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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교회_김양재목사님/주일설교녹취기록

기도하는 성전 (김성철 장로)

by relife_es 2025. 4. 1.

누가복음 19:45~20:8
45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46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47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48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하였더라 
1 하루는 예수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실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과 함께 가까이 와서 
2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위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3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내게 말하라 
4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5 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6 만일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니 그들이 다 우리를 돌로 칠 것이라 하고 
7 대답하되 어디로부터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니 

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Telling

2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위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예수님에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장로들이 한 말을 장로가 된 제가 묵상하고 이 자리에서 나누게 하신 분이 예수님이시며 예수님의 권위로 저 뿐 아니라 여러분이 이 자리에 한 분 한 분 앉아 계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45절의 이미 성전에서 내쫓김이 마땅한 자이며 46절의 기도하는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던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제가 2007년 10월 14일 반드시 이혼하리라 굳세게 마음 먹은 채로 당시 5살 이었던 아들과 아내와 함께 오른쪽 뒷편에 앉아 있었고 그 뒷편으로는 전날 목장에서 처음 만났던 목장 식구들이 혹시라도 제가 중간에 나가버릴까봐 걱정하며 에워싸고 포진하여 앉아계셨다는 것을 나중에 들었습니다. 오직 이혼을 목적으로 단 한 번만 주일예배에 가 준다는 약속을 하며 아내와 장모님에게 쓴 이혼서약서에 도장을 받고 왔던 그 날 이후에도 끈임없이 예수님을 죽이려 했던 제가 2025년 주일예배의 자리에 말씀을 전하기 위해 서있는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권위이며 예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래서 자격 없는 제가 감히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저를 어떻게 가르치시며 여기까지 오게 하셨는지 나누려고 합니다. 말씀을 준비하며 때마다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할 우리 가정과 교회, 기도하는 성전이 돼야하는 저 자신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음에 회개가 되었고 지금도 역시 온전히 기도하는 집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쫓아내야 하는 강도가 제 안에 있음을 보게 하셨습니다. 이 자리에 각자의 사연과 역할로 혼자 앉아계시거나 가족이 같이는 앉아있어도 다른 마음으로 위태롭게 계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분도 예수님의 권위가 없이 내 힘으로 앉아 계신 분이 단 한 분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 이 시간이 되어서 가정과 목장과 일터, 내가 속한 그곳에서 나 한 사람이 예수님의 권위를 받고 그곳을 기도하는 집으로 만들기를 결단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예전의 저처럼 이 시간에도 말씀을 전하는 사람의 어떤 꼬투리를 잡아서라도 죽이려고하는 마음으로 앉아서 저를 노려보고 계시거나 아예 오늘 담임 목사님도 안계시니 자체 방학을 하신 분이 반드시 있을텐데 바로 그분들이 저처럼 이 자리에서 간증을 하고 예수님의 권위를 받게 되실 그 날이 온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이 말에 절대 아멘을 하지 않고 절대로 나를 힘들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예수님의  권위가 임할 수 없다며 믿지 않기로 작정한 그분 자신이 꼭 기도하는 성전이 되기로 결단하는 이 시간이 되었스면 좋겠습니다. 우리 각자가 성전이기에 오늘 말씀을 통해 강도의 소굴이 되어 있는 자신을 보고 회개함으로 기도하는 집이 될 가정과 목장, 교회와 나라를 소망하며 기도하는 성전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나와 내가 있는 곳이 기도하는 성전이 되기 위해서는

1. 내 속의 강도를 내쫓아야 합니다.

 

45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46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성전이 예수님의 내 집, 기도하는 집인데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다고 하십니다. 당시 성전 제사 제도는 유대종교 지도자들,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의 부패로 인해 오염되어 있었습니다.

같은 내용의 마태복음 21:12에는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에서 보면 알 수 있듯 성전에서 돈 바꾸는 사람들, 비둘기 파는 사람들 처럼 나의 유익을 구하며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오는 백성들에게 로마 황제의 얼굴이 새겨진 로마 화폐를 성전세로 내는 것이 우상 숭배이니 로마 화폐를 성전 화폐로 바꿔 내야 한다며 투명하게 계산하지 않고 부당한 이득을 취해 돈을 바꾸는 사람들이 있었고 멀리서부터 재물을 가져와야 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불편을 덜어준다는 명목으로 성전 앞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바치던 재물이었던 비둘기를 몇 십배로 팔면서 폭리를 취하던 사람들을 통칭해 예배하는 백성이 아니라 장사하는 자들이라고 내쫓으십니다. 이렇게 교회에 각자의 유익을 감춘채 기도하는 집, 주님의 집에 나의 유익, 나의 복을 구하며 기복으로 오는 발걸음이 강도의 발걸음이며 하나님의 자녀보다 세상의 자녀로 키우며 주의 일꾼이 아닌 돈과 성공의 일꾼으로 가족들을 부추기는 것이 강도의 소굴을 만들고 장사하는 내가 아니냐고 물으십니다. 

