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교회_김양재목사님/주일설교녹취기록

상한 갈대 (열왕기하 18:20-27)

relife_es 2025. 3. 12. 22:32

20 네가 싸울 만한 계교와 용력이 있다고 한다마는 이는 입에 붙은 말 뿐이라 네가 이제 누구를 의뢰하고 나를 반역하느냐

21 이제 네가 너를 위하여 저 상한 갈대 지팡이 애굽을 의뢰하도다 사람이 그것을 의지하면 그의 손에 찔려 들어갈지라 애굽의 왕 바로는 그에게 의뢰하는 모든 자에게 이와 같으니라

22 너희가 내게 이르기를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의뢰하노라 하리라마는 히스기야가 그들의 산당들과 제단을 제거하고 유다와 예루살렘 이 제단 앞에서만 예배하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셨나니

23 청하건대 이제 너는 내 주 앗수르 왕과 내기하라 네가 만일 말을 탈 사람을 낼 수 있다면 나는 네게 말 이천 마리를 주리라

24 네가 어찌 내 주의 신하 중 지극히 작은 지휘관 한 사람인들 물리치며 애굽을 의뢰하고 그 병거와 기병을 얻을 듯하냐

25 내가 어찌 여호와의 뜻이 아니고야 이제 이 곳을 멸하러 올라왔겠느냐 여호와께서 전에 내게 이르시기를 이 땅으로 올라와서 쳐서 멸하라 하셨느니라 하는지라

26 힐기야의 아들 엘리야김과 셉나와 요아가 랍사게에게 이르되 우리가 알아듣겠사오니 청하건대 아람 말로 당신의 종들에게 말씀하시고 성 위에 있는 백성이 듣는 데서 유다 말로 우리에게 말씀하지 마옵소서

27 랍사게가 그에게 이르되 내 주께서 네 주와 네게만 이 말을 하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냐 성 위에 앉은 사람들도 너희와 함께 자기의 대변을 먹게 하고 자기의 소변을 마시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하고

 

우리 주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는다고 하신다. 상한 갈대는 줄기가 꺾여서 서서히 말라 죽어가는 갈대이다. 우리 인생이 꼭 상한 갈대 같다. 밑동 잘린 나무와 마찬가지인데 어차피 죽을 것 아예 꺾어버리면 그만인데 우리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건강하게 잘 사는 것보다 구원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나부터 내 식구까지 다 정신이 아프고 지체가 아픈 것들이 너무나 싫다. 구원이 제일 중요하다는 말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악한 아버지 밑에서 여호와만 경외하고 하나님만을 의뢰하여 만사형통을 경험한 히스기야도 그랬을까? 그에게 나라가 망하게 된 어마어마한 고난이 찾아왔다. 성이 포위된 채 엄청난 조롱을 듣게 되는데 우리 마음 같아서는 소나무, 참나무처럼 보기 좋게 우뚝 솟은 인생이 되고싶지만 현실은 갈대에 가깝다. 그것도 건강한 갈대가 아니라 상한 갈대 같아서 칭찬보다 조롱 받기가 쉽다. 남에게 들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에 대해서도 조롱할 때가 있다. 상한 갈대 같은 우리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될까? 오늘 랍사게의 일장연설을 통해 함께 생각해보겠다.

 

상한 갈대 같은 우리 인생은

1. 의심에 빠질 때, 나아가 예배해야 합니다.

 

20 네가 싸울 만한 계교와 용력이 있다고 한다마는 이는 입에 붙은 말 뿐이라 네가 이제 누구를 의뢰하고 나를 반역하느냐

21 이제 네가 너를 위하여 저 상한 갈대 지팡이 애굽을 의뢰하도다 사람이 그것을 의지하면 그의 손에 찔려 들어갈지라 애굽의 왕 바로는 그에게 의뢰하는 모든 자에게 이와 같으니라

 

네가 의뢰하는 의뢰가 무엇이냐? 지난 주 본문에 이에 19절부터 27절까지 이 의지와 의뢰라는 단어가 무려 8번이나 나온다. 사람은 누군가를 늘 의지한다. 그런데 랍사게의 말로 히스기야의 의뢰를 외치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의뢰했는지 원수가 아는 것이다. 예수 믿지 않는 남편이 내가 무엇을 의뢰했는지 아는 것이다. 예수 믿지 않는 아내가 내가 무엇을 의뢰했는지를 외치는 것이다. 아이러니하다. 

아버지 아하스의 악함으로 히스기야를 깨어있게 하시더니 개혁을 해도 앗수르가 쳐들어오고 계속 의뢰할 수밖에 없게 하시고 의지할 수밖에 없게 하시는 것이 히스기야로서는 그것이 가장 믿을 만한 환경이 되게 하신 것이다. 이것이 구속사이다. 그러니 히스기야가 이사야를 좋아하고 그의 말씀을 좋아할 수밖에 없게 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좁은 길, 조롱이 시작되는 것이다. 

