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교회_김양재목사님/주일설교녹취기록

인도함을 받으며(이성훈 목사님)

relife_es 2025. 6. 30. 22:55

시편(45:6-15)

6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원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

7왕은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시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왕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왕에게 부어 왕의 동료보다 뛰어나게 하셨나이다

8왕의 모든 옷은 몰약과 침향과 육계의 향기가 있으며 상아궁에서 나오는 현악은 왕을 즐겁게 하도다

9왕이 가까이 하는 여인들 중에는 왕들의 딸이 있으며 왕후는 오빌의 금으로 꾸미고 왕의 오른쪽에 서도다

10딸이여 듣고 보고 귀를 기울일지어다 네 백성과 네 아버지의 집을 잊어버릴지어다

11그리하면 왕이 네 아름다움을 사모하실지라 그는 네 주인이시니 너는 그를 경배할지어다

12두로의 딸은 예물을 드리고 백성 중 부한 자도 네 얼굴 보기를 원하리로다

13왕의 딸은 궁중에서 모든 영화를 누리니 그의 옷은 금으로 수 놓았도다

14수 놓은 옷을 입은 그는 왕께로 인도함을 받으며 시종하는 친구 처녀들도 왕께로 이끌려 갈 것이라

15그들은 기쁨과 즐거움으로 인도함을 받고 왕궁에 들어가리로다

 

우리가 매주 기도하던 제목이 이루어졌는데 결혼과 출산이 작년 7월부터 지난 4월까지 무려 10개월 연속으로 상승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33년 만의 일이라고 합니다. 우리 목사님과 같이 매주 기도했는데 그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인 줄 믿습니다. 우리가 나라를 위해서 더 열심히 더 간절히 기도해야 되겠습니다. 

결혼식에서 가장 주목 받는 순간은 언제일까요? 바로 신부 입장 일 것입니다. 신부가 빛나는 드레스를 입고 꽃길을 걸어갈 때 모든 시선이 신부에게 집중됩니다. 여기저기서 핸드폰 카메라 소리가 찰칵찰칵 들리고 와, 오 하는 감탄 소리가 곳곳에서 터져나옵니다. 그런데 신부는 혼자 걷지 않습니다. 아버지 손 꼭 잡고 걸어갑니다. 그리고 그 길 끝에는 신랑이 서 있습니다. 시편 45편은 결혼식 찬양입니다. 우리 인생 전체가 신랑 되신 예수님께로 인도함을 받으며 나아가는 신부 입장과 같습니다. 성부 하나님의 손에 이끌려서 성령 하나님의 효과적인 능력으로 도우심과 인도함을 받으면서 성자 하나님께 나아가는 여정입니다. 성도는 그렇게 천국에 들어갑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도함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천국은 우리 힘으로 들어가는 곳이 아닙니다. 천국은 인도함을 받으며 들어가는 곳입니다. 천국만 그런게 아닙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순간순간 마다 우리가 들어가야 하는 삶의 작은 목적지들이 다 있는데 그 목적지에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인도함을 받아야 할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 함께 생각해보겠습니다.

 

천국까지 인도함을 받으려면

1.왕후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6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원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