 

저는 문자적으로 이 곳에서 병원 홍보를 한 것도 아니고 물건을 판 것도 아니고 내 힘으로 모든 것을 다 해내는 승승장구의 정점에서 거식증에 알콜 중독의 아내를 만나 외도까지 정점을 찍어준 가해자 때문에 피해자로 이 자리에 앉아있으니 절대 장사하는 자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오히려 이혼 당하지 안으려고 당시 제 피를 빨아 먹는 거머리 같다고 아내에게 말했던 것처럼 끈질기게 제게 붙어서 이혼하지 않으려는 아내가 본문의 장사하는 자들처럼 저를 사기 위해 공동체를 이용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전문의 시험도 전국 1등 이었고 개업도 하자마자 폭발적으로 환자가 오며 실패를 몰랐던 제게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결혼 직후부터 끊임없이 깨닫게 해준 아내가 거식증이라는 것을 신혼 초에 알게 되고 정신병원에 입원도 시키고 유명한 정신과 선후배의 인맥을 동원해 치료를 했는데 기적처럼 아들을 낳으니 이제 내가 원하는 집의 모양을 갖출까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아들을 낳고 나서 술에 취한 채로 병원 일, 집안 일을 하며 술을 감추기 시작하는 아내를 보며 형사처럼 술을 찾아내어 아내 머리에 붓고 집안에 술병을 던지며 온 집안에는 악취가 진동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술을 덜 마시고 표정이 밝아진 아내를 보며 다시 소망을 가졌는데 이 번에는 인터넷 동호회를 통해 남자들을 만나며 세상의 기쁨에 취한 것이었음을 아내의 문자를 통해 발견한 순간 이제야 내쫓을 구실이 생겼다는 후련함에 오히려 이제 나만의 집을 새롭게 만들수 있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원하는 집은 어떤 집이었을까요?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돈은 벌어올테니 아들 공부는 알아서 아내가 확실히 시켜서 내가 못다 이룬 꿈과 복수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능력이 탁월해도 교수에게 논문을 빼앗길 뻔하는 억울한 사건을 겪으며 이런 곳이라면 남지 않겠다고 스스로 박차고 나왔지만 못 다 이룬 대학교수로서의 업적을 아들이 대신 이어가도록 밀어주며 세상에 복수하고 싶었습니다. 지긋지긋한 개업의로서의 삶을 끝내는 것이 소원이 되어 그동안 가보지 못한 여행을 자유롭게 다니며 살 수 있도록 재테크를 공부하며 돈을 불리고 자녀를 성공시키는 정보력으로 세상에 발 빠른 아내를 원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집이 어떤 집일까요? 바로 오늘 말씀의 강도의 소굴입니다. 그러니 강도의 소굴을 기도하는 집이 되게하기 위해 아픈 아내를 주셨는데 아내가 알콜 중독이 되어 끊임없이 자살시도를 하는데도 제가 교회에 오지 않으니 외도의 정점까지 찍게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아내를 내쫓을 기회로만 여기며 오히려 이혼하기 위한 목적으로 교회로 왔으니 그 또한 제 속의 강도였습니다. 첫 예배에서 어떤 중독자라해도 친 엄마보다 더 좋은 엄마는 없다는 목사님 말씀을 들으며 어린 아들을 위해 이혼은 안되겠구나 생각했고 아프다고 버린다면 개, 돼지와 다를 것이 무엇이냐는 말씀이 제 심장에 박혀 이혼을 접었지만 그 다음은 아내의 병 낫는 것이 목적이 되어 교회를 이용하는 두 번째 강도로 이어졌습니다. 전혀 하나님을 믿을 수 없었던 제게 제가 쉬어야 할 시간, 하고싶은 것들을 포기하고 목장과 예배, 게다가 양육까지 받아야 하는 말도 안돼는 일들은 그저 거식증과 알콜 중독에 외도까지 하며 귀신들린 것같은 아내 안의 귀신들을 쫓아내기 위해 딱 그 때까지만 참자 스스로를 다독이며 이 악물고 견디는 시간이었습니다. 양육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이야기 하고 예배 때마다 삶의 목적을 이야기 하셔도 그래서 저 혈루증 아내의 혈루는 언제 마르고 저 속의 귀신은 언제 나와서 병이 낫는 거냐고 이를 갈며 어쩌다 너를 만나 내 인생이 이렇게 되었을까 억울함으로 울었습니다. 어떤 간증에도 은혜를 받기보다 내가 왜 편히 쉬고 누려야 할 이 시간에 여기서 저런 사람들 이야기를 듣고 있어야 하나, 저런 죄 안 짓고 열심히 살아온 내가 저렇게 아픈 아내를 만나 여기에 앉아 있으니 최고의 상을 주셔야 되는 게 아니냐고 외쳤습니다. 그 모든 주장은 결국 강도의 소굴을 만들지 못해 억울했던 장사하는 자의 논리와 주장이었으니 내쫓으셔야 마땅한 것은 바로 제 속의 강도들 이었습니다. 

 

적용질문

- 하나님의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드는 내 속의 강도는 무엇입니까? 

