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하여 구원하리라(김양재 목사님)
열왕기하 19:29-37
29또 네게 보일 징조가 이러하니 너희가 금년에는 스스로 자라난 것을 먹고 내년에는 그것에서 난 것을 먹되 제삼년에는 심고 거두며 포도원을 심고 그 열매를 먹으리라
30유다 족속 중에서 피하고 남은 자는 다시 아래로 뿌리를 내리고 위로 열매를 맺을지라
31남은 자는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피하는 자는 시온 산에서부터 나오리니 여호와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루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32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을 가리켜 이르시기를 그가 이 성에 이르지 못하며 이리로 화살을 쏘지 못하며 방패를 성을 향하여 세우지 못하며 치려고 토성을 쌓지도 못하고
33오던 길로 돌아가고 이 성에 이르지 못하리라 하셨으니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시라
34내가 나와 나의 종 다윗을 위하여 이 성을 보호하여 구원하리라 하셨나이다 하였더라
35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영에서 군사 십팔만 오천 명을 친지라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더라
36앗수르 왕 산헤립이 떠나 돌아가서 니느웨에 거주하더니
37그가 그의 신 니스록의 신전에서 경배할 때에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이 그를 칼로 쳐죽이고 아라랏 땅으로 그들이 도망하매 그 아들 에살핫돈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지난 한 주 큐티 목회하시는 목사님들과 함께 새벽마다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늘 하던 여전한 방식으로 말씀대로 가정과 교회와 나라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우리들교회 성도님들보다 더 리얼한 씽크허브 교회 목사님과 사모님들의 구속사 간증의 큐티 목회의 현장이었고 강에서 바다로 가는 실감나는 기도회였습니다. 대선 후에 드린 기도는 너무 시의 적절했다는 생각이 들고요 기복보다는 팔복의 가치관으로 회개하게 하셔서 너무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필요한 것은 회개 운동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말씀대로 드린 우리의 모든 부르짖는 기도가 100% 응답된 줄 믿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해서 구원하옵소서 구원하옵소서 간절히 기도한 것만 생각하면서 구원 받지 못한 것 같은 현실 앞에서 실망하고 걱정하고 두려워합니다. 오늘 하나님은 우리를 반드시 보호하여 구원하신다고 하십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보호하여 구원하시는지 생각해보겠습니다.
보호하여 구원하리라는
1.여호와의 열심이 이루십니다.
29또 네게 보일 징조가 이러하니 너희가 금년에는 스스로 자라난 것을 먹고 내년에는 그것에서 난 것을 먹되 제삼년에는 심고 거두며 포도원을 심고 그 열매를 먹으리라
히스기야가 산헤립 때문에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산헤립을 갈고리를 코에 꿰고 재갈을 입에 물려 끌어서 돌이키리라고 약속해주셨습니다. 산헤립을 쳐단해주신다는 얘기였는데 하나님은 놀랍게도 말씀만이 아니라 징조도 주십니다. 말씀은 들려주시는 것이고 징조는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들은 말씀을 확실히 믿을 수 있도록 하나님은 징조를 통해서도 확신을 주십니다. 성경을 구속사로 읽고 들어야 합니다. 이 징조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금년과 내년에는 밭에서 스스로 자라난 것을 먹는 다는 것입니다. 농사는 못지었지만 밭에서 저절로 난 것을 먹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후년에는 다시 농사지어서 얻은 수확물을 먹게 된다고 하십니다. 징조는 sgin(표지판)입니다.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는 화살표입니다. 그러면 이 징조는 어디를 가리키고 있습니까? 지금 예루살렘이 앗수르 군대에게 포위되어 있습니다. 성 밖에 나가 농사 짓고 수확 할 수가 없습니다. 성 안 창고에 저장한 식량이 떨어지면 먹을 게 없습니다. 이것이 제일 큰 문제인데 하나님은 이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을 징조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통장 잔고가 없다고 하나님이 나를 잊어버리셨나 이러시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밭에 나가지 못하는 현실, 농사도 짓지 못하는 현실이지만 그래도 아직 굶어죽지 않고 남아있습니다. 살아있잖아요. 사실은 암담한 현실 자체가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징조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앗수르가 물러가서 짠하고 펼쳐지는 기적만 징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처해있는 이 어려운 상황도, 고난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징조 중의 징조인 것입니다. 돈 많이 벌고 통장에 잔고가 많은 것이 징조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기가 너무 쉽습니다. 알맞게 없었기 때문에 아까 우리 목자님이 교회를 열심히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천천히 응답되는 것이 우리의 성숙을 위한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감당할만한 시험을 주세요. 그래서 홀로서기를 하게하십니다. 성 안에 갇혀서 나가지 못하는 현실, 농사 못짓는 상황이 징조가 되어 가리키는 목적지는 어디입니까?