하나님이여~ 누기 이렇게 간절히 부를까요? 바로 고라 자손입니다. 고라는 출애굽때 모세에게 반역했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갑자기 땅에 싱크홀이 생겨서 고라와 그에게 가담했던 일당이 다 삼킴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 고라의 아들들은 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고라 자손은 말하자면 싱크홀 생존자입니다. 이런 무서운 심판에서 살아남은 것은 물론 너무 감사한 일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해도 고라 자손이라는 명찰은 반역자의 후손이라는 죄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 고라 자손을 성전 사역자로 세우셨습니다. 반역자 후손이라는 죄패를 단 채 사역자로 살아야 했으니 이 고라 자손은 더 괴로웠을 것 같습니다. 늘 수치와 무시를 당할 준비를 하고 살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꼭 이 고라 자손 같지 않을까요? 우리는 저마다 죄패를 달고 삽니다. 지우고 싶은 흑역사가 우리 각자에게 다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배를 드리고 큐티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삶에는 자신을 부끄럽게 하는 사건과 고난이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순간순간 드러나는 우리 자신의 약함과 악함이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내가 지금 이렇게 사는 게 맞나? 내가 이래도 되는 건가? 하는 고라 자손의 고뇌가 우리에게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순간 마다 하나님이여! 주여! 아버지여! 여호와여! 이렇게 하나님을 부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인생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부서질듯 흔들거리는 나의 의자에 간신히 걸터 앉아있으니 주님의 보좌를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당장 망해도 이상할 게 없는 내 나라에 살고 있으니 주의 나라를 사모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삶의 무게를 간신히 버티고 있는 그야말로 상한 갈대 같은 나의 지팡이에 겨우겨우 기대어 있으니 주의 나라의 규를 기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고라 자손 같은 부끄러움과 괴로움이 클수록 주님을 더욱 더 간절히 아버지여~ 부르게 됩니다. 우리가 이렇게 간절히 부르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7왕은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시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왕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왕에게 부어 왕의 동료보다 뛰어나게 하셨나이다

하나님은 100% 옳으신 우리의 왕이십니다. 우리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한 공의로 온 세상을 가장 공평하고 가장 정의롭게 통치하십니다. 가장 완전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대하십니까?

8왕의 모든 옷은 몰약과 침향과 육계의 향기가 있으며 상아궁에서 나오는 현악은 왕을 즐겁게 하도다

9왕이 가까이 하는 여인들 중에는 왕들의 딸이 있으며 왕후는 오빌의 금으로 꾸미고 왕의 오른쪽에 서도다

왕의 오른쪽은 왕의 바로 옆자리, 곧 왕후의 자리입니다. 가장 향기롭고 가장 즐거움이 충만한 곳입니다. 이런 영광스러운 자리를 누구에게 주십니까? 누구를 왕후로 세우십니까? 누가 이 왕후입니까?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그리스도의 신부가 바로 우리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남편이 밉고 아내가 싫어도 너무 낙담하지 마시기 바랍니가. 가장 완전하신 주님께서 우리의 진짜 신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른 존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왕후요 신부입니다. 이 땅의 남편이나 아내가 부족할수록 진정한 남편이신 주님을 더 사모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성도에게는 부족한 배우자도 복의 통로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존귀한 왕후의 자리에 수많은 세상 사람들 가운데 왜 굳이 저와 여러분을 세우셨을까요?

9절에 왕이 가까이 하는 여인들 중에는 왕들의 딸이 있다고 하십니다. 우리 말고도 왕후가 될 자격과 조건을 갖춘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 많고 많은 사람들을 다 제치시고 저와 여러분은 왕후의 자리에 세우시기로 선택하셨습니다. 특별하고 특별한 선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자리는 우리가 차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선택하셔서 은혜로 우리에게 주신 자리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그저 받기만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조건 주셨기 때문에 절대로 빼앗기지 않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우리도 이 자리를 떠나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 자리를 버려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받은 상을 우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함부로 버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상이 특별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신부, 예수님의 왕후 자리보다 더 특별한 자리가 어디있겠습니까? 아무리 좋은 상이라도 아무리 높은 자리라도 천국과 지옥을 결정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왕후 자리에 서야만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이 특별한 자리를 우리는 결코 떠나서는 안됩니다. 왕후의 자리를 지키는 것은 주님이 이 땅에서 우리에게 맡기신 우리 삶의 자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왕후의 자리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시간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우리 삶의 자리입니다. 가정을 지키고 교회를 지키고 나라를 지키는 게 왕후의 자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내 마음으로는 다른 데 가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 만나고 싶습니다. 이 자리를 떠나고 싶습니다. 내려놓고 싶습니다. 포기하고 싶습니다. 도망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래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정말 목숨 걸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다해서 최고의 능동으로 내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거져 주신 이 은혜를 최고의 수동으로 받는 이 은혜를 지키는 비결은 다른 것이 아니라 최고의 능동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어디에서요? 내가 지금 살고 있는 내 자리에서, 주님의 왕후의 자리에서 최고의 수동은 곧 최고의 능동이고 최고의 능동은 곧 최고의 수동입니다. 떠나고 싶으면 오늘 말씀처럼 하나님이여! 여호와여! 부르짖으세요.큐티책을 펴고 주님이 말씀해 주시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이 특별한 자리에 저와 여러분들을 택하고 빼고 빼서 세우신 우리 주님께서 반드시 책임져 주십니다. 인생의 어떠한 풍랑 속에서도 기쁘고 즐겁게 인도함을 받아서 천국에 입성하게 하실 것입니다. 