 

나와 내가 있는 곳이 기도하는 성전이 되기 위해서는

2. 날마다 귀를 기울여 가르치심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47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48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하였더라 

 

강도의 소굴이 되었던 성전에 들어가셔서 직접 부패함을 내쫓으신 예수님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으시고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내내 기적과 치유와 이적을 모두 복음 전하기 위해 사용하시며 십자가 죽음으로 나아가시는 그 순간까지 가르시며 사역하시고 기도를 쉬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의해 자신들의 악이 드러나는 것이 불쾌하고 기득권을 빼앗긴다 생각하며 어떻게든 예수님을 잡아 죽이기 위해 끊임 없이 음모를 꾸미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에게는 그런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자 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담임목사님도 목숨을 걸고 사부님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셨기에 사부님이 천국을 가신 이후의 삶은 덤으로 얻은 시간이라고 하시며 매너리즘에 빠질 시간이 없이 매일 구원을 위해 가르치시고 복음을 위해 어디든 달려가시는데 요즘은 그런 목사님의 가르치심을 들으며 옳고 그름의 잣대와 세상의 가치관으로 알아듣지 못해 비판하고 공격하며 죽이려고 꾀하는 사람들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저역시 피해자라는 생각이 가득차 듣기를 거부했지만 목장을 통해, 공동체 지체들을 통해, 수요 예배, 주일예배를 통해 날마다 구속사가 무엇인지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죽이려 꾀한 지도자들 처럼 말도 안되는 억지를 부리며 당시 목자님에게 악을 고래고래 쓰고 교회를 박차고 나가 모든 지체를 차단하고 스팸 처리 했습니다. 내 뜻대로 마음대로 살 수 없으니 그저 떠날 명분이 필요했고 지도자들처럼, 가룟유다처럼 말씀도 공동체도 죽여야 내가 산다는 사단의 생각에 가득 차서 어떤 설득의 말도 들리지 않았고 분명 위로도 받고 찔림도 있었던 그동안의 시간들을 돌아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여기서 마음이 약해지면  안된다고 더 굳세게 마음을 먹었습니다. 교회에 다니던 때보다 더 아내를 핍박했고 아내가 사랑하는 교회와 공동체를 조롱하고 비판하며 이래도 네가 그 교회를 다니는지 보자며 다시 강도로 무장했습니다. 그러나 아내도 7살 아들도 48절의 백성들처럼 귀를 기울여 공동체의 이야기와 말씀을 들으며 점점 더 하나가 되어가니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하는 시간이 이어졌습니다. 그 때를 떠올리며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죽이려고 꾀하는데 그들과 한편이 된 백성들의 악한 지도자가 바로 저였음이 믿어져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악한 지도자인 제게서 완전히 멸절될 뻔한 우리 가정의 예수씨를 공동체와 말씀이 살려가고 있는데 나의 백성이 살아나고 기뻐하는 것은 보이지 않고 내가 계획한 것을 저들이 방해하는 구나 하며 귀신 들린 엄마를 만나 내가 열어주고자 했던 세상을 꿈꾸지 못하고 공동체 안에 들어가 있는 아들이 불쌍해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아들도 아내도 저를 정죄하거나 판단하는 모습은 보인 적이 없고 항상 아빠와 같이 교회 가고 싶다며 아빠를 존경한다며 지도자로서 인정하고 높여주었습니다. 제가 어떤 혈기를 부려도 저의 백성들은 제가 예수를 못 만나서 그런 것을 당연히 여기고 마음 아파하며 세상에서 수고하고 있는 것에 대해 사랑이 가득한 긍휼의 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나의 백성들이 교회 가는 것은 막을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 푸른 초원에서 굿샷을 외치며 골프를 친 다음 날 허리 디스크 파열로 응급 수술을 받는 사건이 왔습니다. 철저히 건강을 스스로 체크하며 나혼자 잘 살아볼거라고 장담하던 제가 수술대 위에 누워있게 되니 저주처럼 올 게 왔구나 이게 그 무서운 나를 부르는 사건 이라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제가 출근하고 나면 매주 저의 집에서 목장을 하며 목장 식구들이 저의 구원을 위해 기도했고 거기에 더해 아내는 병원 문을 닫아서라도 제가 돌아오게 해달라고 지하 단칸방이라도 기쁘게 갈 준비가 되었다는 무서운 기도를 제 허락도 없이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제가 응급 수술 받게 되었을 때는 수요 예배 때 모든 성도들이 함께 이 사건이 구원의 사건이 되게 해달라고 눈물로 기도해주셨습니다. 