30유다 족속 중에서 피하고 남은 자는 다시 아래로 뿌리를 내리고 위로 열매를 맺을지라
31남은 자는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피하는 자는 시온 산에서부터 나오리니 여호와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루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피하고 남은 자, 겪을 일 다 겪고 겨우겨우 살아남은 사람입니다. 가장 깊은 슬픔과 절망에 놓인 사람입니다. 남은 삶에서 어떤 기대도 할 수 없는, 그야말로 숨만 쉬고있는 사람입니다. 다 잃어버린 사람, 다 떠나보낸 사람, 내일을 생각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런 남은 자에게 다시가 있으리라고 하십니다. 다시 뿌리를 내리고 다시 열매를 맺을지라고 하십니다. 이런 회복이 어떤 소망도 남지 않았던 예루살렘에서 시작된다고 하십니다. 이런 다시의 회복이 징조가 가리키는 목적지입니다. 오늘 피하고 남은 자가 되어 갇혀있는 현실이 가리키는 목적지는 멸망이 아닌 다시의 회복입니다. 히스기야는 당장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는 앗수르 군사가 죽냐 안죽냐 이것만 걱정합니다. 당장 눈 앞의 앗수르가 예루살렘을 집어삼킬듯 하고 있으니까 장차 주께서 끝까지 믿음을 지킨 남은 자들을 어찌한다는 이런 말씀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지 않겠어요? 우리는 선거에서 이겨야만 응답이고 지며 실패야 밖에 모르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다르게 해석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으로 피하고 남은 자는 다시 회복된다고 하십니다. 그만큼 이것은 기적입니다. 우리 생각으로는 기대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기적을 주님이 약속하세요. 거짓이 없으신 주님이 말씀하시는 일입니다.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어떻게 가능합니까?
31...여호와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루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열심은 무엇을 잃지 않으려는 불타는 사랑을 말합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열심이 이런 기적을 이루신다고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절대로 빼앗기지 않으시려는 이 열심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열심으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다시 뿌리를 주시고 다시 열매를 주십니다. 다시 회복되는 기적은 우리 힘으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정치인이, 기대하는 정책이, 의지하는 재력이 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다시 회복되는 기적은 오직 여호와의 열심이 이루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에서 우리를 빼앗아가려는 모든 악으로부터 우리를 다시 살아나게 하시는 유일한 힘은 여호와의 열심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여호와의 열심이 이루시기 때문에 오늘 갇혀있는 상황에서도 우리는 뿌리를 잘 내리고 열매를 잘 맺을수 있는 것입니다. 그 능력이 하나님께서 이 일을 모두 완료할때까지 결코 멈추지 않으시리라는 말씀입니다. 히스기야가 기도하는 그 순간부터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면서 앗수르로부터 히스기야와 유다 백성을 살리기 위하여 힘을 다하실 줄 믿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때 끝까지 주님을 찾은 주의 백성들을 사탄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가지신 모든 능력을 다하여 끝까지 힘써 일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약속하시는 것이니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실 줄 믿습니다.
적용질문
- 내가 보고 싶은 징조는 무엇입니까? 지금 어디에 갇혀있습니까?
- 갇혀있음이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징조임을 믿습니까?
- 어떤 경우에도 피하고 남은 자가 되어 다시 거기에 뿌리 내리고 맺어야 할 열매는 무엇입니까?
성령이 임하여 가라사대 네 집에 들어가서 문닫고 벙어리가 되어서 책망자가 되지 말라고 했잖아요. 저를 집 밖에 나가지 못하는 것을 징조로 하나님께 인도하는 sgin이 되고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말씀을 나에게 주시는 음성으로 들을 수 있어야 됩니다.
THINK 새벽기도회의 기획은 정말 시의 적절했다고 생각하고 모든 사모님이 특히 진심을 보여주셨는데 다들 첫번째로 하는 말이 우리 가정이 살아났다고 그러셔요. 목사님과 사모님 가정이 살아났다고... 본인들이 살아나니까 성도들에게 살아난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방법론이 아닙니다. 살아났으니까 살아난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목사님도 사모님도 다 고부간에 부부간에 자녀간의 갈등을 있는 그대로 나눠주셨는데 강사님들의 부모님이 특별히 목사님 자녀가 많으셨습니다. 부모님이 목사님이다 보면 어렸을 때부터 솔직하게 나누기가 힘듭니다. 나는 목사 자녀인데 내가 이러면 돼... 그런데 본인이 살아나니까 별인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어찌나 솔직하게 하시는지 우리가 도리어 분발해야 될 지경입니다. 이렇게 대단한 목사님, 사모님들이 자기 얘기를 나눈다면 우리가 못할 게 뭐가 있겠어요? 큐티 목회의 진수를 보여주셨고 사모님들의 간증이 다 기가막혔지만 특별한 특징은 솔직함이었습니다. 그렇게 솔직하니까 자유함이 있고 재미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배설물로 여겼다고 했는데 그런 마음을 가지신 것 같습니다. 그 솔직함의 약재료로 성도님들이 다 살아나겠구나 하는 한국교회의 소망을 보았습니다. 큐티 목회는 특별히 사모님들이 정말 중요하구나...