 

적용질문

-요즘 내가 자꾸 떠나고 시픈 자리는 어디입니까?

-힘들 때마다 내 입에서 나오는 단어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여"입니까?

-주님이 나를 왕후의 자리에 세워 주신 게 믿어집니까?

 

제게도 소싯적 머리 숱이 많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결혼식 장에서 나름 멋있게 차려 입고 신랑 입장을 했었더랬습니다. 그 꽃 길 끝에는 환하게 웃으며 그렇지만 또 수줍게 입장하는 신부가 있었습니다. 제가 첫 눈에 반해서 따라다닌 사람이었고 그래서 석 달 만에 결혼에 골인했습니다. 주례는 제가 가장 존경하는 저의 할아버지 목사님이 해주셨습니다. 은혜롭게 예식이 진행되어 이제 성혼선포 시간이었습니다. 증인들 앞에서 도장 찍는 제일 중요한 순간에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십니다. "이제 신랑 이성훈 군과 신부~ 신부~ 신부~" 결정적 순간에 우리 할아버지께서 말을 잇지 못하셨습니다. 장손 결혼식이 너무 감격스러우셔서 일까요? 신부 이름을 그것도 손자 며느리 이름을 까먹으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저는 아무 이름이 없는 무명의 신부와 결혼하게 되었고 퇴장할 때 그 무명의 신부는 씩씩한 발걸음과 씩씩거리는 숨소리로 꽃 길을 퇴장했습니다. 그렇게 저희는 결혼 첫날 부터 이혼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저는 할아버지께서 연로하셔서 그러신데 너무 감격하셔서 그러신 것이니 그냥 우리가 이해하자고 말했지만 아내는 하객 절반이 내 손님이고 이 정도 일이면 sns공식 사과문을 올려도 시원치않을 판에 네가 감히 할아버지 편을 들어? 하며 극 대노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아주 무섭네요. 여러분, 재판관이 되어주세요. 누가 옳은 겁니까? 아내와 저 중에 누가 옳습니까? 제가 옳은 것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이게 바로 저의 죄패입니다. 저는 제가 옳아야 합니다. 저만 옳습니다. 그러나 그 실체는 무엇입니까? 세상에서 자기 자신 혼자만 모르는 가장 미련한 바보입니다. 남들은 다 제가 바리새인 인 것을 아는데 저는 제가 박사 학위 따기 전까지 제가 바리새인 인 것을 몰랐습니다. 아니, 큐티인을 만나기 전까지 말이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를 주님이 아직 이 남편의 자리에 세워두신 것은 이것이야말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특별하고 특별한 은혜요 선택이라고 고백합니다. 

 

2'옛 사람'을 잊어버려야 합니다.

 