여러분은 구속사의 말씀을 귀를 기울여 듣는 백성이십니까, 아니면 지도자들처럼 내 뜻대로 되지 않고 뭔가 불편하고 없애버려야 할 것같은 그 사람은 없애고 예수님이 우리 집에 오시도록 끊임 없이 수고하는 그 사람과 그 환경을 죽이려고만 하십니까? 만약 내 옆에 그렇게 나를 죽이고자 하고 예수 믿기를 거부하는 지도자가 있고 가족이 있다면 48절에서 그들이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하게 하는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48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즉 내가 귀를 기울여 듣는 것 뿐입니다. 하지만 혼자는 안됩니다. 백성이 다 들어야 합니다. 뭉쳐야 합니다. 저도 만약 핍박하는 제가 무서워 아내가 공동체를 떠나 혼자 뭔가 해보려 했다면 눈도 깜빡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공동체가 하나가 되어 다 귀를 기울여 들으며 기도하며 잠잠히 기다리니 폭풍 전 고요를 느끼듯 잠시 뒤 뭔가 닥칠 것 같은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제가 없는 공동체에서 아내가 수많은 중고등부 아이들과 그 가정, 목장과 부서에 귀를 기울여 듣는 백성들의 수를 늘리고 있었고 어린 아들이 동역자가 되어 주일이면 하루 종일 엄마 옆에 붙어 휘문고등학교에서 올 생각을 하지 않으니 아들이 손을 잡아주고 안아주는 백성들의 수가 점점 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기도의 힘이 컸기에 결국 디스크 사건이 임했을 때 제가 더이상 우리 집에 예수님이 들어오시는 것을 막을 방도를 찾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말씀만 듣지 마시고 공동체에 들어가시고 공동체 안에서도 또 공동체를 만들어 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끊임 없이 예수를 죽이라는 나의 지도자가 있다고 해도 그 지도자를 불쌍히 여기고 그 자리를 인정해주며 예수님도 끝까지 기다려주신 것처럼 포기하지 않고 사랑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처럼 대제사장, 서기관 같은 그 사람이, 자기밖에 모르는 지도자가 그저 성전에서 내쫓긴 채로 끝나지 않고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기도하는 집 안으로, 그 백성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귀를 기울여 듣는 백성들을 모으고 연합하고 하나 되는 기회로 만드셔야 합니다.

 

적용질문

- 나는 귀를 기울여 듣는 백성인가요? 절대 인정하지 않고 내가 옳다며 꼬투리 잡아 죽이려고만 하는 대제사장, 서기관, 백성의 지도자인가요?

- 내 옆에서 날마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꾀하는 그 사람을 위해 나는 백성을 모으고 있습니까?

 

3. 하늘로부터 오는 권위를 받아야 합니다.

 

1 하루는 예수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실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과 함께 가까이 와서 
2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위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기쁜 소식, 복음입니다. 복음을 통해 영원히 살 길이 열리고 하나님과의 막힌 관계가 열리는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그 내용에 대해 묻고 궁금해 하는 것이 아니라 권위를 반복해서 말합니다.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를 내쫓으시며 강도의 소굴이 된 곳을 정화하시기 위한 개혁에 기뻐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그 체제가 바뀌지 않고 유지되어야 이득을 취할 수 있는 사람들이며 제사와 예배보다 물질과 욕심에 취한 유대의 지도자들 이었습니다. 그들이 성전에서 가르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백성들이 자신들의 타락과 부패함을 다 알게되는 위기감과 지금까지 쌓아온 권력을 빼앗길 것 같은 두려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비리로 하나 된 대제사장과 서기관도 모자라 장로들까지 함께 예수님께 자격을 묻는 바탕에는 산헤드린 공회가 인정하지 않는 권위는 용납할 수 없다 주장하며 그 권위는 결국 자신들에게 있다는 논리를 가지고 따지는 것입니다. 구속사적인 큐티 묵상을 통해 진정한 개혁이 일어나고 있는데 어떻게 그런 자의적인 해석을 하느냐 따지는 목사님들이 목회자 세미나에 오신 분들 중에도 있었습니다. 무슨 자격으로 평신도가 양육을 하고 성경을 가르치고 강대상에서 수요예배 인도를 하느냐고 했을 때 저희 가정이 살아난 이야기를 합니다. 삶을 포기하려 했던 아내와 그런 아내로 인해 힘들어 복수하는 마음으로 자살을 생각했던 제가 하나님을 만나 사명을 찾게 되었던 이런 일, 깨어진 가정에서 상처로 병들수 밖에 없었던 아들이 말씀 안에서 교회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세상과 구별된 가치관으로 성장하게 된 이런 일, 이곳이 아니었다면 태어나지도 못했을 늦둥이까지 11년 터울로 주신 기적 같은 이런 일, 삶으로 드러나는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들교회에 장르별로 종류별로 얼마나 풍성하게 이어지는지 말씀드렸습니다. 

권위와 권력은 비슷해 보이지만 다릅니다. 유대 기득권이 외치는 그들의 권위는 인간이 부여한 권력을 의미하는 것이지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 권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권력은 자신의 의지와 목표를 강제적으로 사용하기에 이기적으로 사용되기 쉽지만 영적 권위는 내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목적으로 두기에 날마다 죽이려는 사람들이 있어도 예수님처럼 또 찾아가고 무슨 자격으로 이런 일을 하느냐 비난을 들어도 또 대답하며 나의 감정과 생각과 판단을 멈추기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주신 어떤 환경도 하나님이 알고 계시고 내게 맡기셨다는 책임감으로 끝까지 버틸 힘을 하늘에서 공급 받는 것이 영적 권위를 받은 자의 모습입니다. 결국 사명 때문에 그 권위를 주시는 것이니 영적 권위는 십자가 지고 죽는 권위이고 나의 자아를 죽여 한 영혼을 살리고자 하는 권위입니다. 그런 권위가 그들이 이야기 하는 이런 일 인데 대제사장, 서기관, 장로들 처럼 아무리 가까이 와서 보고 들어도 권력만 붙잡고 싶고 하늘로부터 받는 권위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죽고 싶지 않기 때문이고 십자가 지는 것이 부담스럽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누리고 싶은 것을 예수님의 이런 일 때문에 포기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런 일은 그저 그런 하찮은 일이 아닙니다. 