한 사모님은 양육까지 다 받아 좋은 일이 생기나 했더니 상으로 유방암이 생기셨답니다. 그런데 그 때 양육 강사님이 양육 받을 때 '사모님이 깨어지시면 교회에 부흥이 올거에요'라고 해주셨던 말씀이 치료 기간 중 생각이 났다고 하는데 이런 이야기를 솔직하게 나눈다는 것이 매력있습니다.
또 한 사모님은 사랑해주지 않았던 남편 때문에 부모님과 같이 사는데 직설적이고 강한 시어머니 때문에 힘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양육을 받으면서 남편과 시어머니를 속인 자라는 것을 인정하며 용서를 구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또 한 사모님은 미국에서 유학할 때 방탕하게 음주 가무를 즐기며 인생의 주인공이 저인줄 알고 살았습니다. 그렇게 미국 물을 오래 먹고 치과의사가 되었는데 한국에 와서 사모로 사는 것은 너무나 견디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남편은 착한 아이 증후군에 연예인 병이 중증이라 제 편은 안들고 날마다 성도 편만 들어서 저는 우울과 분노만 커져 가서 억울하기가 짝이 없었는데 시도때도 없이 미국으로 돌아가자고 졸랐고 그게 안되면 팔에 문신을 새겨서 예배 안내 할 때마다 무시무시한 문신을 들이대면서 성도들을 겁주고 싶다고 협박을 했답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상처를 핑게대며 죄를 짓고 살던 제게 주님처럼 남편도 가족들도 모두 저를 기다려 주었습니다.
또 한 사모님은 세째 아이 낙태를 남편 목사님이 반대해서 부부관계가 급속도로 나빠졌고 생명을 살리러 간 선교지에서 또다시 생명을 죽인 자신에게 절망하여 죽고 싶은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 때 부터 저는 5살, 3살 된 아이들에게 분노를 쏟아내며 정서적, 신체적 학대를 하기 시작해서 아이들로 하여금 꽤 오랫동안 지옥을 살게했고 이런 가운데서도 인정 중독자인 저는 인정 받고자 아이들을 입시 지옥으로 내몰았습니다. 이번에 간증을 한다는 얘기를 들을 딸이 나는 수년간 얼마나 엄마에게 많이 맞았는데 어떻게 엄마는 그 학대를 단 3초만에 회개로 끝낼 수가 있어 했다는데 서로 말씀을 보니 이런 얘기가 되는 것 같습니다. 3년 전에 입시로 미국으로 유학을 보낸 아들의 유일한 유학생 친구가 같은 방 룸메이트를 칼로 찔러 살해를 해서 살인자가 되어 아들은 졸지에 살인자의 유일한 친구가 되었다고 합니다. 유학까지 가고 교회에서는 청년부 회장까지 하던 아들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을 겪어 PTSD로 심각한 학업장애와 우울과 공황장애까지 겪으면서도 휴학을 했는데도 집이 지옥 같아서 돌아오기 싫어 계속 버티었다는 것을 집에 온지 한 달이난 지나서야 얘기 들을 수 있었습니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13회 목세 때는 이혼하고 죽고 싶었던 제가 살아나 부부관계가 회복되었는데 이번 20회 목세 때는 우울과 공황으로 죽고 싶었던 아들과 같이 와서 살아나는 복을 누리게 하시니 저희 가정이 목세의 최대 수혜자 임이 확실합니다. 이 부부가 공부를 많이 했는데 그런 이야기 하나도 안하고 이런 얘기를 솔직하게 해주셨습니다. 이제 아들이 미국으로 돌아갈텐데 이번에 해석 받고 다시 회복되어서 뿌리를 내리기를 바랍니다.
진짜 한국 교회에 이런 목사님, 사모님 부터 너무 회개하는 운동이 들풀처럼 일어나길 소원합니다.
2.누구도 건드리지 못합니다.
