.

제목: 모퉁이의 머릿돌
본문: 마가복음 12:1-12

1 예수께서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지어서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2 때가 이르매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내니
3 그들이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4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였거늘
5 또 다른 종을 보내니 그들이 그를 죽이고 또 그 외 많은 종들도 더러는 때리고 더러는 죽인지라
6 이제 한 사람이 남았으니 곧 그가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이르되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7 그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산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고
8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던졌느니라
9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10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11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놀랍도다 함을 읽어 보지도 못하였느냐 하시니라
12 그들이 예수의 이 비유가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되 무리를 두려워하여 예수를 두고 가니라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고 합니다. 버림 받은 인생, 무너진 가정, 뿔뿔히 흩어진 가족들 혹은 한 집에 살고는 있지만 서로 소 닭보듯 남보다 못하게 사는 우리 인생들도 과연 모퉁이의 머릿돌이 될 수 있을까요? 오늘 주신 말씀이 남에게 주신 말씀이 아니라 나와 우리 가정에 주신 말씀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바울의 영어식 표현은 PAUL, 베드로는 PETER, 야곱은 JACOB이라고 부르는데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은 사무엘 상 17장에 나오는 소년 다윗을 모델로 한 작품입니다. 역사적 문헌들을 살펴보니 르네상스의 꽃을 피웠던 이탈리아의 피렌체 대성당 뒷편에는 오랜 세월 비바람을 맞으며 방치되었던 대리석 하나가 있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당시 그 돌을 가리켜서 거인 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높이는 약 5M나 되었고 무게는 6톤이나 나갔지만 문제는 그 대리석이 크기에 비해 폭이 너무 좁아서 거기에 뭔가를 새기는 것이 여간 어렵지 않았다고 합니다. 앞서 두 명의 조각가 들이 12명의 대 선지자 중의 한 명을 조각하려고 작업에 들어갔는데 첫번째 조각가가 다리 사이의 부분을 조각하다가 그만 대리석의 결을 잘못 만져서 대리석 하단에 큰 구멍이 나고 말았습니다. 겁을 먹은 조각가는 작업을 중단했고 약 12년 후 다른 조각가가 2차 시도에 들어갔지만 이미 뚫려버린 그 구멍과 너무 얇은 대리석의 폭 때문에 몇일 지나지 않아 금새 작업을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당대 가장 유명했던 대선배 레오나르도 다빈치 조차 그 대리석을 가리켜 쓸모없는 돌로 취급을 했었는데 20대의 젊은 미켈란젤로가 쓸모없는 돌, 그 버려진 돌에 생명력을 불어넣었습니다. 마치 사무엘 상 17장에 나오는 어린 소년 다윗이 거인 골리앗을 굴복시킨 것처럼 이 일화는 미술사에 길이 남는 반전의 역사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쓸모없는 그 돌, 더이상 아무도 반겨주지 않을 것같은 우리들의 인생도 주님께서 함께 해주시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될 수 있다고 하십니다.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려면
1. 수치와 조롱을 잘 감당해야합니다.

1 예수께서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예수님께서 또 비유로 말씀하기 시작합니다.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는 아직 들을 준비가 안되어 있기 때문에 해 줄 말은 많지만 자꾸 비유로 말씀해주시는 것입니다.
마치 목장에서도 솔직하게 터놓고 말을 하면 속이라도 시원할텐데 아직은 들을 준비가 안된 목원이기에 자꾸 비유로 또는 예를 들어서 또는 말을 빙빙 돌려서 설명할 때가 종종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실 수밖에 없었던 그들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장로들을 가리킵니다. 어제 큐티인 말씀에 그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말하기를 당신은 도대체 무슨 권위로 그런 일을 하느냐고 따져 묻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 세 그룹들은 마치 한 세트처럼 다닐 때가 많습니다. 마가복음 8장 예수님의 수난이 처음 예고되었을 때, 마가복음 11장 예수님이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쫓아내셨을 때, 마가복음 14장 예수님을 체포하고 심문할 때, 마가복음 15장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겨줄 때 이 세 그룹은 마치 종합세트처럼 함께 움직이는 것을 보게됩니다. 그들은 당시 산헤드린을 구성하고 있는 핵심 멤버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대제사장들은 성전의 제사와 행정을 장악한 사두개파 중심의 실권자들이었고 당시 서기관들은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바리새파 중심의 지식인들이었고 당시 장로들은 명망있는 가문의 수장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이 함께 모였다는 것은 종교, 법학, 사회적 명성들이 똘똘 뭉쳐 예수님의 권위에 도전장을 던진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산헤드린을 구성하고 있는 양대 산맥인 사두개파와 바리새파는 신학적인 노선과 가치관이 마치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었고 장로들은 자신들의 기득권과 이권을 위해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하며 처세술에 능한 자들이었습니다.
마치 우리 가정들이 깨어지고 무너지면 남편과 아내들은 서로 가치관이 다르다며 이혼을 부르짖고 자녀들은 어디에 줄을 서야하나 눈치를 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어떤 비유로 말씀하시는지 1절 말씀을 이어서 계속 보겠습니다.