19절에 네 의뢰가 무엇이냐고 앗수르 왕 산헤립의 질문을 히스기야에게 부하인 랍사게가 대신 전하고 그의 말이 계속이어진다. 네가 싸울 만한 계교와 용력이 있다고 한다마는 하며 아픈 곳을 꼬집는다. 네가 나를 배반해서 작전도 짜고 군사력도 키우면 될 줄 알았지? 이것은 입에 붙은 말 뿐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입만 살아가지고' 하는 것과 같다. 빈말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번에는 누굴 믿고 덤비는 거야? 그러더니 히스기야 대신 답까지 해주는데 애굽을 믿는구나 한다. 실제로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의뢰하지만 애굽의 힘을 기대했다. 애굽이 반 앗수르 동맹의 뒷배였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유다, 아람, 블레셋 등 앗수르와 애굽 사이에 있던 작은 나라들을 앞세워서 앗수르가 애굽까지 공격하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 그러나 애굽이 눈치가 9단이다. 오래 살아남은 비결이 있지 않았겠나? 작은 나라들을 뒤에서 그렇게 조종해서 앗수르에 반대하게 만들어 놓고는 정작 앗수르가 침략하자 입을 싹 씻었다. 그러니까 도와주겠다는 약속을 언제했냐 할 정도로 애굽에 쳐박혀서 나오지를 않는다.

누가 우리를 도와주겠는가? 요즘에 보니까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와 트럼프의 정상회담이 완전히 결렬되었다. 이 세상에 누가 나를 도와주겠는가? 그런데 젤렌스키가 원하는 것은 안보를 보장하는 것인데 그것이 얼마나 큰 일인 줄 아는가? 우리가 70년 전 국민소득이 35불 할 때 세계에서 두번째로 제일 가난한 나라였을 때 미국 보고 우리의 안전보장 약속을 받아냈다. 한미안보를 받아낸 것이 얼마나 큰 일인지 상상 못할 것이다. 제일 부자 나라가 제일 가난한 나라의 뒷배를 봐주겠다는 것이었으니... 그 전에 우리나라는 병자호란, 임진왜란, 러일전쟁 등등 전쟁이 많았는데 70년 동안 전쟁이 없다. 왜냐하면 대단한 강한 나라가 우리를 붙잡아 주는 것이다. 그 협정을 믿는 나라이기에 미국이 약속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불행중 다행이 한국이 똘똟해서 원조 받은 값을 하는 것이다. 대단한 나라가 뒷배를 봐주니 실제적으로 한국에 전쟁이 없었기 때문에 국력이 올라간 것이다. 

앗수르 왕 산헤립은 애굽을 상한 갈대 지팡이라고 부른다. 지팡이 이기는 한데 지팡이가 아니라는 것이다. 재료가 참나무가 아니라 갈대인 것도 기가막힌데 갈대가 부러져 쓸 수 없는 지팡이라는 것이다. 뒷배가 되어줄 것 같았던 애굽이 싹 숨어버린 애굽이 딱 상한 갈대 지팡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애굽의 문제가 아니라 유다의 문제인 것이다. 유다는 애굽을 향해 미우정 고운정 다들었다. 그렇게 괴롭혀서 도망 나왔는데 몸에 밴 애굽의 습성이 없어지지를 않는다. 그러니 노예 노릇을 했지만 애굽에서 400년 동안 잘살았기에 늘 유다 사람도 돌아가고 싶고 기대고 싶은 곳,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끊지 못하는 곳이 애굽이었다. 하지만 유다가 이렇게 달라 붙으니까 매력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반면 애굽은 연애 고수이다. 밀당을 기가막히게 한다. 잡힐 듯 잡힐 듯 기대하게 하지만 절대 잡히지 않고 도와줄 듯 도와줄 듯 하지만 절대 도와주지 않는다. 그러면 누가 애굽을 상한 갈대 지팡이로 만드는 것인가? 바로 유다가 만드는 것이다. 누가 진짜 상한 갈대인가 물어본다면 애굽이 아니라 유다이다. 유다의 믿음이 갈대처럼 흔들리고 심지어 상한 갈대처럼 꺾이고 부서져 내리니까 하나님이 아닌 애굽을 의뢰한다는 것이다. 나를 지탱해줄 지팡인줄 알았는데 상한 갈대라니 속았어. 이게 아니라 그런 지팡이를 의뢰했던 내가 상한 갈대라는 것이다. 허리가 끊겨버려 말라가는 갈대 밑동 잘린 나무가 바로 나라는 것이다. 그런데 유다가 이렇게 자기 모습을 보지 못하고 앗수르 왕 말만 들으면 어떤가? 내가 그렇게 믿었건만 믿을만한 사람이 아니었나? 의심이 생긴다.  애굽을 상한 갈대 지팡이라고 하는데 상한 갈대 지팡이는 멀리서 보면 표도 안난다. 도리어 멋있어 보인다. 여자들이 멍하니 4차원의 표정을 짓고 있으면 도리어 멋있어 보여서 남자들이 다 달라 붙지만 막상 가까이 가면 다 상한 갈대라 이거죠. 그러니 외모 좋아하지 마시라. 