32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을 가리켜 이르시기를 그가 이 성에 이르지 못하며 이리로 화살을 쏘지 못하며 방패를 성을 향하여 세우지 못하며 치려고 토성을 쌓지도 못하고
33오던 길로 돌아가고 이 성에 이르지 못하리라 하셨으니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시라
그러므로 라고 하시는데요 여호와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루시기 때문에 이 기적같은 회복을 이루실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결과가 따라옵니다. 어떤 결과요? 앗수르 왕 산헤립이 예루살렘 성에 이르지 못한다는 겁니다. 이 성에 이르지 못한다는 말이 32절과 33절에 반복되어 강조합니다. 사실 지금 앗수르 군대는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르지도 못한다고 하세요. 포위하고 있지만 도착하지도 못한 것과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세계 최강 앗수르 군대가 마음만 먹으면 어디든 가서 점령하고 있는데 그들이 예루살렘을 향해서는 화살을 쏘지 못한다는 겁니다. 공격 개시를 못한다는 겁니다. 옛날 전쟁에서는 화살이 공격을 시작하는 무기였습니다. 누구도 막지 못하던 앗수르의 화살인데 예루살렘으로는 발사조차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세상 어떤 군대의 공격도 다 막아내던 철벽같은 앗수르 군의 방패인데 예루살렘을 향해서는 세우지도 못합니다. 세상의 유명한 요새들도 다 뛰어넘어 치던 앗수르 군의 토성인데 예루살렘을 향해서는 쌓지도 못한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에게 앗수르 군사들이 단 한 발자국도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그들이 쏘는 화살 하나도 성벽을 넘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게 다가 아닙니다. 앗수르 군은 예루살렘을 공격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오던 길로 돌아갑니다. 점령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해요. 아무리 빼앗고 싶어도 무슨 수를 쓴다해도 가까이 이르지도 못한다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여호와의 열심이 일을 이루시기 때문에 따라오는 결과입니다. 끊임없이 사탄에게 노출되어 있지만 목자되시는 하나님의 열심이 나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게 있습니다.
34내가 나와 나의 종 다윗을 위하여 이 성을 보호하여 구원하리라 하셨나이다 하였더라
앗수르 왕 산헤립이 가까이 오지 못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예루살렘 자체가 지킬 힘을 갖추는 것이죠. 스스로 힘이 없으면 적군이 오지 않아도 스스로 망하는 겁니다. 지금 예루살렘은 히스기야가 아무리 대단한 개혁을 했어도 너무 연약한 겁니다. 예루살렘 온 백성이 산헤립의 신하 랍사게 한 사람을 당해내지 못하는 것을 우리는 다 보았습니다. 앗수르 군대가 공격하지 않고 포위만 하고 있어도 저절로 무너질 지경일 만큼 연약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내가 이 성을 보호하여 구원하리라 하십니다. 보호하리라만 하셔도 감사하고 구원하리라만 하셔도 감사한데 보호하고 구원하리라 하십니다. 누구를요? 슬픔과 분노와 절망에 빠진 예루살렘 성을 보호하여 구원하리라 하십니다. 보호하다로 번역한 히브리어 가나는 성경에 7번 만 쓰였는데 7번 모두 보호하는 대상이 같습니다. 바로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 역시 sgin입니다. 표지판이자 화살표입니다. 문자적으로 예루살렘 성과 사람을 가리키는 게 아니고 영원한 하나님의 도성인 새예루살렘을 상징합니다. 새예루살렘은 바로 교회입니다. 바로 우리들입니다. 보호하다는 말은 날개로 덮듯 방패로 가리듯 담으로 둘러 막듯 안전하게 지킨다는 뜻입니다. 7번 중 가장 유명한 구절이 이사야31:5 새가 날개 치며 그 새끼를 보호함 같이 나 만군의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보호할 것이라... 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교회를 보호하신다는 것은 교회를 향한 모든 공격을 하나님께서 대신 맞아주신다는 뜻입니다. 땅 끝에서 우리를 맞아주시리... 공격을 하나님께서 막아주신다는 게 아니라 맞아주신다는 겁니다. 모든 공격을 하나님께서 맞아주신다는 겁니다. 왜죠? 하나님이 우리를 자기 생명보다 더 귀하게 여겨 지키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보호의 완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선교에서 이기고 지고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받을 징벌과 죽음을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미 대신 다 받으셨습니다. 새가 날개 치며 새끼를 보호함 같이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셨습니다. 죄와 사망이 쏘는 모든 공격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셨습니다. 이렇게 자기 몸을 내어주시는 것이 주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새끼, 내 새끼입니다. 자기 몸을 내어주시는 보호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죄와 사망에서 건져 다시 살려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라는 이름의 뜻 아니겠습니까? 우리를 구원하신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엄청난 보호와 구원을 누구를 위해 베푸신다고 말씀하셨습니까? 우리를 위하여 하셨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또 하나님의 종 다윗을 위하여 보호하여 구원하리라 하십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무조건 보호하여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를 위해 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잖아요. 조건적입니다. 우리가 보호 받을 만하면 보호하고 그렇지 않으면 버릴 수 있잖아요. 하지만 하나님의 보호와 구원을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베푸시기 때문에 절대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조그만 것 하나라도 오픈하려면 자신에 대해 죽지 않으면 오픈 못하는 겁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자신이 죽지 않으시면 우리를 살리실 수가 없어요. 그것이 십자가 사건인 것입니다. 자기 아들을 죽이셔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맞아주신 것입니다. 다윗을 위하여 하신다는 것은 다윗과 맺은 언약을 지키신다는 뜻입니다. 그 후손이 어떠하든지, 지금 여기 있는 우리가 어떠하든지 하나님은 모든 성도 대표로 다윗과 맺으신 언약 때문에 우리를 반드시 보호하여 구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그 누구도 건드리지 못합니다. 앗수르의 산헤립이든 그보다 더한 누구든 네로든 히틀러든 스탈린이든 모택동이든 김일성이든 그 어떤 독재자도 그 어떤 박해자도 교회를 건드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무조건적으로 자녀들을 보호하여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아수르 왕 산헤립과 같은 사건에 의해 공격 당하고 있습니까? 내 힘으로 할 수 있는게 하나도 없어서 절망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택자요 성도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건드리지 못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절대 보호하여 구원하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산헤립의 악을 아시고 보시고 들으시고 통치하고 계시는 줄 믿습니다. 우리가 원수 갚으면 안되고 하나님이 맞아주신다고 했습니다. 절대 보호하여 구원하실 줄 믿습니다.