1 예수께서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지어서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마가복음 4장에 씨 뿌리는 비유가 있었다면 오늘 큐티 말씀은 청지기로 부름 받은 농부에 관한 비유입니다.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 때 산 울타리를 두르고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세웠다고 하십니다.
포도원의 농부들이 한 게 아닙니다. 포도원의 농부들이 일을 함에 있어서 부족함이 없도록 여러 환경들을 미리 다 세팅해주셨는데 농부들은 어느 순간부터 청지기가 아닌 주인 행세를 하면서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합니다.

저는 1년 전 광주 채플의 담당 목사로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광주 채플이 세워지는 데 벽돌 한 장 제 손으로 올린 것이 없습니다. 울타리를 두르고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세우는 데 제가 직접 관여한 것이 없습니다. 초원이라는 산 울타리가 이미 세 개나 둘러진 상태였고 즙 짜는 틀처럼 광주 채플 성도들의 기도와 눈물이 있었고 망대와 같은 직분자들이 상당수 세워져 있었기에 맨 땅에 헤딩을 한다기 보다는 포도원의 농부 비유처럼 이미 여러 조건들이 갖춰진 상태에서 광주 채플 포도원의 농부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농부는 포도원의 주인이 아니고 청지기라고 하십니다. 어느 순간부터 제가 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광주 채플 헌신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저에게 먼저 물어보시는 것 같습니다. 담임 목사님이 광주 채플에 담당 목사로 저를 보내시면서 근심 걱정이 많으셨을 것 같습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청지기의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하는데 판교와 휘문에서 17년 간 사역하면서 4번이나 치리를 받은 것처럼 광주채플에 내려가서도 또 사고치는 것은 아닌지 담임 목사님이 걱정하셨을까요? 안 하셨을까요? 맞습니다. 아마 오늘도 걱정하시면서 영상을 보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2 때가 이르매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내니

'때가 이르매' 수확 시기가 다가왔습니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냈다고 하십니다. 포도원 주인이 한 종을 보냈다는 것은 농부들을 괴롭히려는 것이 아니라 회개의 열매를 얻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내 욕심이 채워지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지만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회개의 열매가 맺히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십니다.