정치 천재, 심리 천재 앗수르 왕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무슨 말을 하는가?

 

22 너희가 내게 이르기를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의뢰하노라 하리라마는 히스기야가 그들의 산당들과 제단을 제거하고 유다와 예루살렘 이 제단 앞에서만 예배하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앗수르 왕은 히스기야가 얼마나 하나님을 경외하는지 안다. 의지했는지 안다. 대단한 종교개혁을 했다는 것도 안다. 유다 전국에서 산당과 제단을 제거한 것도 안다. 다 아는데 하나님만 모른다. 그래서 네가 그 산당과 제단을 제거했기 때문에 하나님도 히스기야를 더이상 돕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히스기야가 어렵지 않다면 아무리 와서 욕을 해도 타격을 받지 않는다. 그런데 히스기야는 하나님과 경외하고 의뢰하여 만사형통 이었는데 갑자기 앗수르가 쳐들어와서 하루 아침에 유리한 상황이 불리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나라가 망하게 되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상황에서 앗수르 왕이 하나님도 너를 돕지 않는 거야 이렇게 말하게 되면 눈에 보이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애굽도 의심되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얼마나 더욱 의심이 되겠는가?

갑작스런 고난의 파괴력은 바로 이런 것이다. 우리의 믿음을 흔드는 것이다. 가뜩이나 약한 믿음을 무너뜨리고 의심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이때 어떻게 할까? 놀랍게도 앗수르 왕이 힌트를 준다. 그의 마지막 말이 예루살렘 제단 앞에서만 예배하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여호와만 예배하라고 했잖아 그게 잘못이야. 산당은 많을 수록 좋고 신도 여럿일수록 좋은데 오짓 성전에서만 예배하라고 하니까 이런 문제가 생긴거야. 병주고 약주면서 앗수르 왕이 이렇게 외치면서 히스기야를 자꾸 의심에 빠뜨리고 있다.

문제가 생기면 우리도 이런 의심이 생긴다. 주일에 교회 안가고 공부했으면 합격했을텐데. 주일에 예배드리는 시간에 일을 했으면 안 망했을텐데. 목장 시간에 투잡을 뛰었으면 빚을 안졌을텐데. 그동안 산당에서 예배 드리던 사람들이 산당에서 기도해서 병이 낫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는데 갑자기 왜 말씀을 보라고 하는가? 그리고 산당 예배를 폐했으니까 그 기득권자들이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에 얼마나 불만 세력이 되었겠나. 그러니까 그 사람들에게 딱 이간을 붙이는 것이다. 내가 예수 믿고 제사 안 지내서 학교 떨어졌다, 40일 기도 안해서 암에 걸렸다고 본인이 깨달아서 얘기하면 모르겠는데 지도자가 네가 그래서 떨어지고 그래서 병에 걸린거야 하는 것은 사단의 궤계이다. 이런 사단의 궤계는 무궁무진하다. 이것이 고난 앞에서 상한 갈대 지팡이를 의지하게 만드는 것이다. 더 의심에 빠뜨리는 생각이다. 이럴때 어떻게 해야하나? 오히려 여전한 방식으로 예배의 자리를 더욱 굳세게 지켜야 예배를 통해 깨닫는 것이 있다. 내 삶이 성공할 때는 깨닫기가 어렵다. 교회가 커지면 누가 바른말을 해도 듣기가 힘든 것이 있다. 내가 잘해서 부흥했다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이런 의심의 치료제는 믿음 밖에 없다. 혼자서는 지킬수가 없으니까 하나님이 불러서 함께 묶어주신 공동체, 교회로 나가는 것이다. 함께 모여서 뭉쳐서 예배하는 것이다. 날마다 산당 예배를 드리면서 용서하게 해달라고 수십년 기도를 하는데 너무 영적이라서 수십년이 지나도 용서를 안 하는 게 특징이다. 

 

적용질문

- 자꾸 의지하고 싶은 나의 애굽 지팡이는 무엇입니까?

- 의지하는 지팡이가 상한 갈대라서 슬픕니까, 내가 상한 갈대라서 슬픕니까?

- 주일, 수요, 목장 예배에 어떤 마음으로 나아갑니까?