목양 역사의 재미있는 이야기
양은 10시 쯤 풀 뜯어 먹고 새김질을 해야 합니다. 우리도 말씀 듣고 새김질을 해야 합니다. 군대 생활 처럼 여러마리가 같이 다닙니다. 양은 누워서 풀을 뜯어 먹지 않습니다. 누울 수 없는 양들은 쫒기고 여유가 없고 그래서 겁이 많다고 합니다. 몸이 둔하고 뿔이 있어도 소용이 없고 토끼만 튀어나와도 놀라고 한 마리만 뛰어도 수 백마리가 같이 뛴답니다. 이 대선에도 진짜 관심있는 사람은 국민의 2% 밖에 없다는 거에요. 그런데 한 사람이 뛰면 다같이 뛴다는 겁니다. 주를 위해 살리라 해도 우리는 겁이 많은 사람입니다. 양은 공포에서 해방되지 않으면 누울수가 없다고 합니다. 뒤짚어지면 자기 힘으로 일어나지 못합니다. 누군가 와서 일으켜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양의 전공은 낙망하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낙망하는고(시편42) 여기서 가장 결정적인 위협이 여우인데 이 여우가 양 앞에서 부리는 재주가 하도 희한해서 목자도 여우 쫒다가 구경까지 한다고 합니다. 양들이 새끼를 낳으면 돌담을 통해 따로 수용하는데 그 안에는 아주 좋은 풀들이 자라고 있는데 여우가 그것을 위에서 내려다보고 이른 새벽에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때 내려온답니다. 차근차근 내려오기에 여우가 양들에게 관심이 전혀없다고 생각하도록 내려오다가 가속이 붙어 담장에 딱 올라 붙는다고 합니다. 좌우로 관찰하고도 여우가 가만히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어린 양이 내 밥이구나 하며 눈초리가 반짝반짝한 모습이 어찌나 여유가 있는지 모른답니다. 그러다 누군가 여우의 존재를 알아보고 어수선해질 때 공격을 합니다. 양들이 어쩔줄 몰라할 때 반대 저편으로 갑니다. 그리고 양을 뺑뺑이 돌립니다. 그러다가 여우가 가만히 있으면 양도 가만히 있답니다. 양이 아주 아둔하고 길도 모릅니다. 눈으로 보면 360도를 보는데 양은 자기 코 앞만 집중해서 본다고 합니다. 시선이 산만하다는 겁니다. 우리도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처럼 보이지만 딴 곳에 시선을 두는 것과 같습니다. 진짜 코 앞만 보기에 여기 풀이 있구나 여기 풀이 있구나 하다가 다 길을 잃어버린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우가 좌로 몰고 우로 몰고 북으로 몰고 남으로 몰고 뺑뺑이를 돌리며 골릴대로 골리다가 딱 서있으면 양 중에 강하고 약한 것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가 찍은 양을 가서 죽인다고 합니다. 자기 새끼 먹이려고 물고 간다고 합니다. 한 번 그러면 초장지를 바꿔야 합니다. 고쳐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고쳐서 무슨 소용이 있어 하지만 아니라는 겁니다. 양이 그렇게 새끼를 물고 갔는데도 깨닫지 못해 또 같은 짓을 여우가 하는데 한 번에 여우가 3백 마리 새끼까지 죽이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배고파서 죽이는 게 아니라 골리느라 죽인다는 것입니다. 악한 세력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목자는 어디로 갔나요? 새벽에 장총 매고 여우가 나타나기를 기다립니다. 여우 잡아야 하니까 여우를 볼 수 있는 곳에 기다리기도 하고 도망가게도 하고 죽여서 걸어놓기도 합니다. 그런데 양들의 입장에서는 목자가 안 보이니까 없는 것입니다. 불꽃같은 눈으로 지켜주고 한순간에 여우의 존재가 사라지는데 목자는 안중에도 없고 평소에는 신뢰하는 것 같아도 딱 안 보이면 얼마나 신뢰가 약한지를 보여줍니다. 우리가 이렇게 양 같습니다. 우리가 어렵고 무서운 여우의 일만 들어오지 여우를 더 노려보고 계시는 하나님을 못 보기에 날마다 두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열심 때문에 사단은 하나님의 성도인 우리에게 이르지 못하고 살을 쏘지 못하고 방패를 세우지 못하며 토성을 쌓지 못하게 하는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내가 얼마나 양같이 미련한지를 한 번 생각해보세요.