광주 채플에 내려와서 크고 작은 여러 사건을 만날 때마다 담임 목사님과 함께 했던 그 시간들을 문득 문득 생각할 때가 많아졌습니다. 예전에 치리를 받을 때는 먼저 나의 억울함을 생각할 때도 많았었는데 광주채플이 세워지고 본의 아니게 지난 1년 동안 치리 1호와 2호, 3호가 세워지면서 담임 목사님이 어떤 마음으로 치리를 주셨을까? 그 부분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억울해하는 직분자들을 보면서 저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할 말없는 인생이 되었고, 뿌린 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광주 채플이 세워지고 여러 사건들을 만나면서 담임 목사님은 그 많은 시간 어떤 마음으로 걸어오셨을 까? 담임 목사님의 지나온 시간들을 문득 문득 생각할 때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12제자가 예수님과 3년 동안 동거동락하면서 신앙 고백도 있었지만 엉뚱한 소리도 참 많이하고 사탄아 물러가라는 꾸중도 들었는데 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 핍박과 환난 크고 작은 사건들을 만날 때마다 주님께서 하셨던 그 말씀 한마디 그 한마디를 문득 문득 묵상하고 생각하는 제자들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3 그들이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포도원 주인이 자기 종들을 보내신 것처럼 하나님은 크고 작은 사건들을 통해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우리는 모두 청지기로 부르심을 받은 인생입니다. 목사의 직분도 청지기의 직분이고 목자와 부목자, 남편과 아내의 역할도 주인이 아닌 청지기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인생의 동반자를 만나 결혼식을 올리고 돈을 모아 집을 사고 살림살이를 하나씩 장만하고 망대를 세우는 일들이 다 내가 한 것 같아서 어느 순간부터 청지기가 아닌 주인처럼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회개의 열매가 있어야 나눠줄 것도 있는데 회개의 열매가 아닌 기복의 소출 만을 원하고 있기에 사건으로 찾아오시는 주님의 방문 앞에서 때로는 혈기를 부리며 때로는 짜증을 내며 피튀기는 전쟁을 치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느 날 집에 들어갔더니 아내가 이혼숙려캠프라는 프로그램을 보고 있더라구요. 제가 지나가는 말로 맨날 이런 것만 보느냐고 했는데 가방을 내려놓고 그 자리에 앉아서 새벽 1시까지 그걸 본 적이 있습니다. 엄청나게 재밌다기 보다는 정말 피튀기는 싸움을 하더라구요. 마치 주인처럼 아내를 부려먹는 남편들도 있고 남편의 골을 파먹는 아내들도 있고... 목장에서 그동안 우리가 나누고 들었던 이야기들을 남편 측에서 준비한 생생한 증거 영상과 아내 측에서 준비한 증거 영상을 하나씩 틀어주는데 TV앞에서 마치 생생한 목장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전문가들의 조언과 핵심을 찌르는 분석도 도움이 되었지만 말씀이 없는데 과연 그 화해와 조정이 얼마나 갈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습니다.

4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였거늘
5 또 다른 종을 보내니 그들이 그를 죽이고 또 그 외 많은 종들도 더러는 때리고 더러는 죽인지라

3절에서는 심히 때리고 4절에서는 머리를 상하게 하더니 5절에 이르러서는 죽이기까지 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살고 있는 포도밭은 어떤 형편이십니까? 배우자가 나를 심히 때리고 내 머리를 상하게 하며 나의 인격을 능욕하고 짖밟지는 않습니까? 또 나를 마치 죽일 것처럼 달려들지는 않습니까? 오늘 큐티인 말씀에 수치와 조롱을 잘 감당하면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다고 하십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또 언제까지 참고 기다려야 하냐고 하나님의 방법이 너무 미련하고 답답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내 성질대로 한다고 되는 것은 하나도 없고 내가 먼저 죽어져야 한 알의 밀알이 되는 것처럼 특별히 나에게 허락하신 그 수치와 조롱을 잘 감당하고자 할 때 예수님의 말씀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어 나도 지켜주시고 우리 가정도 지켜주실 줄 믿습니다.

적용 질문
- 내가 쓸모없는 돌처럼 느껴질 때는 언제입니까?
- 크고 작은 사건들을 통하여 어떤 수치와 조롱을 당하고 있습니까?
- 내 성질대로 하다가 다된 밥에 재를 뿌린 적은 없습니까?

2. 영문 밖 사명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6 이제 한 사람이 남았으니 곧 그가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이르되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포도원 주인을 자기가 보낸 종들이 심히 맞기도 하고 머리가 상하기도 하고 심지어 죽임을 당하는 종들도 있었지만 하나님은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사랑하는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여기서 사랑하는 아들은 마가복음 1장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물세례를 받을 때 , 마가복음 9장 베드로가 초막 셋을 짓고 여기가 좋사오니 하며 엉뚱한 소리를 할 때 하늘에서 들려오던 음성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주인 노릇을 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고 영문 밖 골고다의 길을 걸어가기 위하여 사명을 가슴에 품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지만 포도원의 농부들은 자기 것도 아니면서 포도원을 가꾸는 청지기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어느새 포도원의 소출을 탐내며 포도원의 권력을 자기 것으로 착각하며 사명의 자리가 아닌 내 것을 지키기 위한 기득권의 성벽 안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7 그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산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고