 

오래 전 한 의사선생님의 칼럼 - 기본적으로 의사는 고지의 의무를 지키려고 하지만 암 걸렸다고 희망을 뺏어서야 되겠냐며 가족들이 말하지 못하게 하니 폐암 환자에게 폐렴이라고 해서 약 먹다가 갑자기 죽는 경우가 생긴다는 것이다. 그런데 환자에게 알렸는데 너무 절망에 빠져 자살이라도 하게 되면 의사는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도 이 분은 알려야 된다고 생각했다. 4살 짜리 소년이 척추 결핵으로 병명이 나왔는데  치료하지 않으면 곱추가 될 수 있고, 등뼈의 척추 결핵 부위를 수술로 긁어내고 결핵 치료를 하면 등이 굽지 않고 치유될 수 있어 식구들에게 수술 동의를 구했다. 그런데 부모 외에 신도들이 같이 있었는데 수술을 하려면 수혈을 해야된다니까 절대로 안된다고 했다. 수혈을 하지 않고 마취를 하면 환자의 생명이 위험하고 수술을 하지 않으면 등이 굽은 장애를 가지고 평생을 살아야 하니까 부모가 조금 흔들리는 듯했는데 같이 온 신도들이 펄펄 뛰니까 결국은 아이가 죽어도 좋으니까 수혈은 안된다고 했다. 그래서 의사가 수혈하지 않고 수술 하겠다고 약속하고 수술방에 들어가자마자 수혈하고 무사히 수술 받아서 혈액 대금은 항생제 주사 대금으로 바꿔 놓았다고 한다. 고지 의무를 위반한 이 사건에서 큰 보람을 느꼈는데 교리 안에 있는 그들은 이미 고지 사실에 대한 판단력을 상실한 상태였다고 한다. 그들이 종교 이름을 빙자하고 있는 것이다. 요즘 극우라는 표현을 많이 쓴다. 그런데 극 자가 들어가면 항상 폭력이 동반된 비상식을 말한다. 이 부모는 이단이다. 이러면 극우라고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다같이 기독교라고 한다. 그러니까 보수, 진보 하는데 제가 말하는 보수는 국민의 힘을 말하는 게 아니고 지금까지 내려온 가장 좋은 것을 다 합친 것을 보수라고 한다. 복음적이고 상식적이고 긍정적이고 합리적이고 가정 중수와 말씀 묵상이 핵심 가치이고 남녀가 질서의 역할에 순종하는 것이다. 여자의 머리는 남자이고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이고. 여전한 방식으로 가정을 사랑하고 창조질서를  어지럽히지 않고 나라를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자유이다. 그러니까 이쪽 저쪽 다 욕을 삼가고 비난을 삼가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 믿는 사람 답게 얘기를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

 

2.절망에 빠질 때, 엎드려 기도해야 합니다.

 

23 청하건대 이제 너는 내 주 앗수르 왕과 내기하라 네가 만일 말을 탈 사람을 낼 수 있다면 나는 네게 말 이천 마리를 주리라

24 네가 어찌 내 주의 신하 중 지극히 작은 지휘관 한 사람인들 물리치며 애굽을 의뢰하고 그 병거와 기병을 얻을 듯하냐

 

랍사게는 산헤립 왕의 말로 유다 백성을 의심에 빠뜨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제는 자기 목소리를 낸다. 조롱의 목소리. 청하건대로 시작하지만 사실을 놀리는 것이다. 내기하자고 한다. 내기 상품은 말 2천 마리이다. 조건은 말 탈 사람인데 한 사람도 낼 수 없다는 것이다. 앗수르 군대의 초급 장교 한 사람도 히스기야의 모든 군대는 물리칠수 없다는 것이다. 물리치다는  얼굴을 돌리게 하다 인데 유다 군대를 다 동원해도 앗수르 군대의 소위 한 명도 까딱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엄청난 모욕이다. 완전 무시이다. 

 

25 내가 어찌 여호와의 뜻이 아니고야 이제 이 곳을 멸하러 올라왔겠느냐 여호와께서 전에 내게 이르시기를 이 땅으로 올라와서 쳐서 멸하라 하셨느니라 하는지라

 

랍사게는 드디어 하나님까지 조롱의 대상으로 삼아버린다.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자가 하나님의 뜻을 들먹인다. 하나님의 뜻으로 자기가 예루살렘을 멸하러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심지어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이 땅으로 올라와서 쳐서 멸하라 직통 계시를 내려주었다는 것이다. 랍사게의 이 말은 사실 히스기야나 유다 백성에게는 훨씬 더 심각하게 들린 것이다. 왜냐하면 아하스 왕 때부터 이사야 선지자가 앗수르를 보내 심판하시겠다고 계속 경고했기 때문이다. 설마 여기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데 그러시겠어 하며 안듣는다. 예수 믿는 사람이 몇 명인데 전쟁이 나겠어 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들 귀를 기울여 회개하지 않았지만 알고는 있었다는 것이다. 여러분도 말씀이 안 들려도 머리로는 알고 있는 것과 같다. 구속사가 들리지는 않아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진짜로 앗수르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했다.