 

저와 아내는 요즘 계속되는 자살 소식에 누구보다 안타까움이 큽니다. 수없이 반복되는 아내의 자살 시도에  내가 안보이는 데서 조용히 죽으라고 쳐다보지도 않았지만 설마 아내가 정말 죽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수면제를 털어 넣고 술에 취해 차를 몰고 나가도 또 쇼를 하는구나, 지겹다는 생각과 이런 너를 보는 내가 훨씬 더 힘들다는 것을 내가 진짜 자살이라도 해서 보여줄까 하는 복수심까지 들었습니다. 그러나 제게 비난을 들은 어느 날 조용히 방에 들어간 아내가 방문을 잠그고 너무 오랫 동안 나오지 않으니 예전과는 다른 무서운 생각이 갑자기 들었습니다. 12층 창문으로 떨어지려는 아내를 극적으로 막은 아찔한 순간에서야 이러다 아내가 정말로 죽을 수도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몇 일 뒤 유명한 여배우의 자살 소식에 온 국민이 놀랐고 저희 부부는 바로 그 사건이 우리의 사건이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어떤 힘든 일이 있고 절망의 끝에 있어도 자살은 더 이상의 기회가 없기에 듣기만 해도 아픈 단어가 자살입니다. 피투성이라도 살아만 있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저희 가정에만 행하실리가 없으니 나에게 일어날 이런 일을 기대하고 소망을 놓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이런 일, 하나님의 일을 하는 네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영적 권위를 받은 한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권위를 주시는 이유는 오직 복음 때문입니다. 그러니 죽을 권도, 누군가를 죽일 권도 우리에게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적용질문

- 나는 무슨 권위로 어떤 일을 하나요?

- 빼앗기기 싫은 권력, 갖고 싶은 권력은 무엇입니까?

 

4. 성령의 의논을 통해 대답할 때 '이르시되'의 응답을 듣습니다.

 

3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내게 말하라 

 

자격을 따지는 그들을 향해 예수님은 또 대답하십니다. 본문에서 '가르치시며, 가르치시니' 라는 단어만큼 은혜가 되는 단어는 3절의 예수님의 대답과 8절의 '이르시되' 입니다. 영적 암흑기에는 하나님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고 마치 상관하지 않으신 것처럼 내버려 둔 때가 사사기에 나옵니다. 아브라함도, 다윗도, 유다도 택자이고 예수님의 조상이기에 하나님께서 찾아와 다시 말씀해 주시지만 죄를 짓는 당시 침묵하셨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가장 무섭고 두려운 시기는 내 마음 대로 되지 않는 때가 아니라 하나님의 침묵이 길게 이어지는 때입니다. 대제사장들이 끊임 없이 죽이려고 꾀하는 것을 알고 계시는 예수님은 요한의 세례를 통해 대답하십니다. 

 

4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바로 이런 대답이 성령의 지혜로 올무에 빠뜨리려는 그들을 올무에 빠지게 하는 대답입니다. 

 

5 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6 만일 사람으로부터라 하면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니 그들이 다 우리를 돌로 칠 것이라 하고 

 

세례 요한의 사역을 인정하게 되면 요한이 선포한 예수님의 신적 권위를 믿는다는 것이 됩니다. 성령의 의논은 구원을 위해 살리고 세우는 의논인데 예수님을 모르고 성령의 도우심을 받지 못하는 그들의 의논은 예수님을 신성 모독죄로 몰아가려다 정작 자신들이 신성 모독죄를 인정하게 되는 올무에 빠지게 되었고 그 불안함은 만일의 사단으로 두려움이 증폭됩니다.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는 것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인정하지 않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묵상하고 깨달았어야 하는데 인정 받지 못하는 것이 두렵고 돌로 치며 정죄하려다 그 정죄를 자신들이 받게 될까봐 두렵습니다. 

 

7 대답하되 어디로부터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니 

 

그러니 어디로부터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며 거짓으로 대답합니다. 우리에게 말하라며 당당히 따지던 그들이 정작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요한의 세례로 반문하시며 예수님이 세례 요한이 선포했던 그 메시야 임을 알려주시는 질문에 나는 모른다고 회피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명백하게 거짓말입니다. 이 때라도 솔직하게 대답하기 싫다고 만일 이러면 어떻게 하냐고 두렵다고 나누었어야 하지만 자기 생각으로 꽉 찬 사람들끼리 의논을 하니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답을 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말씀이 들리지 않으면 날마다 옳고 그름으로 따질 것도 많고 자꾸 걸려서 넘어가지지 않는 것이 많습니다. 