포도원의 권세를 지키기 위하여 그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하며 역모를 꾀합니다. 이처럼 자기 기득권을 지키고자 하는 사두개파와 바리새파는 물과 기름 처럼 섞일 수도 없는 관계였지만 예수를 죽이는데 한마음, 한뜻이 되어갑니다.
여러분은 언제 배우자와 한마음이 되십니까? 평소에는 서로 가치관이 맞지 않아서 함께 살수가 없다고 온갖 원망과 불평을 쏟아내다가 어떤 환경에서 찰떡 궁합이 되십니까? 다른 사람을 흉볼 때 그러십니까? 아니면 물려받은 유산이 있을 때 그러십니까? 또는 자녀우상 앞에서 그러지는 않습니까?
그 농부들은 예수님을 죽이는데 한마음이 될 뿐만 아니라 무지하지도 않았습니다.
'농부들이 서로 말하기를 이는 상속자니'
더러운 귀신들린 자가 가장 먼저 예수님을 알아본 것처럼 그들은 무지한 자가 아니요, 상속자를 단숨에 알아봅니다. 하지만 자기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하여 내 것 아닌 내 것을 빼앗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간의 악한 본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농부들에게 포도원은 사명의 자리가 아니고 반드시 지켜야 할 나의 성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짓고 싶은 여러분의 성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내 거야, 이것만은 내거야, 자녀도 내 것, 남편도 내 것, 돈도 내 것, 집도 내 것. 이혼 할 때는 이 차도 내것이라고 하더라구요. 여러분이 지키고 싶은 그 자리는 사명의 자리입니까? 아니면 내가 지켜야 할 나의 성이 되었습니까?

8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던졌느니라

농부들이 자기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하여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을 포도원 밖으로 내어던지는 행위는 역설적으로 예수님이 우리 죄를 짊어지시고 영문 밖 골고다로 걸어가시는  사명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13장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우리가 있어야 될 자리는 나의 기득권을 지켜야 하는 그 포도원 안이 아니고 사명이 기다리고 있는 영문 밖 그곳이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이 안주하고 싶은 그 자리는 어디입니까? 농부들에게 포도원은 더이상 사명의 자리가 아니라 내가 지켜야 할 기득권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포도원 밖으로 내어던졌다는 것은 매장지조차 허락받지 않은 비참한 죽음을 의미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그 수치를 다 당하셨기에 우리는 값없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일 만 달란트 탕감 받은자가 되어 나에게 100데나리온 빚 진 자를 바라보며 내가 누군데 네가 뭔데 네까짖게 뭔데하며 혈기를 부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지키고 싶은 그 성에서 나와 이제는 영문 밖 사명의 자리로 나오라고 우리를 부르고 계시는 주님의 음성이 들리지는 않습니까?

9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나의 성에 갇혀서 계속해서 주인 행세만 하고 있으면 결국에는 사명의 촛대가 다른 사람들에게 옮겨질 거라고 하십니다.
다른 사람은 주인 행세를 내려놓고 청지기고 살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너무 미련하고 이상한 종족처럼 보이기에 성경도 그들을 가리켜서 다른 사람이라고 표현해 주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세상 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모습,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너무나 닮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언제까지 포도원 안에서 주인 행세만 할것이냐. 이제 영문 밖으로 나가 너의 사명을 감당해야 되지 않겠냐.
영문 밖에 목장이 있고  섬기는 자리가 있습니다. 양육 시즌을 맞이하여 힘든 사람을 10주 동안 섬기는 것도 영문 밖에서 나에게 주시는 사명을 감당하는 것과 같습니다.