그 지휘관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예루살렘을 쳐서 멸하라고 말씀 하셨다고 하니까 히스기야와 유다 백성은 경악했을 것이다. 하나님이 진짜 히스기야를 망하게 하고 앗수르를 세웠나보다 하고 깊은 절망에 빠질 수 있다. 이것이 사탄의 전략이다. 호시탐탐 우리를 삼키려고 한다. 믿음을 흔든다. 틀릴 기회도 있지만 맞출 기회도 있다. 사탄은 의심을 넘어 절망에 빠뜨리려고 한다. 절망은 마침표이다. 하나님이 버리셨다, 더이상 희망이 없다. 그렇게 끝이다. 일어서려 하지 않는다. 어디로 가든지 형통했던 그 유리한 상황도, 준비하고 대비했던 군사력도, 애굽의 도움을 기대하고 바라던 외교도 세계 최강 앗수르 앞에서는 입에 붙은 말에 불과했다. 의심을 넘어 좌절과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그런데 히스기야가 이 의뢰인 하나님을 최후의 보루처럼 믿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랍사게는 이제 마지막 하나 남은 이 의뢰를 부숴버리려고 너희에게 마지막 하나 남은 의뢰인 그 하나님도 이제 너희를 버렸다 그러니까 다 포기해라 하는 것이다.

사탄은 의심과 절망으로 욥을 삼키면서 그 정점이 욥의 아내의 입술을 통해서 나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는 말이다. 죽음이다. 의심에 빠졌다고 예배의 자리에 나오지 않으면 점점 더 깊은 의심의 늪으로 빠져들다가 결국 절망에 잠긴다. 절망은 끝이고 죽음이다. 죽고 싶다는 생각은 사탄의 유혹이다. 절대로 들으면 안된다. 우리는 자동적으로 기대가 생기고 욕심이 발동하고 야망이 나오는 존재이다. 전자동(automatic)이다. 상황이 다르고 정도가 다를 뿐 있는 것은 똑같다. 문제는 그 대상이다. 하나님만을 기대하고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하나님만을 원한다면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그러나 하나님 아닌 것들을 기대하고 탐내고 바라니까 문제가 되는 것이다. 세상은 우리의 기대와 욕심과 야망을 채워줄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잠깐은 만족시켜주지만 언제 사라져도 이상할 게 없는 게 돈, 쾌락, 권력, 인기, 명예이다. 그러니 하나님을 떠난 기대나 욕심이나 야망은 반드시 절망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인생은 실제로 죽음으로 끝나지 않나. 정말로 상한 갈대요 밑동 잘린 인생이다. 만날 죽을 날만 기다리는 고달픈 인생이다.

그런데 왜 성도에게도 절망과 시험의 사건이 올까? 왜 하나님은 우리를 절망에 빠지게 하는 세상의 조롱을 허락하실까? 정말 멸하려는 뜻일까? 절대로 아니다. 하나님은 멸하기로 하셨다가도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뜻을 돌이키시는 분이시다. 구원하기로 작정하셨다가 뜻을 돌이키는 경우는 없다. 성경에 한 번도 없다. 사울 왕을 폐하신 것도 구원을 약속하셨다가 멸하신 것이 아니다. 계속 경고하시는데도 사울이 돌이키지 않자 심판하신 것이다. 하지만 출애굽 때 이스라엘의 금송아지 사건이나 북이스라엘의 아합이나 남유다의 므낫세의 경우만 봐도 하나님은 멸하기로 하셨다가도 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살려주신다. 지금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는 앗수르 군대도 불과 60년 전에 앗수르 수도 니느웨에는 요나 선지자가 가서 외쳤다. 요나 선지자는 거기에 너무 가기 싫어서 대충 외쳤는데도 니느웨에 회개 운동이 일어났다. 그랬더니 뜻을 돌이키셔서 니느웨를 살려주셨다. 앗수르 군대가 사실 하나님의 은혜의 최대 수혜자 중 하나이다. 그런데 단 두 세대 지나서 하나님을 모를 뿐만 아니라 심지어 모욕하는 악인으로 원위치 되어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정말로 깨닫고 기억해야 될 것은 지금 내가 처한 형편이 아니다. 내 형편이 살만한 환경인지 살 수 없는 환경인지는 사실 큰 문제가 아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나를 택하시고 구원해 가시는 하나님께서 어떤 형편에서도 나를 붙들고 계시다는 사실이다. 나를 부르신 뜻을 절대로 후회하지도 바꾸지도 않으시는 하나님을 믿으면 일희일비하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절망의 사건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우리 시선을 형편이 아니라 하나님께 붙잡아 두시려는 사랑이다. 절망의 사건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음성이다. 그러니까 나를 절망하게 하는 환경 앞에 엎드릴 것이 아니라 그 환경을 통해 나를 부르시는 하나님 앞에 꿇어 엎드려야 한다. 그것이 기도이다. 기도를 통해서 내 마음이 정답인 줄 알고 살던 데서 돌이켜서 말씀을 정답으로 삼고 내 삶을 거기에 맞춰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는 늘 말씀을 바탕으로 해야한다. 말씀으로 드리는 기도가 진정한 기도요, 100% 응답 받는 기도이다. 그러니까 사건이 올 때 죽겠다만 외치지 마시고 주여!만 외치시라. 날마다 큐티하며 오늘 주신 말씀 한 구절이라도 주님의 뜻이 담긴 음성으로 받으시고 그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시기 바란다. 어떤 절망도 왔던 길로 떠나갈 줄 믿는다. 