적용
-내 것 아닌 것을 차지하려고 앗수르처럼 돌진하고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예루살렘처럼 무력하게 당하고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나는 하나님께서 무조건 보호하여 구원하시는 택자임을 믿습니까?
3.이 밤에 말씀대로 역전하십니다.
35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영에서 군사 십팔만 오천 명을 친지라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더라
예루살렘을 보호하여 구원하시겠다는 말씀이 임한 그 밤에 하나님은 즉시 말씀대로 이루십니다. 조금도 지체하지 않으시고 바로 그 밤에 천사 한 명을 보내 앗수르 군사 18만 5천명을 치십니다. 세계를 주무르던 18만 5천의 군대가 하룻밤 사이에 시체로 변했습니다. 랍사게의 말만 듣고도 무서워서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벌벌 떨던 예루살렘 백성입니다. 산헤립 편지 한 통 받고 나라 망했다며 절망하던 백성입니다. 그런데 히스기야 한 사람이 산헤립 때문에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들으셨어요. 말씀으로 응답하십니다. 그리고 바로 그 날 밤에 말씀대로 앗수르 군대를 저 세상으로 다 날려 보내십니다. 앗수르 군대가 자기 힘을 믿고 교만하게 하나님의 백성을 빼앗으려 하니까 하나님이 바로 응징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산헤립 때문에 아파하고 슬퍼하고 낙심하는 밤을 지날 때 그 마음을 하나님 앞에 다 펼쳐서 아뢰면 내 기도 듣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이 말씀으로 응답하십니다. 바로 그 밤에 말씀대로 상황을 바꿔주십니다. 역전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즉각적인 역전을 앗수르 왕 산헤립도 피하지 못합니다.
36앗수르 왕 산헤립이 떠나 돌아가서 니느웨에 거주하더니
37그가 그의 신 니스록의 신전에서 경배할 때에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이 그를 칼로 쳐죽이고 아라랏 땅으로 그들이 도망하매 그 아들 에살핫돈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7절에 내가 한 영을 그의 속에 두어 그로 소문을 듣고 그의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고 또 그의 본국에서 그에게 칼에 죽게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이 말씀 그대로 산헤립에게 이루어졌습니다. 하룻밤새 모든 군대를 잃은 산헤립은 말씀대로 앗수르 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산헤립은 18만 5천명이 죽던 그 날 밤은 피한것 같지만 이 밤은 우리가 원하고 계획한 시간이 아닙니다. 이 밤은 하나님의 시간입니다.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시간입니다. 산헤립에게도 그 때는 피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 밤이 불현듯 찾아옵니다.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의 칼에 죽습니다. 그런데 바벨론 역대기에 보면 이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은 놀랍게도 산헤립의 아들이었습니다. 온 세상의 주인 행세하던 산헤립, 이세상에 아무도 감히 자신에게 반역할 사람이 없다고 자신했던 산헤립이 결국 자기 두 아들의 손에 죽었습니다. 역전도 이런 역전이 없습니다. 우리 시간으로 보니까 거기가 이긴 것 같지만 하나님의 시간으로 보면 한 뼘 밖에 안되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전 세계를 이겼는데 자기 아들 둘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하루 아침에 인생이 뒤집어졌습니다. 아들에게 신들의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에게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열왕기서에 자식이 모반하는 것으로 징계하는 것을 종종 보잖아요. 우리는 믿어도 안 믿어도 자식이 우상이기 때문에 잘못살면 자식으로 치시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인 것 같습니다. 출애굽 할 때도 바로의 장자를 치시니까 금새 보내주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자식이 배반을 해도 내 자식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고 또 그 자리에 마지막 아들 엣살핫돈을 세우는 겁니다. 우리는 자식을 못버립니다. 내 자식, 내 고향 이것 밖에 모릅니다. 죽을 때까지 대를 이어서 고향 사람, 내 자식 말만 듣습니다. 이 앗수르가 우리 전세계의 악을 보여주는 세속사의 끝판왕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산헤립에게 18만 5천명의 군대가 순식간에 송장이 된 그 밤의 사건은 산헤립에게는 절호의 기회인 것입니다. 왔던 길로 돌이키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돌이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나아갈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산헤립에게는 아직 앗수르라는 대제국이 남아있고 돌아가 편안히 거할 니느웨가 남아있었고 궁궐이 있었습니다. 이 큰 고난을 당하고도 아직 자기 밖에 모르니까 18만 5천명이 죽어도 자기 밖에 모릅니다. 아직 세상에 기댈 자리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오지 않습니다. 죄악에 물든 인생을 스스로 뒤집어서 회개해서 하나님께 돌아와야 살아나는 역전의 주인공이 되는데 산헤립이 그저 왔던 길로 돌아가 자기가 살던대로 편안히 사니까 결국은 가장 믿었던 아들 둘에게 비참한 죽음을 당하게 되는 역전의 주인공이 되고 맙니다. 반면에 히스기야와 예루살렘은 어떻게 됩니까? 죽다가 살아나지요. 살아나는 역전의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산헤립은 비참한 죽음에 이르는 역전의 주인공이고 히스기야와 예루살렘은 살아나는 역전의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기댈 곳 하나 남아있지 않아서 그저 하나님만 바라봐야 했는데 46개 성읍 다 빼앗기고 하나 밖에 남지 않았잖아요. 그런데 산헤립은 앗수르 대제국이 남아있는 것입니다. 18만 5천명이 죽어도 아직 돈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못 믿습니다. 오히려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께만 부르짖어 기도했기 때문에 히스기야와 백성은 살아나는 역전의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이 역전이 바로 하나님이 보호하여 구원하시는 인생의 결론입니다.