10딸이여 듣고 보고 귀를 기울일지어다 네 백성과 네 아버지의 집을 잊어버릴지어다

딸이여~ 얼마나 따듯하고 다정한 부름입니까? 예수님도 열두 해 혈루증 앓던 여인을 딸아~ 불러주셨구요, 보아스도 룻을 딸이여~ 불렀습니다. 딸은 연약해서 보호와 돌봄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고라 자손 시인의 입술을 통해서 저와 여러분들을 딸이여~ 불러주고 계십니다. 연약한 우리를 책임지시겠다는 뜻이구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고 따라오라는 뜻입니다. 어디로 따라오라고 말씀하십니까? 듣고 보고 귀를 기울일지어다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보고 귀를 기울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말씀을 한 번 듣고 그냥 넘기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하지 말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릴 때 온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이고 나아가 손과 발을 움직여서 삶으로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한 번 순종한데서 멈추지 말고 거기서 만족하지 말고 거기서 다 되었다고 하지 말고 계속해서 사건이 생길 때마다 계속해서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는, 그래서 전인격적으로 순종하라는 하나님의 촉구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신 것이 내 백성과 내 아버지의 집을 잊어버릴지어다 입니다. 성경에서 잊지 말라는 명령은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기억하라~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잊으라, 잊어버려라는 명령은 성경 전체에서 여기에만 딱 한 번 나옵니다. 내 백성과 내 아버지의 집을 잊어버리는 것이 얼마나 특별하고 얼마나 절박하고 얼마나 중대하면 하나님께서 성경 전체에서 이렇게 딱 한 번만 여기에 기록해 두셨겠습니까? 이 보석 같은 명령을 마치 보물찾기처럼 성경 안에 꼭꼭 숨겨놓은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처럼 이 보석 명령을 발견할 사람들에게 보물찾기에서 보물 찾은 기쁨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내 백성과 내 아버지의 집은 우리의 옛 사람을 말합니다. 내가 태어난 뿌리, 익숙한 가치관과 문화, 내 삶을 구성하고 있는 인간적인 모든 조건과 배경을 가리킵니다. 곧 우리 존재의 바탕이고 그러나 이 존재의 바탕이 죄로 완전히 망가졌고 무너졌고 오염되었기 때문에 이것을 우리는 원죄, 즉 옛사람이라고 하는 겁니다. 배우지 않아도 저절로 생기는 거짓과 음란, 의도하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끓어오르는 분노와 미움과 시기와 질투와 원망과 불평, 그리고 내 생각과 말과 행동을 지배하고 있는 이기적이고 교만한 가치관과 습관, 이런 모든 것이 다 우리의 옛사람이고 나의 백성이고 나의 아버지의 집입니다. 주님은 이 옛사람을 잊어버리라고 하십니다. 잊으라고 하시지만 이것은 단지 인식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이것은 또한 실천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하나님 백성의 조상으로 불러서 선택하셔서 세우셨을 때 뭐라고 하십니까?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잊어버리는 것은 떠나는 것입니다. 끊어내는 것입니다. 인식의 전환일뿐만 아니라 실천의 전환, 삶의 전환인 것입니다.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이 악한 생각과 습관과 이 관습을 목장에서 하나하나 나누고 말씀으로 하나하나 가지 쳐서 내고 목장 지체들의 처방에 따라서 멈추는 적용을 해야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옛사람을 잊어버리는 것과 주님의 말씀을 보고 듣고 귀를 기울이는 이 두가지가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똑같은 것이라는 겁니다. 비례관계에 있다는 겁니다.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만큼 옛사람을 잊어버리게 되고 옛사람을 잊어버리는 만큼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다시말해서 회개하는 만큼 말씀이 들리는 것이고 말씀이 들리는 만큼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백성과 내 아버지의 집인 나의 옛사람을 잊어버리는 회개의 유일한 길을 무엇이겠습니까? 내 영혼을 다른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구속사적으로 묵상해야 되는 것입니다. 눈으로만 읽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구속사적으로 묵상하면서 회개하고 적용해야 되는 것입니다. 날마다 큐티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말씀으로 인도함을 받아서 돌이키고 돌아설 때 주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11그리하면 왕이 네 아름다움을 사모하실지라 그는 네 주인이시니 너는 그를 경배할지어다