광주 채플의 한 집사님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이 집사님은 4년 전 남편의 외도로 서울에서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남편이 있는 시댁으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남편이 10년 전 쯤에 잘 다니던 회사를 하루 아침에 그만 두고 시골에 내려가 낙지를 잡겠다고 했을 때 남편의 행동과 결정이 너무도 무시가 되어 남편과 떨어져서 서울에서 자녀들을 잘 키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6년 만에 남편의 바람 사건으로 주님께서 찾아오셨고 남편이랑 그렇게 떨어져 살더니 결국은 이혼했네 하는 말을 듣는 것이 죽기보다 싫어서 바람피는 남편과 시부모가 있는 시댁으로 내려오게 되었는데 그 때부터 공동체의 말씀을 들으며 세 아이를 데리고 멀리 장흥에서 매주 광주 채플로 와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아직 남편과 시댁의 구원을 위해서 가야할 길이 멀지만 부목자인 아내 집사님이 최근 올려주신 큐티 나눔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저는 비가 오는 날이 싫습니다. 여기는 낙지철이 12월부터 6월 말까지인데 새벽부터 일을 합니다. 거의 8시간에서 10시간 정도 매일 고된 바다 일을 합니다. 그러다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부는 날은 쉬는 날인데 비오는 날 여기 술집은 사람들로 가득 가득한 날입니다. 남편은 항상 날 궂은 날 외박을 했습니다. 이번 주 화요일에도 비가 많이 와서 남편은 외박을 했고 오늘은 어머님을 모시고 병원에 다녀왔습니다. 화요일 저녁 아이들 일정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그 여자 차가 큰 길 가에 세워져 있는 것을 보니 낙심이 되고 여러가지 감정들이 스쳐지나갔습니다. 병원에 다녀오신 어머님은 마지막 주사치료를 마치셨는데 3개월에 한 번 CT를 찍고 예후를 지켜보면 된다고 하니 이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큰 아이 기숙사 이불이 와서 세탁하려고 하는데 세탁기 안에 못보던 패딩이 하나 있는데 모 브랜드 옷이었습니다. 어머니께 언니가 사주신 거에요? 하고 여쭤보니 그냥 누가 주더라 하며 말을 흐리십니다. 그 여자가 사준 것 같은데 남편도 같은 브랜드 옷이 하나 있습니다. 이런 일들은 저를 낙심시키고 정죄가 되고 가슴이 미어져 오고 저를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오늘 큐티 말씀에 에다바 열리라고 하십니다. 저는 귀 먹고 말 더듬는 자입니다. 남편을 보면 말이 나오지 않고 귀 먹은 사람처럼 들리지 않아 얼굴을 봐도 저도 모르게 피하게 됩니다. 제가 이러니 남편의 마음도 닫히는 것 같습니다. 말씀을 듣고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풀려야 하는데 저는 아직도 귀를 닫고 입만 다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주님! 말씀이 들려서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이 풀리게 해주세요. 에바다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치유 받아 온전한 소통을 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나를 이렇게 싫어하는데 이혼을 해야하나, 떠나야 하나 이런 생각들이 저를 힘들게 합니다. 말씀이 열려야 하는데 제 마음이 닫힐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 제가 잘한다고 남편이 돌아오고 제가 못한다고 남편이 안 돌아오는 것도 아닌 것을 깨닫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지금 이 시간들을 말씀으로 해석하고 에바다 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저의 귀가 열리고 혀에 맺힌 것이 풀어지고 믿음의 중보자가 될 수 있도록 저를 도와주세요. 어머님의 말씀에도 귀먹은 자가 되지 않게 도와주세요. 사명의 자리를 떠나지 않고 이 자리를 잘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여전한 방식으로 큐티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적용. 시부모님 아침 차려드리기. 아이들과 큐티하기. 집 깨끗하게 청소하기. 에바다 열리라 아멘.
이렇게 큐티 나눔을 올려주셨지만 환경이 크게 바뀐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아내 집사님을 이미 사명자로 키워가시는 줄 믿습니다. 혹 어떤 분들은 바뀐 것이 뭐가 있냐고 하실 수도 있겠지만 믿음 안에서 성장하는 아이들이 큰 상급이 되고 쓸모없고 외면 당하는 아내 집사님을 모퉁이의 머릿돌로 세워가시는 줄 믿습니다.