스가랴12:8
그 날에 여호와가 예루살렘 주민을 보호하리니 그 중에 약한 자가 그 날에는 다윗 같겠고 다윗의 족속은 하나님 같고 무리 앞에 있는 여호와의 사자 같을 것이라
하나님의 날개 아래로 들어가 그 보호하심을 받으면 약한 자가 다윗 같이 되고 하나님 같이 되는 은혜를 입고 하나님의 천사같이 되는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역전이 있기 때문에 성도는 시간 속에서만 생각하며 일희일비하면 안됩니다. 이 세상의 시간 가지고 해석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순간이 캄캄한 밤 같고 일초 앞을 볼 수 없는 어둠 가운데 절망하지만 하나님의 역전이 있기 때문에 이 시간 바깥에서 영원 아래서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밤과 같은 고난이 오면 우리는 즉시 하나님의 방패 아래로 도망해야 합니다. 내 방패 믿지말고 세상의 방패 찾아 방황하지 말고 하나님의 방패 아래로 그 날개 밑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곳이 어디입니까? 바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인 것입니다. 우리는 나라의 위기를 맞이해서 하나님께서 지난 주 성령이 탄식하는 기도를 해야겠다 결정해서 이렇게 모였기 때문에 여러분들을 보호하여 구원하리라! 할렐루야! 그곳이 교회인 것입니다.
오늘은 성령 강림 주일입니다. 이 땅에서 공식적으로 교회가 시작된 생일입니다. 지금까지 역사의 교회를 향한 무수한 핍박과 방해가 이어졌지만 성령께서 그 날개로 덮으시고 방패로 가리셔서 교회를 지켜주셨습니다. 어떤 탄압도 여호와의 열심보다 뜨겁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세력도 주의 몸된 교회를 건드리지 못했습니다. 다 없어질 것같은 위기 가운데서도 교회와 함께 하시는 성령께서 역전하여 교회를 살려주셨습니다. 지금 북한에도 남아있는 7천명이 있는 줄 믿습니다. 그들을 보호하여 구원하시는 줄 믿습니다. 왜 북한에 남아있다고 하나요? 북한에 가보니 북한 사람들은 서로 자녀를 결혼시키자고 약속하면 영양실조가 되어 불구가 되어서도 무조건 결혼시킵니다. 명맥을 이어가려고... 그것을 생각하면 우리들교회 남자 여자는 아주 형편이 좋은 것입니다. 남자고 여자이면 결혼하라는 것은 아주 형편이 좋은 것입니다. 지금 인구절벽이 되었는데... 그런데 놀랍게도 믿음으로 결혼한 우리들교회가 이혼이 없잖아요. 그러니 학벌로 성품으로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결혼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로 인도되어 들어왔기 때문에 성령께서 보호하여 구원하시는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가족 가운데 이웃 가운데 아직 이 보호 아래로 들어오지 못한 사람이 너무 많아요. 이번 주 정말 마지막 시간이라고 생각하시면서 초청하시기 바랍니다. 다음 창립 22주년 전도 축제가 그분들이 하나님의 날개 아래고 방패 안으로 들어와 보호하여 구원하시는 은혜를 입는 진정한 인생 역전의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적용
-여전히 꿈꾸는 인생역전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높음을 자랑하거나 낮음을 부끄러워하지는 않습니까?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구원의 역전이 내 삶에 임했습니까?
-다음 주일에 누구를 초청하여 모셔 오겠습니까?