 

적용질문

- 조롱과 무시를 받는 사건이 왔습니까? 그래서 너무 화가 납니까? 너무 절망합니까?

- 절망의 사건 가운데 환경 앞에 엎드려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엎드려 있습니까?

- 이번 한 주 어떤 기도를 드리겠습니까?

 

목장에서 한 집사님의 간증을 소개한  목자님. 이제까지 보아왔던 분 중에서 목장과 가정에서 수치를 가장 많이 그러나 잘 받으셨고 거절도 가장 잘 당하신 분이셨다고 한다. 처음 목장에서 뵈었을 때 이미 폐암 말기 진단을 받으셨고 항암과 방사선 치료를 받으시는데 목장 나눔을 통해 본인의 죄를 점잖게 고백하시면 곧이어 부인 집사님이 남편에 대한 성령의 고발을 해주셨다. 너무 온유하고 겸손한 분인줄 알았는데 가족에게 폭군으로 군림하시던 집사님의 흑역사를 듣고는 모두 놀라워했다. 그런데 이 집사님은 다 의식하지 못하셨었는지 본인의 머리는 싸매면서 내가 정말 그랬냐고 놀라워 하셨다. 분을 내며 반박하실만도 한데 일체 저항없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셨다. 그리고 목장 처방대로 다음 주에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가족에게 구체적인 사과를 하는 적용을 하셨다. 그런데도 그 집사님이 늘 가슴 아파하신 것은 아픈 둘째 아들이 아무리 사과를 해도 쇠약해질대로 쇠약해진 집사님에게 적대감을 나타냈다는 것이다. 그래도 이 모든 게 내 탓이라고 하시면서 자기 죄를 인정하셨는데 일반적인 거절이 아니라 사과와 회개에 대한 거절을 아들에게 당하신 마음이 정말 힘드셨을 텐데 내가 거절 당하고 망할 것을 예비하니 자신감이 생기고 내 죄가 보이니 어떤 거절에도 상처 받지 않는 자존감이 생기셨던 것 같다. 그래서 임종 예배 때 성령님이 천국으로 불러주셨다고 구원의 사명이 완수 되어서 하나님이 천국 본향으로 불러주신 것이고 그 목표를 이루시면서 우리가 천국 가는 것이 인생 최대의 목표인데 그 목표를 이루시는 모습을 잘 보여주시고 그 임종 예배에 참석한 모두에게 너무 큰 은혜를 끼치셨다고 한다. 이 목자님은 우리나라 최고의 똑똑한 박사님이고 의사 선생님인데 이 집사님이 너무도 부럽다고 한다. 부러워야 된다.

 

3.피하고 싶을 때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26 힐기야의 아들 엘리야김과 셉나와 요아가 랍사게에게 이르되 우리가 알아듣겠사오니 청하건대 아람 말로 당신의 종들에게 말씀하시고 성 위에 있는 백성이 듣는 데서 유다 말로 우리에게 말씀하지 마옵소서

 

한마디로 히스기야의 장관 세 사람은 의심에 빠뜨리는 산헤립의 교묘한 설득과 절망에 빠뜨리는 랍사게의 치명적 놀림을 들었다. 그런데 반응이 어떤가? 백성이 알아 들을 수 있는 유다 말로 하지 말래요. 그냥 아람 말로 해도 자기들은 알아들으니까 백성은 제말 알아듣지 못하게 해달래요. 주여, 영어로만 해요 라고 하는 것이다. 상한 갈대인데 상한 갈대라는 말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미 죽게 되었는데 왜 굳이 죽을 것이라는 말을 해서 살 소망마저 끊어 놓느냐는 것이다. 좋은 말만 들려주자. 잠깐이라도 걱정과 두려움을 덜어주자며 인본적인 생각을 한다. 엘리야 김과 셉나와 요아는 당시 최고 엘리트인데 그들의 생각이 이렇다. 이들이야말로 히스기야의 개혁의 주역이 아니었겠나. 히스기야의 오른팔과 왼팔이 되어서 그가 시키는 대로, 시키지 않아도 낯빛만 보고도 눈빛만 보고도 금방 마음을 읽어서 그가 원하는 대로 척척 일을 처리해 주었을 것이다. 최고로 인정 받는 능력자들 이었을 것이다. 물론 엄청난 수고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히스기야의 개혁이 성공한 개혁이었기에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니 그 형통의 열매도 가장 많이 받았을 것이다. 그야말로 성공의 아이콘 국민 영웅 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눈 앞에 닥친 문제를 직면하지 못한다. 나라가 곧 망하게 되었다. 개혁의 열매로 모았던 것들도 이미 다 날아갔다. 허리가 댕강 끊긴 갈대요, 밑동이 싹뚝 잘린 나무인데 그 모습을 차마 보지 못한다. 그렇다는 말도 듣기 싫다. 내가 듣는 것은 그나마 낫다. 그런데 백성이 듣는 것은 수치스럽기 때문에 참을 수가 없다. 자기 명예가 무너지고 비난을 받는 일을 당할 수가 없다.