적용 질문
- 주인 행세를 하며 내가 지키고자 하는 포도원 안을 어디입니까?
- 나를 사명자로 불러주신 영문 밖 사명의 자리는 어디입니까?
- 세상 사람들과 너무 닮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3. 주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10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11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놀랍도다 함을 읽어 보지도 못하였느냐 하시니라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시편 118:22절에 기록된 말씀인데 예수님은 이 말씀을 자기에게 허락하신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쓸모 없는 돌처럼 배우자에게 버림 받고 자녀들에게 무시와 냉대를 받고 세상에서는 더이상 쓸모 없는 돌처럼 취급을 받을 수도 있지만 오늘 나에게 주신 말씀, 일용할 양식으로 허락하신 오늘 큐티인 말씀을 주의 음성으로 듣고 나의 마음판에 온전히 새기고자 할 때 건축자들에게 버림 받은 우리의 인생들도 모퉁이의 머릿돌이 될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나에게 주시는 말씀을 기억하기보다 '네가 어떻게 내게 이럴 수 있어. 내가 그동안 네게 어떻게 했는데. 나는 그래도 네게 그렇게 하지는 않았어. 네가 정말 인간이라면 나한테 그러면 안되지.'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말씀을 기억하기 보다는 나의 뚫린 입으로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다보니 불의 혀처럼 초가삼간을 다 태울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들으면서도 왜 자꾸 이러는 걸까요? 들은 말씀은 3일만 지나면 금새 다 까먹는데 배우자가 10년 전에 한 말은 하나하나 잊지도 않고 상처로 남아있기 때문에 그렇지 않나 싶습니다. 말씀을 듣는 우리의 뇌 용량이 부족하다기 보다는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는 우리의 죄성이 온 몸에 퍼져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 광주 채플에 다급한 기도제목이 올라왔습니다. 어젯밤 11시 경 아무개 집사님이 친구분들과 즐겁게 술을 마시다가 부목자인 아내 집사님에게 전화를 했다는 것입니다. 술이 취해 기분이 좋았나봅니다. 처음에는 좋은 말로 통화를 하시다가 남편 집사님이 아내 집사님에게 함께 술자리에 있는 친구들에게 얘기좀 해달라고 전화를 바꿔주려고 하니 아내 집사님은 남편 집사님에게 친구들에게 괜찮은 척 하는 것도 싫어서 그냥 지나가는 말로 아직도 그러느냐, 언제까지 그럴래 라고 말 한마디를 했는데 그 말에 남편 집사님이 빈정이 상했고 그러면서 시작된 온갖 비난과 욕설과 듣기 힘든 말들을 서로 퍼붓다가 남편이 아이들에게까지 전화해서 힘들게 하니 아내 집산님도 그게 그렇게 화낼 일이냐고 맞받아치고 급기야는 사실상 별거중이었던 남편이 12시 넘어 집에 찾아와서 현관문을 부수고 난리가 났다고 합니다. 긴급한 상황에 큰 아들은 경찰에 신고를 했고 남편은 아내의 머리채를 잡은 채 바닥에 내동댕이 쳤는데 남편은 지금 구치소에 감금된 상태이고 중보기도를 요청하는 톡이 단톡방에 올라왔습니다. 시시비비를 따지자면 남편 집사님이 잘못한 것이 더 많겠지만 남편 집사님은 겨우 목장과 교회에 붙어가고 있는 상황이었고 남편 집사님이 양육을 받으려고만 하면 아내 집사님의 그 말 한마디에 목장도 파업하고 양육도 중간에 포기한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이번에 또 양육 시즌이 와서 남편 집사님이 또 양육 받겠다고 신청했는데 이런 일이 또 찾아온 것입니다. 남편은 남편대로 아내는 아내대로 배우자가 내 인생에 쓸모없는 돌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내 감정과 상처가 아닌 주신 말씀을 기억할 때 내가 요동치는 그 자리도 모퉁이의 머릿돌이 될 수 있다고 하십니다. 받아주지 않는 아내, 무대포의 남편이 문제인 것 같지만 하나님의 허락하신 사건 앞에서 기억나는 말씀이 없고 이 말 저 말, 아무 말이나 하는 것이 스스로 건축자가 되어 3절 말씀처럼 심히 때리고 4절 말씀처럼 머리를 상하게 하더니 5절 말씀처럼 죽이기까지 주인 노릇을 하고자 하는 우리의 악함을 먼저 보라고 하십니다.

12 그들이 예수의 이 비유가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되 무리를 두려워하여 예수를 두고 가니라