주님이 인정하시는 우리의 아름다움은 외모나 성품이나 재능의 아름다움이 아닙니다. 주님이 아름답게 보시는 것은 우리 뿌리 깊이 내리고 있는 옛사람을 잊어버리려는 매일의 몸부림입니다. 회개의 큐티입니다. 날마다 큐티하는 사람, 그래서 날마다 회개하는 사람이 주님보시기에 가장 아름다운 사람인 것입니다. 이 아름다움을 주님이 사모한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사모한다고 하니까 굉장히 점잖고 고상하게 들리지만 원문으로는 너무도 갖고싶어서 탈이 나서 꼭 가지고 싶다는 열망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을 뜻합니다.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의 뜨거운 사랑을, 열심을 새롭게 받고 있지 않습니까? 큐티하는 시간마다 목장으로 모일 때마다 이렇게 모여 예배 드릴 때마다 주님이 세상적으로는 볼품없는 것같은 우리들을 더욱 아름답게 빚어주시고 그 아름다움을 더 사모해주시는 줄 믿습니다. 우리가 이 사랑을 힘입어서 힘든 고난 가운데서, 어려운 사건 가운데서 인생이 무너지는 상황 가운데서 오늘 다시 말씀을 펴고, 오늘 다시 옛사람을 잊어버리고, 오늘 다시 회개하고, 오늘 다시 십자가 지는 순종을 하는 것이 우리 인생 최고의 아름다움입니다. 이것이 주님을 주님으로 경배하는 것입니다. 연약한 우리 인생을 통하여서 주님이 높임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옛사람을 잊어버리고 주님이 저보다 옳으십니다 고백하는 것이 그렇게 우리의 고백으로 주님을 경배할 때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진정한 기쁨과 즐거움으로 인도함을 받아서 우리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아서 천국에 들어가게 될 줄 믿습니다.

 

적용질문

-요즘 '내가 더 옳다'고 주장하는 생각은 무엇입니까?

-옛사람을 잊고 최고의 아름다움인 회개를 하기 위해 이번 주 어떤 적용을 하겠습니까?

-요즘 말씀이 잘 들립니까? 날마다 큐티하십니까?

 

3.서로 이끌고 이끌리며 함께 가야 합니다.

 

12두로의 딸은 예물을 드리고 백성 중 부한 자도 네 얼굴 보기를 원하리로다

두로의 딸, 즉 두로의 백성은 부자의 상징입니다. 두로는 늘 부자 도시였습니다. 그 부자 중에서도 특별히 부한자가 왕후의 얼굴 보기를 원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세상에서 잘 나가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신부인 저와 여러분, 성도들을 우러러 보리라는 말씀입니다. 왜그럴까요? 신부의 얼굴이나 성품이나 배경이나 조건 때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성도인 저와 여러분이 주목 받는 유일한 이유는 바로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들보다 아름다우시기 때문에 모든 존재들보다 영화로우시기 때문에 바로 그 옆, 오른쪽에 앉아 있는 왕후, 저와 여러분도 보고 싶어 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의 존귀함은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닙니다.

 

13왕의 딸은 궁중에서 모든 영화를 누리니 그의 옷은 금으로 수 놓았도다

하나님께서 딸이여~라고 불러주시는 왕후, 저와 여러분, 그리스도의 신부인 우리가 모든 영화를 누린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것을 어디에서 누린다고 하십니까? 궁중에서, 궁궐 안에서 가장 영화롭게 된다고 하십니다. 왕후가 가장 영화롭게 되는 곳은 궁궐 밖이 아니라 궁궐 안입니다. 그래서 다른 고라 자손의 시인 시편 48편에서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 즉...

왜 주의 궁정이 이렇게 좋을까요? 다른 이유가 아니라 왕이신 우리 주님께서 그 궁정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왕후가 또한 금으로 수 놓은 옷을 입었다고 하시는데 이것은 값비싼 명품 옷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주의 궁정에서 우리가 옷입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성자 예수님은 Revealed of God 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은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성육신적인 일들 중에서도 십자가 죽음에서 가장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다는 것은 주님의 십자가를 나의 십자가로 받아들이고 지는 것이고 고백하는 것이고 나아가서 지금 내 힘든 삶의 자리에, 당장이라도 떠나고 버리고 싶은 나의 자리에서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의 십자가를 잘 지고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이 죄인 임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것이고 다른 말로 큐티하는 것이고 당신이 나보다 옳습니다 고백하는 것입니다.