 

27 랍사게가 그에게 이르되 내 주께서 네 주와 네게만 이 말을 하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냐 성 위에 앉은 사람들도 너희와 함께 자기의 대변을 먹게 하고 자기의 소변을 마시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하고

 

주님은 사람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지르게 하신다. 유다 최고의 엘리트라는 사람들 수준이 이러니까 하나님은 할 수 없이 랍사게를 사용하셔서 들어야 할 말씀을 들려주신다. '너희들만 이 사태를 직면하면 되겠냐? 성위에 앉은 사람들 즉 아람 말을 모르는 평범한 백성들도 너희와 함께 자신이 똥을 먹고 오줌을 마시게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하지 않겠냐.' 사마리아에 엘리사 때 포위 공격을 당해 먹을 게 없어서 아이까지 잡아먹는 일이 실제로 생겼었다. 대소변 이야기는 예루살렘도 곧 그렇게 굶어 죽을 것이라는 예고이다. 가장 수치스럽고 가장 끔찍한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는 경고이다. 랍사게는 이 경고의 메세지를 왜 지도자인 너희들만 듣고 다른 사람들을 듣지 못하게 하려느냐고 다시 한 번 놀리며 비꼬는 것이다.

하나님은 랍사게를 통해서 유대 지도자들의 문제를 정확히 드러내신다. 의심에 떨어져도 절망에 떨어져도 최고 지도자 엘리트 들은 끝까지 체면만 중요하다. 죽으면 죽었지 절대로 자기 수치는 오픈하지 못한다. 죽음의 고통보다 망신의 고통이 훨씬 더 크다. 구원보다 명예가 더 위에 있다. 그러니 결론이 냅둬. 이대로 살다 죽을래. 나중에 지옥에 떨어지는 것보다 지금 부끄럽고 욕 먹는 게 훨씬 더 두렵다. 그래서 다들 자살을 한다. 그런데 이런 사람에게 주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성 위에 앉은 사람들도 너희와 함께 자신의 대변을 먹게하고 자기 소변을 마시게 하신 것이 아니냐고 물으신다. 똥, 오줌처럼 여겨지는 그 수치 부끄러움을 저 성위에 앉은 사람들, 너희 눈에 너무 무시되어서 잘못 보이기가 죽기보다 싫은 사람들과 함께 나누라는 것이다. 이것을 앗수르의 외교장관 랍사게가 처방해주고 있다.

별인생이 없다. 하나님 앞에서는 똑같이 이 땅에 벌고벗고 왔다가 벌거벗고 간다. 우리가 자기 모습 감추려고 쓰는 방패가 너무 많다. 지식과 외모와 건강과 돈등 많지만 나이가 들면 다 똑같다. 40대가 되면 지식이 평등해지고 50대가 되면 외모가 평등해지고 60대가 되면 남여가 평등해지고 70대가 되면 건강이 평등해진다. 80대가 되면 있는 놈이나 없는 놈이라 돈이 평등해지고 90대가 되면 생사가 평등해진다. 어차피 우리가 다 상한 갈대이다. 늙어져서 아픈데 치매 하난 걸리면 돈이고 지식이고 자녀고 아무것도 필요가 없는 것이다.밑동 잘린 나무이다. 지금은 내가 좀 특별한 것 같아서 수치가 드러나는 것을 피하고 싶고 내 약점을 감추고 싶고 내 죄를 고백하는 것이 싫지만 그런 게 다 지나가는 것이다. 계속 피하려고만 하다가 천국까지 피해서야 되겠는가? 주님 만나 천국가야한다. 천국이 상한 갈대의 유일한 소망이지 않나. 그럼 이 땅에서 상한 갈대가 너무 감사한 것이다. 직면하기 싫고 피하고 싶은 일이 생길 때 도망가지 말고 성 위에, 예배당 위에 앉아 있는 믿음의 지체들과 함께 나누기 바란다. 갈대의 특징 중 하나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씩 뜯어보면 너무 가늘고 약하지만 무리로 모여 있기 때문에 엄청난 생명력으로 살아남는 것이다. 우리들교회는 구조 자체가 나눌 수 있다. 말씀의 공동체에서 말씀으로 양육 받고 모르면 물어보시고 힘들고 수치스러운 일은 함께 나누시면서 천국까지 같이 가십시다. 그렇다고 아무에게나 아무 말이나 막하시면 안된다. 양육 꼭 받으시고 큐티로 인도함 받으시고 목자님께 물어보면서 오직 회개가 되도록 나누시면 좋겠다. 내가 상한 갈대임을 인정하기 싫어서 피하고 싶을 때 피하지 말고 공동체에서 함께 나누면 세상 그 무엇도 주지 못하는 자유를 주실 줄 믿는다.