 

저 역시 목자가 되어서도 목사님의 가르치심에 알아듣지 못하니 날마다 넘어가지 못하는 옳고 그름에 스스로 시험이 들어 비판을 하며 오히려 목사님이 모르셔서 그러니 내가 가르쳐 드려야 겠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으로 목사님께 메일을 보냈습니다. 말씀을 준비하며 그 때 목사님께 보낸 메일을 찾아보니 기가 막혔습니다. 어쩌면 예전에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계실 목자님이 계실수도 있을까 하는 생각에 오늘 목자였을 때의 저 스스로를 고발하고 회개하고 해석한 생각을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메일 제목은 존경하는 목사님께로 그럴듯하게 가룟 유다가 입맞춤 하듯 시작합니다. 회파될 뻔한 저희 가정을 살려주신 목사님께 저의 세상 가치관이 바뀌게 되어 어떤 감사로도 표현하지 못할 정도입니다. 이 부분이 기가 막혔습니다. 여전히 세상 가치관이 꽉 차있다는 증거가 메일 내용에 가득한데 저 스스로 구속사의 가치관이 되었다고 생각했음에 자신이 부끄럽고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이렇게 편지를 드린 것은 목자로서 평생 이곳에서 지내야 하니 목사님께 좀 더 효율적이고 생산적인 몇 가지 제안을 드리려고 합니다. 여기서부터 효율적, 생산적이라는 단어만 봐도 딱 세속사 임이 느껴집니다. 내과 개업의로 평일 오후 7시, 토요일 오후 4시 까지 진료를 보고 퇴근할 때면 사람 얼굴 대하기도 싫고 쉬고 싶은 마음 뿐입니다. 이렇게 쉬지 못하다가는 내가 빨리 죽겠구나 우울한 생각마저 듭니다. 예배 마치고 하루 라도 쉬고 싶은 주일 날, 인천에서 새벽 6시에 아내는 고등부 교사라 바리바리 싸들고 1부 예배를 같이 가서 저는 3부 마치고 목자 모임 있으니 2부 3부까지 하루 종일 교회에서 시간을 보냅니다. 영육으로 힘이 없는 생활입니다. 대부분은 주 5일제 인데 저처럼 토요일까지 지치도록 일하고 주일에 먼 휘문까지 와서 예배 드려야 하는 목자들도 분명 있을텐데 오랫 동안 목자를 하려면 매주 늦은 목자 모임으로 힘든 목자들의 상황을 이해해 주셨으면 하는 마음으로 몇 가지 안을 건의 드립니다. 

1 현재 비효율적으로 매주 하는 목자 모임과 부목자 모임을 매 달 한 번씩 한다. 대신 매 주 초워님께 이메일 또는 전화로 목원 상태를 보고하는 것이 효율적입니다.

2 그래도 굳이 매주해야만 한다면 마을별로 돌아가며 목자 모임을 한다. 지금의 목자 모임은 인원이 너무 많아 다른 마을의 목원 이야기까지 다 경청할 수 없고 심도 있게 마을 안의 목원들을 챙길 수 있는 장점을 살려야 합니다.

3 1,2,3부 예배 시간 중 초원별로 시간을 정해서 그 초원에 있는 목자들이 바로 예배 드리고 목자 모임을 해서 교회에 너무 오랜 시간 있지 않도록 장소도 교회에서 제공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부서 섬기는 목자님들의 조정이 힘든 경우 초원 목자 모임 시간에 따라 부서 이동이 필요합니다. 등등 교만의 정점을 찍으면 감히 목사님께 읽기도 부끄러운 안들을 고르시라며 저 스스로  이런 생각을 해낸 것을 뿌듯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납니다. 그러나 지금은 너무나 부끄럽고 제가 얼마나 사람에게 사랑과 관심이 없었는지, 성도 간에 교제를 하찮게 여기며 목자를 일 하듯 했는지, 감사와 기쁨으로 진정한 안식을 맛보지 못했는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토록 힘들면 제 병원이니 근무 시간을 줄이면 되는 것이고 주일은 그저 쉬는 날이 아니라 구원에 대한 감격으로 온전히 하나님을 생각하며 보내야 하는 주의 날인데 이 땅과 세상의 중심이 되니 저런 말도 안 되는 메일을 감히 목사님께 보냈습니다. 그당시 제게 교회는 저의 완벽주의, 강박으로 힘들었던 마음을 위로 받고 기복을 바라며 고난을 미리 없애고자 하는 불안한 마음을 기도와 말씀으로 교묘하게 채우고 있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저의 메일에 목사님은 아무 답도 안 하셨습니다. 8절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듯 아직 알아듣지 못하고 땅의 언어만 쓰는 제가 야단조차도 맞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님을 정확히 분별하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만 제가 초원지기가 되어 수요 예배를 인도한 뒤 목사님은 '그 때 그 생각은 지금도 같아요?' 하실 때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죄송하기도했지만 한편으로는 기억해주신 목사님의 관심과 양육해주시는 사랑을 느꼈습니다. 그러니 가르치심도 야단도 참 감사한 양육입니다. 큐티인 본문 세 번째 대지의 제목이 대답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으로 쓰여져 있지만 사실 예수님은 대답하지 않겠다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화가 나서 입을 닫고 상대를 무시하는 그런 침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여러분은 이 말씀이 은혜가 되십니까? 예수님의 마음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말도 안되는 논리로 계속 따지던 자녀가 궁지에 몰리니 거기서라도 인정하면 좋겠지만 나는 모르는 일 이라고 피할 때 아빠도 이야기하지 않을 거야 하는 그 마음 말입니다. 내 말을 알아듣는 그 날이 오기를 바라며 또 기다리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자신을 팔아 넘긴 가룟 유다를 향해서도 차별 없는 사랑으로 아파하며 십자가 지신 그 마음 이었습니다. 베드로에게는 야단을 쳐도 가룟 유다를 향해서는 야단조차 칠 수 없어 기다리시는 사랑입니다. 