저는 원해 굉장히 불편한 사람이었습니다. 기준이 뚜렷하고 게으르거나 열심히 안 사는 사람의 인생은 쓰레기처럼 봤습니다. 재혼한 아내와도 관계가 회복되는 줄 알았는데 아내의 갑작스런 자살시도를 겪으면서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그 사건 앞에서 내가 이렇게 헌신했는데 왜 내게 이런 일이 싶은 마음이 들었고 하나님이 절 완전히 깨뜨리시더라구요. 그 때 목사님이 죄를 용서하지 말아달라고 기도하셨는데 그 말이 저를 해석하게 해주었습니다. 아 이게 내가 지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치리구나. 너무 아팠지만 그 고난을 통해 말씀도 들리고 진짜 회개도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건 이후 아내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이 되면서 동정이 아니라 애통이 생겼습니다. 내가 낳은 자녀도 힘든 데 남이 낳은 자녀 두 명에 자기가 낳은 자녀 두 명. 진짜 힘들었겠다. 그런 생각이 들면서 아내에 대해 애통한 마음이 들더라구요. 저는 아침에 못 일어나는 것을 정말 못 봅니다. 그러면 너무 쓰레기처럼 봅니다. 집에 들어가면 드라마 정주행하고 있고 이런 것도 너무 못봐주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아침에 일어나는게 아내를 깨울까봐 너무 미안해 아내에게 더 자라고 합니다. 드라마를 보고 있으면 또 막장 드라마 봐? 뭔데? 이렇게 관심을 가져주면서 같이 봐주기도 합니다. 아내도 말씀을 통해 요셉이 존재 자체가 형들에게 가해자였겠구나. 내가 새엄마인것 자체가 아이들에게 상처일 수 있겠구나 하면서 큰아들에게 눈물로 사과했습니다. 아들이 펄쩍 뛰며 친구 만나러 가는 것을 보고 그동안 얼마나 눌려있었는지를 깨달았다고 합니다. 지금 돌아보면 그 때 일이 없었으면 좋았던 게 아니라 꼭 필요했던 사건이었습니다. 우리를 깨어지게 하시고 애통하게 하셔서 말씀으로 살게하신 것이니까요. 결론은 왠만하면 이혼하지 않아야 하는데 그럼에도 재혼을 할거면 말씀에 대한 최소한의 믿음의 고백과 공동체가 있어야 그나마 버텨가는 것이지 그렇다고 문제가 안 생기는 것은 아니에요. 아프리카 선교보다 어려운 재혼에는 문제가 계속 생길 건데요 그래서 말씀과 공동체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유책 배우자고 뭐고 그런 사치스러운 소리좀 하지마세요. 다 유책 배우자가 되어서 양육권도 다 가져왔는데 20여년을 우리들교회에서 그렇게 잘 키웠는데 그냥 게임하다가 아빠가 한 번 때렸다고 당장 믿지 않는 친엄마한테 쪼르륵 가버리고 안 옵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자기 편할대로 가는 겁니다. 생각해보세요. 새엄마가 친엄마같이 키울 수 없어요. 친엄마는 존재 자체가 친엄마에요. 새엄마는 야단을 못치는 게 새엄마에요. 평생 잘해줘도 이렇게 가버리는 겁니다. 그러니까 너무 잘해주는 게 새엄마인데 스트레스 쌓여서 어떻게 잘해줍니까. 그런데 친엄마는 밥을 안해줘도 욕을 해도 그냥 친엄마입니다. 무조건 아이들이 아빠가 잘못했으니까, 엄마가 잘못했으니까 내 편을 들어줄것이다는 없습니다. 아이들은 친~ 이것 밖에 모릅니다. 장로님은 완벽하게 아이들에게 잘해주고 완벽하게 재혼한 아내에게도 잘해주는데 아내는 자살 기도를 하고 아들을 가버리고 그래서 이 분이 편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완벽한 사람이 얼마나 여러 사람을 불편하게 하겠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이렇게 사건을 주시니까 편한 사람이 되었다고 나누는 것입니다. 절대로 불신결혼하지 말고 신결혼 하고 이혼하지 말고 재혼하더라도 말씀이 없이는 버텨갈 수가 없다는 것을 공동체에서 얘기해주니까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보호하여 구원하리라는 여호와의 열심이 이루시는 것입니다. 나를 이 땅에서 누가 보호하여 구원해 주시겠어요. 구속사로 말씀을 해석하는 것이 가장 보호하여 구원하는 비결입니다. 말씀을 깨달아야 재혼이고 뭐고 다 해석되는 것입니다. 옳고 그름으로 생각하니까 이혼하고 어쩌고 저쩌고 하는 겁니다. 내가 말씀을 깨달으면 누구도 건드리지 못합니다. 이 밤에 말씀대로 역전하게 하시는 줄 믿습니다. 선한 목자가 되시는 분은 이 땅에 주님 밖에 없는 줄 믿습니다.