 

저의 부모님은 평생 큰 소리로 싸워보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결혼 후에 고성이 오갈 뿐만 아니라 공중으로 물건이 날아다니는 아주 다이나믹한 광경을 그저 앉아서 구경만 한 것이 아니라 제가 직접 연출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제 입으로 이런 말씀 드리기 참 죄송합니다만 저는 참 이성적인 사람입니다. 오죽 이성적이면 이름에 이성이라는 단어가 들어있겠습니까. 그래서 싸울 때도 최대한 흥분하지 않고 이성적으로 대화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아내는 화가 나면 '야'부터 외쳤습니다. 얼마전 목사님께서 아내가 남편을 '야'라고 부르면 안된다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겉으로 티는 못냈지만 속으로 그 말씀에 큰 소리로 '아멘' 했습니다. 저의 본가에서는 저를 부를 때도 늘 '이목사'로 부르셨기 때문에 처음에는 아내가 '야'라고 부르는 것이 저인 줄 몰랐습니다. '야'가 사람을 가리키는 단어이러라구요. 돌아보면 저와 아내의 싸움의 목표 자체가 달랐던 것 같습니다. 저는 잘 살아보려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말씀이 들려서 잘 살아보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목사여서 제 체면이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내는 결혼 첫 날부터 이 X와는 하루 빨리 이혼하는 것이 내 인생의 답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야'로 시작해서 각종 물건 포탄이 날아다니는 전쟁 가운데 저희 집에는 6인조로 사 놓았던 그릇 세트들이 지나고 보니 어느새 가족 수에 맞게 3인조가 되어있어라구요. 제일 힘들었던 것은 그릇을 던질 거면 싱크대에다 던져주면 얼마나 좋아요.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 치우기 편하잖아요. 효율적 아닙니까? 성질은 성질대로 풀고 쉽게 잘 치우고... 그런데 아내님께서 접시를 바닥에 던지는 겁니다. 그것도 모자가 던져 놓고는 휑하니 그냥 나가버리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 아들이 아직 걷기도 전 겨우 기어다니던 때입니다. 그러니 제가 아이가 파편에 다치지 않도록 들쳐 업고 집의 청소도구인 키친타올, 빗자루, 진공청소기, 돌돌이, 물티슈까지 총동원해서 산산히 부서져있는 유리 조각들을 아이가 다치지 않게 깨끗하게 다 치웠습니다. 그런데 진찌 비참함은 이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이후였습니다. 힘들게 다 치우고 아이를 겨우겨우 재우고 제 방으로 들어갑니다. 제 방에는 히브리어 성경과 헬라어 성경이 펼쳐저 있습니다. 그리고 라틴어와 헬라어, 영어와 독일어로 된 신학책들이 가득 차있습니다. 나는 이런 공부를 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작은 일이 아니라 큰 일을 할 사람인데 도대체 나는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건가? 싶었습니다. 그렇게 아내를 미워하고 주변 사람들을 탓하고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저 여자 때문에 인생이 망했다. 감히 큰 일을 할 목사인 나를 이렇게 괴롭히다니 저 여자는 사람이 아니라 사탄이다 이런 생각까지 했습니다. 이 생각을 목사 안수 받는 그 날에도 했습니다. 당시 17층에 살았는데 맘이 너무 힘들때면 1층을 바라보면서 뛰어내려야 되겠다는 생각까지 했었더랬습니다. 참고로 얼마전 설교에서 제가 이제 아내의 수고가 그쳤습니다 그랬는데 많은 분들이 서운해 하시면서 걱정을 해주시더라구요. 걱정은 제가 감사히 받겠습니다만 그릇 던지는 수고만 그친 것이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겠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 교회의 지체로서 잘 머무는 것입니다. 우리가 옷을 몸에 딱 붙게 입을 수도 있고 펑퍼짐하게 입을 수도 있지만 어떤 옷이든 몸에 붙어 있는 것입니다. 몸에서 떨어지면 큰 일 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로 옷 입는 다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딱 붙어있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신부인 우리가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로 옷 입은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14수 놓은 옷을 입은 그는 왕께로 인도함을 받으며 시종하는 친구 처녀들도 왕께로 이끌려 갈 것이라