 

저는 많은 분들이 그렇게 기다려주신 사람이고 그만큼 그 분들이 불편하게 느끼던 사람입니다. 믿음은 상대를 편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하는데 저는 상대를 긴장하게 하고 깨어 있게 만드는 사람이었고 어쩌면 지금도 제 수준이 되지 않으니 예수님께서 모두 다 대답해주지 않으실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목사님께서 다른 초원을 마음 놓고 야단치시는 모습을 보면 그분이 부럽기도 하고 나는 아직도 목사님께서 솔직하게 야단치실 수 없는  뭔가 불편하고 여약한 초원인가? 하는 마음에 마치 엄마의 관심을 바라는 어린 아이처럼 저도 야단쳐 주세요 하는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르지 아니하실 거라 말씀하시는 그 '이르시되'가 사랑임을 이제는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 이르시되를 듣기 위해 예배의 자리, 말씀의 자리에서 듣고자 하는 마음, 설득되고자 하는 자세로 듣고 솔직하게 구해야 합니다. 어떤 예상치 못한 음성과 모습으로 다가오더라도 그 '이르시되'의 말씀과 응답이 저와 모두의 거룩을 위함임을 알기에 주님의 침묵이 아닌 이르시되가 제 삶에 이어지기를 원합니다. 잠시는 또 받아들이지 못하고 제가 힘들어하고 아직 살아있는 제 자아와 성질이 나올 수 있겠지만 지금까지 저를 이기셨던 주님께서 말씀으로 저를 또 설득해 주시고 양육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러기에 죽이는 의논이 아닌 살리는 의논, 세상의 의논이 아닌, 성령의 의논을 하는 제가 되어 그동안 주님과 많은 분들을 근심케 했던 시간들을 갚아가야 함을 느낍니다.

 

적용질문

- 나는 누구와 어떤 의논을 하나요?

- 사랑으로 말을 아끼나요? 무시함으로 치묵하나요?

- 주님의 '이르시되'를 어떻게 듣고 있습니까?

 

공동체 고백은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퓽속과 같은 가족우상과 내가 옳다고 외치는 세속사로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할 가정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던 김성철 장로의 메일 2탄입니다. 오늘은 제 속의 강도도 내어쫒고 이곳에 계신 분들의 강도도 쫒아드리기 위해 심판대에서 조사 받는 심정으로 다 털고 가기로 작정했습니다. 아하스의 죄 므낫세의 죄악들이 성경에 그대로 적혀있듯 제 지나온 시간들이 생명책에 다 적혀있었을 텐데 오늘 이렇게 회개하며 내어놓음으로 그 부분을 조금이라도 삭제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아내에게 교회 오기 전에도 협박성 메일을 썼었지만 교회 온 이후에도 목자, 마을지기, 초원지기 때마다 메일을 썼던 것을 이번 말씀 준비하며 다 찾아 읽어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중 제가 오랫 동안 우리들교회의 가정중수라는 핵심 가치에 대대로 내려오는 저희 집안의 가족우상을 합리화 한 것도 모르다가 한계에 부딪혔던 때의 메일을 발견했습니다. 가룟 유다처럼 마지막에 예수님을 떠나는 가장 안타까운 선택을 하듯 우리들교회를 떠날 위기에서 공동체의 돌봄과 목사님의 주일 말씀을 통해 회복되었음을 느끼며 오늘 저의 산당을 제거하기 위해 제가 썼던 메일을 읽어드려야 합니다. 우리들교회에 와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아내가 살아났지만 제가 원하는 가정의 모습으로 제 통제권 안에 들어오지 않는 것에 대해 끊임 없이 분노했던 때였습니다. 그 때는 제가 당연히 절대적으로 옳다 주장했지만 이런 저의 생각과 가치관을 완전히 바꿔주셨기에 이렇게 오픈할 수 있는 때가 왔다는 것이 저 스스로 기적같아 은혜가 되었습니다. 목사님께 쓴 메일에서도 그랬지만 저는 항상 십계명처럼 1번 2번 번호를 매기며 내용 증명 보내듯 메일을 보냅니다. 

1 여자 목장 목자 이외의 모든 부서 일은 이번 주 내로 정리하고 그만 둔다고 교회에 통보한다. (고등부, 주보팀, 중보기도부 모두 그만 두었는지 내가 부서에 확인할 것임)

2 주일에는 두 아들과 2부 마치고 어떤 상담도 만남도 하지 말것 (그렇지 않으면 또 늦어지고 아들들이 기다리는 상황이 발생하므로 아이들이 목장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차 안에서 대기후 귀가할것)

3 주일에 교회에서 해야 할 일이 생기면 나에게 먼저 보고하면 내가 처리할 것임

4 교회의 어떤 제안도 거절하고 나에게 토스할 것

5 주일 예배는 어떤 경우에도 한 번만 드릴 것

6 평일 저녁 시간에 상담 전화, 카톡하지 말 것. 낮시간 외에는 핸드폰 보는 것 금지. 여자 목장 외에는 상담 전화 금지

7 단독으로 내는 주일 헌금, 감사 헌금, 목적 헌금 금지. (이 부분은 내가 수시로 인터넷으로 조회하겠음)

8 이 모든 것에 대해 명확히 해결되지 않을 경우 모든 직분을 내려놓고 둘 다 목원으로 남는다. 