귀신들린 자가 금새 예수님을 알아본 것처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장로들이 예수님의 비유가 자기들을 가리켜 하신 말씀인 것을 금새 알아들었습니다.
귀신들린 자가 얼마나 똑똑한 줄 모릅니다. 그런데 회개하거나 뉘우쳤다는 말은 하나도 없고 적개심을 가지고 예수를 잡고자 했지만 보는 눈이 많아서 예수를 그냥 두고 물러갔다고 합니다. 즉 이들의 행동 기준은 깨달은 말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목장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말과 행동을 살펴야 하는데 내가 이런 나눔을 했는데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에 대해서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말씀이 들리는 사람들은 아,내가 바로 그 농부네, 내가 바로 주인 노릇, 주인 행세하고 있었구나, 내가 그동안 주의 종들을 핍박하고 머리를 상하게 했구나. 이렇게 고백하는 사람들이 말씀이 들리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나중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을 때 그 자리에서 돌을 던졌던 사람입니다.
담임 목사님도 이런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말씀이 나를 찌를 때가 가장 복된 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 죄가 드러나면 자존심 때문에 독기를 품고 말씀을 버리고 떠나고자 합니다. 사람 눈치를 보느라고 회개의 기회를 놓치면 결국 진멸의 길로 가게됩니다. 내 죄를 인정하고 주님 앞에 머무는 자가 가정을 살리는 머릿돌이 될 수 있습니다.' 또 이런 말씀도 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성경을 읽고 기억하셨기에 십자가를 질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큐티하며 주신 말씀을 기억해야 사건이 해석됩니다. 읽기는 많이 읽어도 내 사건에 적용할 말씀 하나를 기억하지 못하면 우리는 여전히 예수를 죽이는 건축자가 될 뿐입니다.'

적용질문
- 크고 작은 사건 앞에서 기억나는 말씀이 있습니까?
- 말 한 마디에 요동하거나 요동을 시킨 적은 언제입닊?
- 막말을 하는 배우자보다,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는 나에게 더 큰 책임이 있음을 인정합니까?

지난 한주간 말 한마디에 현관문이 부서지고 또 경찰이 출동하고 접근 금지 명령을 내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긴박한 상황 속에서 공동체 식구들이 찾아가서 나눔하는 과정 가운데 아내 집사님이 이런 고백을 해주셨습니다.
저는 남편이 부부 목장에서 나눔할 때 저의 길을 막았습니다. 저는 돌이켜보면 남편은 술 친구들이 형님은 그래도 행복해 보인다고 하니 남편은 그것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남편이 바꿔주는 전화에 몇마디 그냥 보태면 되는데 남편을 무시하는 마음이 몸에 배어있었기에 제가 던진 그 한마디에 술취한 남편이 찾아와 난동을 부리게 만들었습니다. 남편은 아들의 신고로 구치소에 감금된 죄인인데 저는 아들의 입으로 아빠랑 이혼하라고 부추긴 죄인입니다. 접근 금지 명령을 신청할 건지 조서를 쓰러 나오라고 한 그 날 큐티인 본문이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였습니다. 부부가 한 몸인 것과 둘로 나누지 못하며 가정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사역지라고 외쳐주시는 것 같아서 너무 놀랐습니다. 이번 사건이 드러난 남편의 죄보다 들추게 한 저의 숨은 죄가 더 크다는 마음이 들어 회개가 되었습니다. 아들과 제가 밥도 못 먹고 낙심하고 있을 때 부부 목장의 목자님과 권찰님이 한 걸음에 달려와 주셨고 아들은 왜 목장에 가서 시간을 낭비하냐 차라리 일을 더 하는 게 낫지 않냐 아빠의 이런 일들을 왜 굳이 교회 사람들에게 말하냐며 불평과 불만을 토로했는데 자신의 신고로 아빠가 구치소에 감금되고 위축되어 있는 그 아들에게 너가 너무 잘했다 네가 진짜 신속하게 대처를 잘한 것 같다 더 큰 사고가 나기 전에 네가 아주 지혜롭게 잘했다 얘기를 해주니 아들의 마음이 풀어지고 한동안 아들의 예배가 단절되어 있었는데 아들이 공동체에 대해서 조금 신뢰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십자가 없는 영광만 바랬던 볅거의 초막이 아니라 엄마와 아내의 자리로 잘 붙어가고 연약한 남편도 양육 받고 갈 수 있도록 기도해주시라고 공동체에 부탁도 했습니다.
지난 밤에는 사생결단 난리가 난 것 같았지만 말씀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어주시니 당장 헤어질 것 같은 가정도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실 줄 믿습니다. 앞으로 가야할 길이 많이 남아 있긴 하겠지만 나에게 주신 말씀이 있으면 그 말씀이 우리의 가정을 세워주시는 줄, 또 그 말씀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는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