15그들은 기쁨과 즐거움으로 인도함을 받고 왕궁에 들어가리로다

그리스도로 옷 입은 왕후는 왕께로 인도함을 받습니다. 왕께 스스로 나가는 게 아닙니다. 아무리 좋은 자리에 앉았다고 왕후의 자리에 올랐다고 스스로 나가는 게 아닙니다. 인도함을 받으며 들어갑니다. 누구의 인도함을 받습니까? 로마서 8장에서 말씀하시듯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 이십니다. 진리의 성령께서 우리를 모든 진리로 인도해 가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주님의 왕후, 그리스도의 신부는 혼자서만 성령께 이끌려서 왕궁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시종하는 친구 처녀들을 이끌고 그들과 함께 왕궁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 친구 처녀들은 이 왕후가 이끄는 대로 이끌림을 받아서 왕후와 함께 왕궁에 들어갑니다. 우리가 주께로 이끌어야 할 이 친구 처녀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의 가족과 지체와 이웃입니다. 특히 아직 주님을 믿지 않는 그래서 아직 주님의 왕후 자리에 서지 못한 우리의 가족과 이웃들 입니다. 그들이 바로 우리의 친구, 처녀들입니다. 그리스도의 신부인 성도는 성령께 인도함을 받는 자이자 동시에 가족과 지체와 이웃을 신랑이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자입니다. 성도는 혼자만 천국에 들어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구원은 혼자만 받는 게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우리의 지체들과 함께 교회로 불러주셨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서로 이끌고 이끌려서 함께 천국에 들어가는 존재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서로 이끌고 이끌리면서 함께 인생 여정을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성령의 기쁨과 즐거움인 줄 믿습니다. 우리가 교회 공동체에서 느낄수 있는 진정한 기쁨과 즐거움 입니다. 이 기쁨과 즐거움으로 우리가 인도함을 잘 받아서 마침내 주님께서 계신 그 왕궁에 영원한 하늘나라 천국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릇이 날아다니는 그 전쟁 통에서 그릇을 던진 아내의 마음이 더 곤고했는지 결국 저보다 먼저 아내가 우리들교회로 인도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들교회에 와서 말씀이 들렸습니다. 말씀 앞에 엎드러졌습니다. 그래서 아내가 저에게 나같은 사람과 살아줘서 고맙다고 먼저 고백을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신학박사인 제게 큐티인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목사 가정에서 자라 목사인 저를 우리들 공동체로 인도해 주었습니다. 이끌어 주었습니다. 그렇게 저희 가정은 우리들공동체로 인도함을 받아서 지금까지 가정이 지켜지고 있습니다. 서로 앞서기 뒤서기 하면서 각자 주어진 자리에서 이제는 그릇을 상대방에게 던지지 않고 스스로에게 말씀을 던지면서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습니다. 참 지금 생각하면 그당시에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았는지 너무 부끄럽습니다. 뭘 믿고 자신만만했고 뭘 믿고 그렇게 높은 마음을 품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저는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존재입니다. 아무데도 쓸모 없는 인생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우리 공동체 안에서 말씀과 성령의 인도함을 같이 받고 있기에 이렇게 쓸모 없고 이렇게 교만하고 나만 옳다는 죄패를 붙이고 있는 고라 자손 같은 저임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과 함께 왕궁에 들어가리로다 이 찬양을 이 고백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말로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공동체에 잘 붙어서 성령의 인도함을 함께 잘 받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이번 한주도 여러분의 힘든 상황, 환경에서 매순간 성령의 인도하심을 잘 받으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십자가 지는 적용으로 가정과 목장에서, 학교와 일터에서 가족과 지체와 이웃을 주님의 몸인 이 교회로 인도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서로 이끌고 이끌려 함께 한 걸음 씩 나아갈 때 우리 모두 하나님의 왕궁에 들어가는 가장 복된 인생 될 줄 믿습니다.

 

적용질문

-요즘 내 삶의 기쁨과 즐거움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낫습니까? 

-나는 목장에서 지체들에게 이끌림을 잘 받고 있습니까? 내가 그리스도께로 이끌어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우리 인생의 목적지는 우리나라 좋은 나라가 아닙니다. 우리 인생의 목적지는 천국입니다. 행복이 아닌 거룩입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까? 첫째는 주님이 은혜로 주신 왕후 자리를 지켜야 됩니다. 둘째는 내 백성과 내 아버지의 집인 나의 옛사람을 잊어버려야 합니다. 세째는 서로 이끌고 이끌리며 함께 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