9 목원이 되어서도 또 교회 일을 할 경우 우리 가족은 가장인 내 뜻을 따라 교회를 떠난다. 

10 이상의 내용은 우리 가족을 위해 고민하고 내린 결정이니 어떤 조정도 없는 명령임을 받아들인다.

저도 읽으며 기가막혔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들교회가 아니었다면 지금도 저의 가치관과 내가 옳다는 확신은 절대로 깨지지 않았을 것을 생각하니 저의 돌같은 세상 가치관과 가족신화를 깨주신 교회와 목사님께 너무나 감사했고 그자리에서 끝까지 저를 받아낸 아내와 아들이 항상 저를 안아주고 무릅 꿇고 기다려주었음에 미안하고 고마왔습니다. 아내가 더이상은 못하겠다고 힘들다고 해도 중학생이 된 아들이 말씀 듣고 은혜 받은 사람이 엄마라면 엄마가 아빠를 받아주는게 맞지 않냐고 무조건 먼저 사과하시고 잘못했다고 하시라고 했다는 말을 나중에 들으며 아들이 저보다 100배 훌륭하다는 생각을 했고 그렇게 키워주신 우리 공동체에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그당시 저의 믿음의 수준에 대해 정죄하거나 비판하지 않고 교회도 목사님도 저를 불쌍히 여겨주시며 암탉이 새끼를 품듯 품어주셨고 아내 역시 교회만 떠나지 않게 해달라고 납작 엎드려 제가 원하는 모든 것에 따르며 교회에 제가 모르게 다 말씀드리고 상의하며 진심으로 순종한 시간에 저의 어둠에 빛을 비춰주는 시간이 되어 다시 말씀 듣고 돌이키게 되었습니다. 저는 담임목사님께서 사부님 이야기를 하실 때 참 많은 부분 공감을 했습니다. 절약과 교회 비판, 자기 의도 너무 제 모습과 같았지만 목사님을 향한 집착, 소유로 여기는 사부님 방식의 사랑이 너무 공감되어 목사님께서 사부님 이야기를 하실 때면 성도님들은 놀라기도 하고 웃기도 하는데 오히려 그 반응을 의아해하며 사부님의 말과 행동 모든 모습을 당연하게 여기며 옳다고 했습니다.  아내도 아들도 내 것이라는 소유의 개념으로 내가 원하는 모습과 모양으로 그 자리에 두고 가족 또한 제 틀 안에 가두려 한것이 저의 이익을 위해 질서순종 이라는 말씀을 이용하고 가정중수라는 핵심가치조차 제 이익의 수단으로 사용했던 제 속의 강도였습니다. 내 몸이 성전이고 내가 있는 곳은 어떤 곳도 성전이기에 기도하는 집이 된다는 이 말씀은 나 자신도 하나님과의 참된 교제와 관계가 이루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가정도 직장도 사명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 곳이 되어야 함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끊임 없이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던 저였습니다. 그런 제가 예수님을 만나 가치관이 변하고 인생의 목적이 변하기까지 하나님께서 모든 환경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니 환경을 주목하지 마시고 그 환경을 통해 내게 어떤 말씀을 하시는지 귀를 기울이는 백성들과 함께 그 누구도 아닌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에 촛점을 맞추시기를 바랍니다. 인생의 목적이 행복이 아닌 거룩이 되어가는 과정은 결코 한 번에 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원하는 소원 한 번 들어주신다 해서 갈 수 있는 십자가 길도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사명의 길에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안식과 기쁨과 은혜가 있다는 것이고 그토록 행복을 쫒을 때 알 수 없는 거룩이 주는 진짜 행복이 감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굳이 이런 저의 모든 이야기를 읽어드린 이유는 매주 우리들교회는 저처럼 꼭 살아나야 하는 한 사람, 한 가정이 오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래 이곳에서 말씀을 듣고도 몸 따로 맘 따로 공동체 안으로 예전의 저처럼 완전히 들어가지 못하는 분이 계시고 또 변하지 않는 환경 때문에 시험에 들어 마지막이다 하며 오신 분, 기대감 없이 이 자리에 오신 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족한 저로 인해 오늘 은혜를 하나도 못 받았다고 하시더라도 모든 병원에서 포기했고 자살로 끝날 수밖에 없던 저의 아내와 하나님이 절대 믿어지지 않던 제게 부어진 주님의 권위를 사모하시고 이곳에 계신 모든 분이 그 영적 권위를 받아 사명의 길을 함께 사모하시길 기도합니다. 저 또한 지금의 낮아진 마음을 잃지 않고 오래 기다려주신 하나님과 교회 앞에 진실된 종이 되어 기도하는 집과 병원, 목장과 초원을 만들어 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