 

적용 질문

- 너무 듣기 싫은 말은 무엇입니까? 왜 그렇게 듣기 싫습니까?

- 피하고 싶은 자리는 어디입니까?

- 공동체에서 믿음으로 나누었더니 자유롭게 된 일이 있습니까?

 

롯이 상한 갈대의 대표적인 인생이 아닌가 한다. 그는 끊임없이 세상을 택하고 그때마다 아브라함은 그를 끊임없이 돕는다. 소돔을 택한 그는 어쩔수 없이 세상의 육적인 아내를 택했기 때문에 그 아내는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 기둥이 되었다. 그 사위들도 롯의 말을 농담으로 여겼고 딸들도 그곳에서 살았으니까 소돔 고모라를 피해 나왔어도 세상의 도리를 쫓아 베필될 사람이 없는 것을 걱정해서 아버지와 동침했다. 염려는 내가 하나님보다 더 높은 자리에 있는 것이다. 교만한 것이다. 하나님의 도리를 쫓는 것을 도무지 모른다. 그런데 이런 롯을 왜 아브라함에게 붙이셨을까? 아브라함에게 롯의 시험을 주신 것은 아브라함을 위해서이다. 이렇게 지겹게 힘들게 하는 사람이 없고서는 믿음의 일 대가 형성되기 힘들다. 교회는 나가기는 하는 것 같은데 도무지 믿음이 없는 것 같은 집이 그렇다. 골육의 힘듬은 알맞은 아브라함의 멍에인 것이다. 없으면 좋을 사람, 내 재산 다 가지고 갔으면 됐지 죽게 되었다고 하니까 또 생명을 내놓고 가서 도움을 주어야만 하는 식구들, 친척... 이제는 마지막 심판이 오거나 말거나 해도 될텐에 간절히 중보 기도하는 아브라함을 보면서 롯이 바로 상한 갈대 같은 사람이 아닌가. 그가 망하는 것과 상관없이 나는 아브라함처럼 그가 꺾이지 않도록 손을 써야 한다는 말이다. 가만히 내버려 두어도 꺾이고 말 갈대를 꺾지 않는다 함은 버려두지 않고 손을 쓴다는 말이다. 철사라도 갖다 대고 줄로 묶어 놓으면 상한 갈대라도 바람에 꺾어지지 않을 것이다. 철사는 상한 갈대 같은 나를 인식하고 상한 갈대 같은 사람을 위해서 두루 파고 공동체 간증이 거름이 되어 살려내는 것이다. 우리가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공동체에서 나누는 것이 바로 두루 파고 우리가 거름이 되어서 살려내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품질 좋은 사람만 내 식구 하고싶으니 어떻게 내려놓겠는가 다들 잘되는 것만 축복이라고 한다. 애굽이 썩은 지팡이 인데 그것을 모른다. 히스기야가 아버지에게 당하고 개혁하면서 당하고 산당 예배자들에게 당하고 앗수르에게 당하고 돈도 다 털리고 이러면서 성군이 되어 간 것이다. 우리는 모든 식구들이 다 아프다. 조현병에 정신지체에 그러면 아파서 힘드니까 내 편에서 위로해주는 여자, 남자를 밖에서 만나서 위로 받아야하나? 그게 답인가? 아니다. 어떤 환경에도 구원 밖에 답이 없다. 구원만이 답이다. 하나님이 다 아신다. 여전히 핍박하는 남편을 향해서 내가 얼마나 참고 살았는데 그러면서 쌍욕을 했다고 한다. 그래도 이해가 된다. 나중된자로서 먼저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는 자도 있는데 좁은 길로 잘 가야되지 않겠는가? 환경이 아니고 구원이 답이다. 상한 갈대 지팡이, 밑동 잘린 짧은 인생인데 내가 구원을 얻었으니 식구들이 다 아파도 그냥 교회 와서 나누면 최고의 로얄 패밀리인줄 믿는다. 그런데 자꾸 나으려고 하니까 인생이 힘들다. 다 없어질 것 가지고 그것이 썩은 지팡이라고 한다. 상한 갈대 지팡이라고 한다. 

 

상한 갈대 같은 우리 인생은 늘 의심에 빠질 때 나가서 예배해야 한다. 절망에 빠질 때 엎드려 기도해야 한다. 피하고 싶을 때 함께 나누어야 한다. 절망 속에서 빛을 들고 일어나야 하는 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